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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기생충> 지극히 사적인 후기

영화를 본 지 5일 남짓 되었는데도 자꾸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한 번 털고 가려고 한다.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끝까지 지켜보며 했던 생각, 함께 본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걸었던 거리에서 했던 생각, 술냄새가 진동하는 심야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했던 생각들이 일부러 찾아보지 않아도 접할 수 밖에 없는 지인들이 남긴 해석과 리뷰 때문에 흐릿해질까 싶어 더더욱 글로 써야겠다.

친구가 기우(최우식 분)에게 수석을 선물해주는 씬에서 처음 나왔던가. 기우가 '이거 상징적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굉장히 이질감을 느꼈다. 대사가 뭔가 어색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연교네 집에서 기우가 또다시 '상징적'이라는 표현을 쓰고, 이후로도 상징적이라고 감탄사를 내뱉는 것을 보고 감독이 그 이질감과 어색함을 의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에서 연출은 곧 상징이다. 인물, 장소, 사건부터 소품, 대사, 구도, 색감, 소리 등. 모든 것은 무언가를 상징하며, 그렇기에 감독의 의도에 맞게 연출되어야 한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좋은 영화에서는 그렇다. 한 영화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 또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보고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 역시 영화 그 자체가 상징의 집합체고 그 상징이 가지는 의미는 무한히 확장하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것들이 너무 많고 또 상징의 방향이 일정치 않아 그 의미가 불분명할 때 영화는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다. 반대로 누가봐도 무엇의 상징인지 뻔하고 심지어 그 의미를 구구절절 설명하려 드는 영화는 단순하다 못해 망한 영화다.

때문에 나는 영화의 주인공이 어떤 대상을 두고 '상징적이다'라는 대사를 하는 걸 상상하기 어려웠다. 앞서 말했듯 망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너무도 당연한 금기였다. 기우가 상징적이라고 한 대상들은 모두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관객 역시 상징적이라고 생각할만한 연출이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기우를 통해 보기좋게 그 금기를 역이용한다. 기우가 왜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맞춰보라는 듯 말이다.

이 영화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영화 속 몇몇 장면이나 줄거리, 흔히 리뷰에서 언급하는 계급으로 나뉜 현실 사회가 떠올라서가 아니다. 기우가 가진 사고방식이 나와 너무 비슷해서, 내가 너무 기우와 같이 생각하고 살아와서, 기우 모습 속에 나 자신이 보였기 때문이다.

기우가 상징적이라고 표현했던 대상들은 기우로 하여금 계획을 세우고 또 다른 계획을 계속해서 붙여나가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 그 상징적인 것들은 곧 기우가 세우는 계획의 원천이다. '우와, 이거 굉장히 상징적이다!'고 감탄할 때 기우는 마치 계시를 받은 신도와도 같다. 그 상징은 계획을 세워도 되겠다는 파란불임과 동시에 어떻게 세워야 할지도 알려주는 표지판인 것이다.

그렇게 기우와 기정은 상징적인 것들을 만날 때마다 확장해나간 계획 속을 살아가고, 어느새 기택과 충숙까지 함께 계획에 합류한다. 계획이 틀어지기 직전 가족이 가진 술자리에서 기우가 가지고 있던 계획을 기억하는가? 모두가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기우만큼은 진지하게 본인의 계획을 말하고 있었다. 폭우, 그리고 문광과 함께 상황은 계획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가족은 다시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기택이 말한다. 아빠에게 다 계획이 있으니 없던 일로 하자고. 뒤에도 그가 직접 말하지만 거짓말이다. 무계획이야말로 그가 여태 인생을 버텨 온 방식이다. 하지만 기택의 고백이자 충고를 듣는 순간에도 기우는 수석을 꼭 껴안고 있다. 그렇다. 그는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는 수석이 여전히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상징이 바뀌었을 뿐이다.

아마도 기우는 수석으로 시작한 본인의 계획을 수석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듯 하다. 하지만 다시 그 계획은 무너진다. 오히려 그 수석은 자신의 머리를 들이받는다. 그렇게 기우가 정신을 차리나 싶지만... 마지막 씬에 나오듯 전혀 아니다. 이제는 집착으로까지 느껴지는 그는 또 다른 계획을 세운다.

결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지. 나처럼. 어쩌다 마주한 상징적인 대상들에 끝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힘입어 계획을 세우고 그 의미와 계획 속에 살아가는 너와 나는 그런 인간인거야. 상징적인 것들에 부여한 의미를 바꾸고 계획을 틀지언정 무계획으로 살지는 못하는 우리.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곳곳에 감독의 의도 아래 연출된 것들로 가득찬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나는 이게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다시 천천히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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