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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몸값

언제부터였을까. '돈'은 내 머리 속에서 점점 차지하는 영역을 확장해갔다. 대학원생 떄만 하더라도 돈은 먹고 살 정도만 있으면 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조건에 해당했다. 돈은 됐으니 일 대신 내가 하고픈 연구를 할 시간이 주어지길 바랐다. 물론 원하는 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일이 쌓였고, 돈도 쌓였다. 물론 지금 세보면 어차피 다 푼돈이지만, 모아놓고보니 그렇게 적은 돈도 아니다. 이번에 계약한 원룸 전세자금 중 대출금을 제외한 20%를 부모님께 손 안 벌리고 마련했다. 

입사 직후까지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돈은 상관없으니 직무나 빨리 바꿔줬으면 좋겠다는 바람 뿐이었다. 이러려고 취직한 게 아니다.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되어야 한다. 데이터 사이언스를 업으로 삼아 나중에 그것이 사회 곳곳에 자리 잡았을 때 그 사회를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계속해서 어필했다. 난 팀을 옮기고 말 것이다. 그거면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시작은 대학원 직속 선배 두 명이 글로벌 박사 펠로우십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던 것 같다. 그들은 하루종일 본인이 하고픈 연구를 하고도 연 2천만원을 받는다. 자의든 타의든 연구과제 몇 개를 더 하고 추가로 돈을 더 받겠지. 그럼 하루 절반을 자괴감을 느껴가며 일하다가 퇴근 후 저녁을 먹고서야 공부를 시작하는 내가 받는 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사실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상장하면 연봉을 크게 올려주겠다는 회사의 말에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그래, 돈이라도 더 줘야지.' 회사는 작년 말 상장에 성공했다. 막상 상장을 하고 연봉 통보 시점이 다가오니 걱정도 들었다. '별로 안 올려주면 어떻게 하지?' 어차피 나는 전문연구요원이라 최소 올해 말까지는 회사에 붙잡혀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쩌겠어. 때 되면 이직해야지.' 더불어 이상한 고민도 머리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더 많이 받아야 하는거지?' 

나는 그토록 싫어하는 직무에서 최고 인사고과를 받았다. 예상한 일이었다. 연봉이 적어서 회사가 내 석사학위를 경력으로 쳐준 것인지 안 쳐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신입 치고 회사와 직무에 빠르게 적응했다. 새로운 환경임에도 빠르게 지쳤다. 분명 예상했지만 아이러니한 상황. 그래도 연봉을 올릴 구실을 찾았으니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나는 얼마나 더 받아야 하나?'

내가 날 모르겠으니 눈에 보이는 건 나 아닌 다른 사람이다. 학벌 덕분에 주변 사람 연봉은 높기만 하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기술자다. 나는 기술이 없다. 그래도 그렇지, 너가 나 2명만큼 일을 한다고? 뒤를 돌아보면 더 아이러니하다. (물론 군대를 다녀와야 했겠지만) 석사를 안하고 학부만 졸업하고 취직했어도 역시 지금의 두 배를 벌었다. 나는 한번도 그를 부러워한 적 없었다. 지금도 후회하진 않는다. 그냥 기분이 이상하다.

그리고 이번주에 나는 연봉 통보를 받았다. 대충 마음에 두고 있던 범위가 있었는데, 그 최소값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 회사는 비율로 따지면 꽤 많이 오른 숫자임을 강조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갑자기 머리 속이 아득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왔다. 나는 얼마를 바랐던 건가. 그 금액을 바랐던 이유는 뭔가. 지금 드는 기분은 실망감인가. 이 돈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퇴근 후 스터디카페에서도 고민이 이어졌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임의로 정한 그 범위의 최소값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금액조차 맞춰주지 않은 회사가 너무도 괘씸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회사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달라고. 많이도 아니고, 조금만. 그렇게 그 범위의 최소값은 내 자존심이 되었다.

메일을 쓰면서 내 몸값에 근거를 대기가 너무도 힘들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다. 구글을 통해 찾은 자료는 실적을 정량화해서 준비해 가라고 한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이다. 영업직이면 모를까. 물론 흡사 자원 조달처 역할을 하긴 했지만 팀으로 같이 한 일에 내가 그 중 몇 퍼센트를 기여했다고 어떻게 주장할까? 이에 더해 회사가 먼저 통보한 연봉이 어떻게 책정된지도 모르고, 심지어 전문연이라 Plan B도 없다. 쓸 말이 없었다. 꾸역꾸역 이유를 만들어서 조금만 더 달라고 썼다. 

그래도 나는 돈만 보는 사람은 아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연봉을 못 올려준다면 자기계발비 지원을 해달라고 덧붙였다. 바뀔 직무 역량 향상에만 쓰겠노라 약속했다. 

그 다음날 나는 내게 연봉을 통보했던 부문장과 대면했다. '그래서 얼마를 더 달라는 건가?' 우물쭈물. 메일에 썼던 대로, 그 조금이요. '얼마 안 되네?' 그리고 연봉은 오르지 않았다. 메일에 덧붙였던 자기계발비 사용 허락만 받았다. 지금 그 조금 올리느니 나중에 인사 고과를 잘 받아서 크게 한 번에 올려라. 어차피 월급 받아서 돈 벌기 힘들다. 회사 주식을 사라. 회사에서 성장해서 나중에 창업을 하는 건 어떻느냐. 회사가 정말 필요로 하는 인재에 대해서는 수시로 연봉 계약을 다시 체결할테고, 사이닝 보너스를 줄거다. ……

그 얼마 안되는 돈을 못 올려서, 회사가 올려주지 않아서, 내 자존심이 상했다. 아, 내 몸값이 이거구나. 나는 x원짜리 인간. 이 x원 모은다고 뭘 할 수 있나. 역시 주식이나 해야하나. 그래서 주변 회사 동료들이 시간 날 때마다 정보를 주고 받는 거였나. 아니 이직을 준비해야 하나. 어디로? 얼마를 보고?

고백하건대 앞서 토하듯이 쓴 글이 최근 내 머리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이다. 나도 이런 잡념에 빠져있는 내가 한심하다. 잡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떨쳐내지 못해 더 한심하다. 회사가 그 조금을 올려줬더라면 고민이 사라졌을까? 모르겠다. 1년이 채 안되어 돈이 내 머리 속 영역을 가득채웠다는 사실이 소름끼치도록 놀랍다. 

어서 이 늪과 다를 바 없는 곳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이 구토물을 변기물과 함께 치워버려야 한다. 

그 x원짜리 인간은 내가 아니다. 

내 몸값을 매기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