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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연구자/1W1B

당신이 옳다. (2018). 정혜신.

'그럴 수 있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던가. 습관처럼 '그럴 수 있지'라고 내뱉던 말은 어느새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내가 갖추는 기본 태도가 되었다. 나는 그것을 진리로 여겼기에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이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고 '그럴 수 있지' 마음가짐을 갖추기를 바랐다. 몇몇 지인이 좋은 습관이라며 칭찬을 하거나 더 나아가 효과를 봤다고 좋아해주면 역시 내가 옳았다며 더 자주 사용하곤 했다.

'그럴 수 있지'는 기본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나누는 일이다.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에게도,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를 집단에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런저런 상황에도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이유를 찾아 이해하고자 한다. 다만 공감할 필요는 없다. '그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도 아니고, 나 역시 그래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책 <<당신이 옳다>>를 처음 접했을 땐 저자가 내가 여태껏 '그럴 수 있지'에 가져왔던 믿음을 확인해주리라 기대했다. 통하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으나 다 읽고 나서는 내가 정말 여태껏 잘못 살았구나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기계적으로 '그럴 수 있지'로 일관해왔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거나,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집단이나 조직, 사건이나 상황 등에서는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고 그냥 머리나 마음 속에서 제쳐두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한 발 짝 더 들어가 존재에 관심을 비추고 이해를 넘어 공감을 해야했다. 그나마 늦지 않게 틀렸다는 사실을 알아 다행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당신이 옳다>>는 전에 읽은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정반대에 놓여있는 책이다. 저자는 서두부터 현대 정신의학을 비판하며 '적정심리학'을 주창한다. 그에게 진료실은 애초에 "의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관계, 의사 중심의 [환자-의사] 관계"가 형성되는 공간이다. 이 때 유리하다는 것은 단순히 환자가 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넘어 환자를 이해하는 방식과 틀이 순전히 의사에게만 있다는 뜻이다. 환자가 누구인지보다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그 증상에 따르면 어떤 병인지, 그 병에는 어떤 처방이 효과적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70만명에 달하는 모두 다른 사람들은 진료실을 찾는 순간 우울증이라는 진단명 아래 비슷한 처방을 받는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에 등장하는 선생님은 독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을만큼 좋은 의사이고, 그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은 <<당신이 옳다>>에서 강조하는 공감과 닿아있긴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목적은 결국 진단과 처방이다.

반면 정혜신이 진료실 바깥에서, 특히 트라우마 현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에 지친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가며 그려낸 '적정심리학'에서는 진단과 처방이 있던 자리를 공감이 차지한다. 공감은 의사라고 더 잘하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의사와 같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배우는 CPR처럼 사람을 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책은 여느 심리 내지는 우울증을 다루는 책과 달리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거나 위로하기보다 독자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다정한 전사'가 되도록 이끈다. 따라서 CPR 교범과 같은 이 책을 가장 인상깊게 읽을 사람은 아마도 우울증 환자의 가족이나 지인일테다. 하지만 당장 본인이 우울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읽어도 충분히 공감받고 위로받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당신이 옳다>>의 진짜 힘은 내가 나 자신과 공감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공감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나 자신에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거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그랬다. 무엇인지도 모를 '어른스러움'을 절대적인 가치로 추구했고, 그에 맞지 않는 감정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화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았다. 내 감정을 인정하고 들여다보기보다 부정하고 의심했다. 또 모순적인 감정이 들 때면 어떻게든 그 모순을 해결하려 들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타인을 대하다보니 대화가 항상 논쟁이나 설득으로 이어졌다. 상대방도 나처럼 자신의 감정에 비판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이 들면 풀려고 노력할 것이며, 결국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을 따를 것이라는 가정을 한 채 소통에 임했다. 나는 종종 판사가 되어 나만 있고 상대방은 없는 대화를 이끌었고, 상대방이 (내가 보기에)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인정하면 '이겼다'며 속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거나 타인에게 져주더라도 공감을 받고 싶어한다. 그 기쁨의 순간 나는 공감할 기회를 놓쳤다. 여태껏 나는 그렇게 이상적인 자아상을 만들고 거기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끼워맞춰왔다. 떄문에 나와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벽을 보고 말하는 것 혹은 목을 조이는 것과 같았으리라. 책을 읽었다고 한순간에 바뀔 수는 없겠지만, 감정을 무시하는 비현실적 이상 세계가 아닌 '리얼월드'에서 살아가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들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책은 나 자신과 내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고민거리와 꺠달음을 주었지만, 더 나아가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도 주었다. 내 존재가 더더욱 중요하게 주목받았으면 하는 인정욕구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어릴 때부터 내 인생 목표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벽돌 한 장을 쌓고 가는 것이었고 (누군가의 명언이었는데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정책에 관심을 갖고 전공으로 삼아 공부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책이라는 도구로 사회를 바꾸려고 하다보면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고 또 정책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즉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지워지곤 한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이 전혀 진행이 안되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큰 고민 없이 책에서 비판하는 '존재의 개별성'을 지우고 '집단적 정체성'만을 부여하는 일이 당연하게 이뤄질 때가 많다.

때문에 저자가 비판하는 현대정신의학의 자리에 사회과학이나 정책학을 대입해도 큰 무리가 없었다. 사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다는 것도 결국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인데, 우리는 종종 효과성과 효율성을 이유로 미시적인 관점을 놓치곤 한다.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정책은 해당 문제나 사회에 대해 겉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어쨌든 모델링을 하게 된다. 그 모델링은 필연적으로 거시적인 사회 체계 뿐만 아니라 정책의 이해관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정책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정책이 상정하는 모습의 개인만이 보이는 것이다. 이 모델링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지만, 한편 너무 매몰되어 놓치는 것들이 생기기도 한다. 더 심각하게는 다양한 문제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방식의 문제해결방법만이 적용되게 된다. 당장 사례가 여럿 생각나지만, 책 리뷰이니 나중으로 미루겠다.

어러모로 책을 통해 인간관계에서나 사회정책에서나 존재 자체에 주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마음 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타인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와 감정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다시금 다짐을 했다. 이전에 부모님께 선물로 책을 드렸을 때 하나도 읽지 않으시는 것 같아 실망하고 다시는 책을 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다시금 희망을 갖고 부모님께 책을 선물드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하는 의미는 단순히 책이 좋아서 한 번 읽어보시라가 아니라, 나는 당신께, 또 당신은 내게 서로 힘들 때 응급처치를 해줄 수 있는 든든한 우군임을 알리는 것이다. 이 응급처치 교본이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