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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 발을 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봤을 이화여대 오욱환 교수님의 글에서 영감을 얻어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에 4번에 걸쳐 대학원에 막 입학한 사람들을 위한 글을 썼습니다.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는 긴 준비 끝에 드디어 지난 4월 발송을 시작한 이메일 뉴스레터로,
연구를 연구하는 '어쩌다 연구자'가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격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그동안 발송된 뉴스레터를 살펴보고 구독해주시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 구독 Link: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75558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 아카이빙 페이지: https://page.stibee.com/archives/75558

대학원생의 처지를 비관하는 여러 짤을 보고서 비웃고도 대학원에 입학하신 여러분께.

대학원을 다니다보면 언젠가 한번쯤은 꼭 읽게 되는 글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화여대 오욱환 교수님의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인데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학자로서 가져야 할 소명의식과 함께 실용적인 조언이 담긴 글입니다.

우리 모두가 학문에 뜻이 있어 대학원에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들 공부를 좀 더 해보겠다는 마음은 있으시죠. (최소한 지원서에는 그렇게 쓰셨잖아요) 그렇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학원 생활을 해야 하나 싶어 윗 글을 읽다 보면... 지레 겁을 먹고 내가 대학원에 오는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ㅠㅠ)

대학원을 졸업하고서도 학문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 여전히 모르겠다 싶은 제 경험을 바탕삼아 훨씬 가볍고 덜 무서운 조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욱환 교수님의 글과 마찬가지로 20개 조언을 담고 있어 똑같이 20개를 순서대로 적었으니 함께 읽어보시면 더 좋을거라 생각합니다.

  1. 일단 코스웍에 집중해서 공부하다보면, '졸업은 할 수 있다'고 확신하십시오.(왜냐하면 제가 그러지 않아서 방황했거든요)

    대학원 첫 학기에는 학과마다 정해진 전공필수 과목을 수강하기 마련입니다. 해당 과목이 분명 여러분의 관심사와 다를 수 있고, 또 당장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면 코스웍에 집중하는 것만큼이나 안전한 길이 없습니다. 코스웍을 통해 여러분이 다니는 학과가 서있는 곳을 파악할 수 있고, 코스웍에서 읽는 논문을 교수님들이 내는 (이라고 쓰고 대학원생이 쓰는 이라고 읽는) 논문과 연결짓다보면 연구주제를 어떻게 선정하는지에 대한 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어느 시점부터 변화가 없는 실라버스도 있지만 왠만한 전공필수 과목 실라버스는 해당 분야의 고전과 트렌드를 모두 담기 마련입니다. 졸업 직전까지도 어떤 연구를 해야하는지 헤메는 분들을 많이 보곤 하는데, 코스웍을 열심히 해놓으면 그 안에서 어거지로라도 주제를 만들어서 졸업할 수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학점은 덤이겠죠.


  2. 누가봐도 너무 대단한 학자나 선후배, 동기를 멀리 하십시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집니다. 누구는 대학원생일 때 논문을 몇 편 썼다더라, 누구는 탑 대학에서 유학하고 벌써 임용이 되었다더라 등의 소문을 그러려니하고 넘기고 따라하려 하지 마세요. 성공한 사람에게는 운이 많이 따른 것이고, 내게도 그 운이 따르리란 법은 없습니다. 또한 특정 사람의 성공을 당신의 성공과 동일시 하다보면 오히려 자신의 길과 스타일을 잃게 됩니다. 그보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제각각 다른 길을 다양하게 걷고 있는지 파악하세요. 누구는 기계처럼 논문을 쓰고, 누구는 졸업논문만 쓴 채 회사로 취직했고, 또 누구는 볼 때 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맞고 틀린걸까요? 누구는 성공했고 누구는 실패한 걸까요? 학계든 어디든 정도(正道)란 없습니다.

  3. 졸업한 선배들 중 최악의 사례를 정하고, 반면교사 삼아 그보다는 잘하려고 하십시오.

    무탈히, 혹은 어떻게든 졸업한 선배들의 논문을 훑어보세요. 생각보다 대학원은 대단한 졸업논문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떻게든 걸작(마스터피스!)을 쓰고 졸업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졸업논문이 당신의 마지막 역작이 된다면 슬프지 않겠어요? 그건 단지 당신 앞에 놓인 계단 하나일 뿐입니다. 당신이 뜻만 있다면 앞으로도 훨씬 더 좋은 논문이나 책을 쓸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끝내고 완성한 경험이 당신을 다음 더 높은 계단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4. 학문의 길을 당장 선택해야한다고 조급해하지 마세요.

    학문의 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학석박을 스트레이트로 따고 강사 뛰거나 외국 포닥 나갔다 들어와서 바로 교수가 되는 신화를 믿지 마세요. 대학원 다니다가 아니다 싶어 다른 길로 갔다가다시 돌아와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더 환영받을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연구들이 창의성과 혁신은 다양성과 서로 다른 생각의 연결에서 발현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것처럼 보이던 경험들도 잘 잇다보면 당신만의 길을 가리키고 있을 겁니다.

  5. 읽고 쓰는 일 말고 다른 취미를 찾으세요.

    어차피 24시간 내내 읽고 쓸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몸을 쓰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취미 추천합니다만 영화나 드라마 시청, 음악 감상이나 연주 등 뭐든 좋습니다. 글을 읽고 쓰다보면 속이 상하고 피가 말리는데, 이 때 몸과 마음을 챙기지 못하면 더 이상 읽고 쓸 수도, 또 이 일을 즐기지도 못하게 됩니다. 학자도 사람입니다.

  6. 시간은 어찌됐든 언제나 부족합니다.

    힘들때 의지할 수 있고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세요.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한 사람이라면 학문을 위한 시간을 줄여서라도 인간관계에 최선을 다하세요. 학문에 투입하는 시간과 다른 업무에 할당하는 시간은 영합(zero sum)관계에 있을지 몰라도, 학문과 사람이 영합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학문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고 그 사람에는 당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7. 학문 외적 업무에 너무 자주 동원된다면, 학문의 길을 걷더라도 그 곳에서는 벗어나는 게 좋습니다.

    물론 학문 외적 업무에서 아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연구 업적을 쌓고 새로 임용된 교수님들조차 학문 외적 업무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그 분들은 학문을 직업으로 삼고 있고, 당신은 (최소한 아직은)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괴감이 들 정도로 학문 외적 업무에 동원된다면, 당신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볼모로 누군가 당신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벗어나는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분명 그 정도가 더 심해지기 전에 나오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8. 쓰는 것으로 시작하세요.

    보통 연구과정을 선행연구논문 등 자료를 찾아 읽고 → 연구질문과 가설을 정하고 → 실험을 하거나 설문조사, 인터뷰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 분석하고 → 논문을 쓰는 순서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틀린 건 아니지만 대부분 수없이 많은 자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 진도를 못 나가곤 하죠. 그와 반대로 쓰는 것으로 시작하기를 추천합니다.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쓰냐고요? 내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써보세요. X에 대해 연구를 한다면 X를 검색하기 전에 내가 X에 대해 알고 모르는 것, 내가 왜 X를 연구하고 싶은지 (혹은 연구해야 하는지) 형식에 신경쓰지 말고 한번 쭉 적어보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무엇을 찾아 읽어야 하는지 보다 명확해질 겁니다.


  9. 모르는 채로 연구부정을 저지르는 것만큼은 피하세요.

    위조나 표절, 연구비 부정사용과 같이 연구윤리 위반임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연구부정행위도 있지만, 생명윤리나 논문 저자 기재 및 순서, 부실학술활동 등 본인도 모른채 연구부정을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학계 안팎에서 자리를 확실히 잡았거나 옛날에 학위를 마친 사람들은 과거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거나 묻고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학교나 지도교수가 책임져주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고의든 실수든 연구부정으로 인해 당신의 미래가 어두워지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음을 잊지 마세요.

  10. 대학원 생활이 지속가능하도록 돈을 관리하되, 시간과 맞바꿀 때엔 주의하세요.

    공부하기 위해서는 등록금 말고도 들어가는 돈이 적지 않습니다. 시간제(파트타임) 과정이 아니라면 관심있는 분야의 연구과제에 참여해서 공부와 돈벌이를 함께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여건 상 공부와 무관한 아르바이트를 해야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문에 졸업이 늦춰진다면 얻고 잃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온 이상 회사를 다니는 친구보다 더 많이 벌 수는 없습니다. 최악은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 채로 시간을 보내는 일입니다.

  11. 수많은 책과 논문을 다 읽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세요.

    오욱환 교수님의 말마따나 책과 논문을 받아들자마자 첫 장을 읽어두는 것이 좋습니다(저는 책 서문과 논문 초록 및 서론을 읽습니다). 책장에 꽂힌 모든 책을, 또는 저장하거나 인쇄한 모든 논문을 읽은 연구자는 결코 없습니다.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노트나 책과 논문 첫 장에 이 책을 왜 샀는지, 혹은 이 논문을 왜 저장하거나 인쇄했는지 적어두십시오. 이렇게 하면 끝이 없는 자료의 홍수 속에서 그나마 정말 필요한 자료를 읽고 그렇지 않은 자료를 쳐낼 수 있습니다.

  12. 학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세요.

    한국연구재단에 등록된 국내 학회만 해도 약 4000개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세상엔 정말 다양한 학회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중심 학문/주제인지 알 수 없는 도떼기시장 같은 학회가 있는가 하면, 이토록 협소한 주제로도 사람이 모이는구나 싶은 학회도 있죠. 학회가 중심이 되는 학술대회와 학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흥미로운 연구나 뜻이 맞는 연구자를 만나기가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기대를 최대한 내려놓고 자신이 진행하는 연구의 진행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하다보면 나름 실망할 일 없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학회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 지도교수와 선배를 이용해서 본인을 포지셔닝하세요.

    그저 졸업이 목표라면 지도교수 Jr.가 되어 연구주제를 하나 '받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졸업을 위한 최고의 전략이죠. 하지만 그 이상을 꿈꾼다면 본인에게 영향을 주는 지도교수와 선배가 보지 않은 영역에 발을 들여 여러분은 무엇이 다른지 답해보세요. 하지만 지도교수의 학문분야나 관심주제와 연관성이 전혀 없는 곳에 서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두 발 중 새끼발가락이라도 지도교수 어깨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연결점을 찾기가 힘든 지경이라면, 지도교수 논문 중 아무거나 한 편을 어떻게든 인용할 생각으로 자신의 연구와 지도교수의 연구를 이어보세요.

  14. 기한 내에 완성한 습작이 미완의 걸작이나 대작보다 낫습니다.

    연구를 하다보면 유동적이기도 하고 반드시 엄수해야하기도 하는 마감기한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기한이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작업물에서 부족한 부분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끝없이 기한을 미뤄야하나 고민하거나, 기한을 넘겨서 이런저런 이유를 모두 동원한 사과문과 함께 제출하기도 하죠. 고민하고 사과문을 쓸 시간에 그냥 부족한대로 끝내세요. 그 마지막 순간에 습작이 걸작이나 대작이 될 순 없습니다.

  15. 연구업적 압박에 과몰입하지 말고 지금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석사-박사 여부, 전공 분야나 학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제 막 대학원에 발을 들인 사람에게 연구업적에 대한 압박을 가하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압박이 있더라도 조금 내려놓고, 없다면 스스로 받지 말고 자유를 충분히 활용하세요. 연구보고서와 공저, 번역이 작금의 교수업적평가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므로 그보다 창작에 몰두하는 것도 전략이지만, 그건 이미 자신의 연구분야 내 경험이 충분한 교수에게 해당하는 조언입니다. 연구업적이 될지 안될지 고민하지 않고 뭐든 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게 바로 지금입니다.

  16. 장강명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써야 하는 사람은 써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인다면 연구자를 해도 좋습니다. 대학원 입학 전후로, 심지어는 졸업 전후로도 내가 앞으로 연구자로서 계속 살고 싶은지 헷갈릴 떄가 있습니다. 그럴 떄는 본인 관심분야나 연구주제에 대해 책을 한 번 써보고 싶은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연구자는 좋든 싫든 다른 무엇보다 쓰는 사람입니다. 쓰는 일이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심각하게 거부감이 들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논문이 아닌 책을 쓰기 위해서는 작은 연구질문 한두개가 아니라 보다 광범위에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된 여러 연구질문들이 필요합니다. 그것들을 장기간에 걸쳐 한번씩 건드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연구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 하나는 마련된 셈입니다.

  17. 학술지 투고 결과의 기본 설정값은 '게재불가(reject)'입니다. 

    학술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여러분이 원하는 학술지에 투고했다면 잘 알려진 학술지들의 게재수락율(acceptance rate)이 10%를 하회하는만큼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종종 '수정 후 재심사(Major revision)'라는 희망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지지부진한 수정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만 기대가 없다면 실망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러분의 연구가 게재될 가치가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논문의 학술지 게재 역시 여러모로 운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게재가 되든 안되든 여러분의 연구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다 쓴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받을 일이기도 합니다. 논문을 완성했다면 논문이 제 자리를 찾을 때까지 여유를 가지고 여기저기 투고하되, 게재 판정 여부에 크게 신경쓰지 말고 다음 연구를 하세요.

  18. 연구 주제나 질문을 찾는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와있는 연구논문들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행연구논문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속한 학문분과의 트렌드와 다른 연구자들이 연구를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파악하는 데에는 선행연구논문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연구 주제와 질문을 찾기 위한 여정의 출발점은 논문이 아닌 여러분 근처여야 합니다. 평소 갖고 있던 호기심과 궁금증, 직간접적 경험이나 기사에서 시작해보세요. 그래도 어렵다면 지금 속한 학문분과를 왜 택했는지부터 생각해보세요. 내가 하는 연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연결되어 있어야 지속가능합니다.

  19. 되도록 마감 기한 전 충분한 퇴고 기간을 잡으세요.

    아무리 검토와 퇴고를 거듭해도 오타는 계속해서 나오기 마련이며, 100% 만족할만한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퇴고를 하지 않는건 맛을 보지 않으면서 요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퇴고할 때는 오욱환 교수님의 말슴처럼 다른 사람의 논문을 심사하듯 읽으세요. 실제로 다른 사람이 읽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다 쓰자마자 다시 읽기보다 다른 일을 하고 오거나, 다음 날에 혹은 한숨 눈을 붙인 후에 퇴고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20. 연구자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학계에 있어서가 아니라 항상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주변에서 더 이상 배우지 않는 교수를 찾는 일이 어렵지 않은데요.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기보다 반면교사 삼아 계속해서 배우며 배운 것을 토대로 다른 연구자에게 영감을 주는 연구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적용될 일은 멀었지만 '연구업적'을 계속해서 쌓고 있다고 꼭 계속해서 배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 자신도 구독자 여러분도 본인의 업적이 아닌 연구공동체가 공유하는 지식을 쌓아가는 연구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세 줄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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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년 11월 뉴스타파 보도의 '다단계 학회사업' 장본인인 김태훈은 언론사 아카데믹타임즈를 중심으로 C-Index, S-Index, R-Index 등의 새로운 비즈니스를 벌이고 있음
  • 이러한 Index들을 통해 국내 학회와 학술대회, 학술지를 평가하여 등급을 매기는 평가 사업에 눈독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본인이 대표이사로 있었던 학회에 적용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업 확장에 힘쓰고 있음
  • 대학랭킹과 각종 인용색인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학계는 자기규율체계의 핵심인 평가제도를 계속해서 아웃소싱해왔고, 그로 인해 생긴 구멍을 이용해 온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는 현실을 고려할 때 아카데믹타임즈의 사업이 부실학술활동의 정당화 도구로 쓰인다면 앞으로 학계는 더 썩을 수 밖에 없음

지난 2018년 여름 뉴스타파가 <'가짜 학문' 제조공장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가짜학회' 이슈를 처음 공론화한 이후 한동안 학계 안팎으로 부실학술활동이 화제에 올랐다. 약 1년 동안 공식적인 용어조차 없었던 현상에 '부실학술활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젔고, 뉴스타파 기사에서 언급된 와셋(WASET)과 오믹스(OMICS)를 중심으로 해당 학회에 참가한 연구자들에 대한 조사와 징계가 진행되었으며, 한국연구재단과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을 중심으로 예방 가이드라인과 부실학회/학술지 검색 시스템 등이 갖춰졌다.

당시 한 대학원생은 한 교수를 중심으로 꾸려진 다단계 학회사업을 발견하여 며칠동안 조사하여 뉴스타파에 제보를 했고, 해당 내용이 보도되며 역시 학계 안팎으로 작지 않은 충격을 불러온 바 있다. (참고: '아는 사람 이야기': 뉴스타파 보도 <현직 교수, 페이퍼컴퍼니 끼고 '다단계 학회사업'> 제보) 이후 기사에서 언급된 인문사회과학기술융합학회(HSST)의 등재지 <예술인문사회 융합 멀티미디어 논문지(AJMAHS)>와 보안공학연구지원센터(SERSC)의 등재지 <보안공학연구논문지(JSE)>는 등재탈락을 면치 못했고, 두 학회들(지만 주식회사였던 곳)은 사실상 문을 닫은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면 대충 마무리 된 것 아니냐고 물을 사람들도 있을테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문제시 된 와셋과 오믹스, HSST와 SERSC만 주목을 받고 언론에서 다루지 않은 수많은 부실학회 및 학술지, 혹은 부실의심학술활동(questionable research practices)은 거의 공론화되지 않아 매우 안타까웠다. 이전에도 지적했듯 특정 학회나 학술지를 '가짜' 혹은 '부실'이라고 규정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며, Beall's List나 Cabells' Predatory Reports와 같은 블랙리스트를 쓰거나 Web of Science나 Scopus와 같은 저명한 학술인용색인을 화이트리스트로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평가제도를 포함한 학계의 자기규율체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이상 더 교묘해질 뿐이다.

서론이 길었는데, 오랜만에 부실학술활동을 주제로 글을 쓰게 된 건 SNS를 통해 한 선생님께서 다단계 마케팅을 차용한 학술대회 학술위원 초청 이메일을 제보해주셔서 관련 내용을 조사하다 발견한 내용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일단 해당 이메일은 부실학회가 전형적으로 보이는 패턴에 따라 학술대회를 운영할 학술위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학술위원에게 마감일 연장혜택과 함께 논문 투고를 조건으로 내걸고, 가입비를 내고 이사회원이 되면 자신만의 세션을 구성해서 해당 세션 논문들에 등재지 게재 기회를 준다고 한다. 2편 이상 투고 시 영문논문에 한해 편당 등록비 10%를 할인해준다는 혜택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내용도 있었다.

많이 본 수법인 것에 더해 두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1) 이메일 제목에 언급된 '2021년 6월 3차': 상반기인데 이미 3차까지 학술대회를 한다는 건 1년에 6회를 한다는 뜻으로, 꽤나 큰 학회조차 계절별 학술대회를 여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흥미로운 숫자였다. 2) 학회 이름이 '미래융합기술연구학회(FuCoS)': 이름에서부터 불길한 예감이 든다. (...)

학회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간단하게 조사를 해보니 '다단계 학회사업'의 장본인 김태훈 교수가 대표이사로 있던 아태인문사회융합기술교류학회(SoCoRI)가 이름을 바꾼 것이었다. 2018년 뉴스타파 보도 당시엔 HSST와 SERSC가 등재지인 AJMAHS와 JSE를 활용하여 성행했다면, 둘 모두 등재탈락한 후에 SoCoRI가 2019년 산하학술지인 <아시아태평양융합연구교류논문지(APJCRI)>를 KCI에 새로 등재시키는데 성공하고 FuCoS로 이름을 바꿔 운영중이었던 것이다. HSST와 SERSC와 마찬가지로 학회장과 학술지 에디터는 모두 해외 학자라고 써져있지만, KCI에는 다른 국내 교수가 학회장으로 등록되어 있고, 등기사항으로도 역시 대표이사는 다른 사람이었다. 김태훈 교수는 2018년 11월 뉴스타파 보도 직후 사임했다고 나온다.

아, 말이 나왔으니 첨언하자면 김태훈(2018년 뉴스타파 보도 당시 성신여대 융합보안공학과 교수)은 더이상 교수가 아니다. 해임당했는지 자진 사임했는지 공식적인 자료는 찾기 어려웠지만, 일단 성신여대 홈페이지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었고, 가명을 썼지만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대충 다 알 수 있는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김태훈에 대한 후속 취재로 억울한 사정이 밝혀졌다고 하지만 나는 접한 바 없고, 김태훈과 HSST 회장 김행곤 대구가톨릭대 교수간의 사이가 틀어진 건 분명해보인다. 기사는 신청만 하면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는 '한국공보뉴스'에서만 찾을 수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기사가 작성된 성북본부의 장이 김태훈이다. 동명이인일까? 아니라는 증거를 후술하도록 하겠다.

한편, FuCoS의 학술대회 웹사이트에서 또다른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우리 학회는 부실 학술대회 예방을 위해, C-Index 평가기준(http://www.actimesnews.info/)을 준수합니다.

우리 학회는 발표 장면을 녹화하여 DMI 등록(http://www.digitalmediaid.org/)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학회는 부실 학회 예방을 위해, S-Index 평가기준(
http://www.actimesnews.co.kr/)을 준수합니다.

우리 학회는 부실 학술지 예방을 위해, R-Index 평가기준(http://www.actimesnews.kr/) 및 Trace of Reveiw 평가기준(http://actimesnews.net/)을 준수합니다."

처음 듣는 "index"들의 향연에 잠시 어지러워 숨을 골라야 했다. 각 사이트에 들어가 내용을 확인하고 난 후 김태훈의 후속사업이 어디로 향해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다름 아닌 Web of Science나 Scopus가 임팩트 팩터 등 인용지표로 학술지를 줄세우고 각종 기관이 대학랭킹을 만들어 대학에 순위 내지는 등급을 매기듯이 한국연구재단이 시행중인 한국학술지인용색인(Korea Citation Index) 등재 제도에서 더 나아가 국내 학회와 학술대회, 학술지에 점수 및 등급을 매기는 평가 비즈니스 모델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각 사이트에 적힌 index들의 설명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다단계 학회사업의 장본인의 구상이라는 이유로 이 index들이 모두 '가짜'라거나 속임수라고 주장할 생각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전에 '해킹'이라는 단어를 썼듯 김태훈이라는 시스템 해커는 부실학술활동을 둘러싼 학계의 문제점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는 이를 정당하든 아니든 자신이 고안한 비즈니스 모델로 수익화를 꾀하고 있다는 게 내 해석이다. 이런 활동에 얼마나 학계를 위한 진정성이 있는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각 사이트를 살펴본 후 '이런 좋은 일을 하려는 사람이 있구나'하며 김태훈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이 index들이 모두 김태훈의 작품임은 각 사이트에서 언급하고 있는 상위기관인 '아카데믹타임즈'를 통해 알 수 있다. 실제로 모두 actimesnews를 도메인 주소 제목으로 삼고 있고, 이들을 백링크하고 있는 아카데믹타임즈라는 곳은 다름 아닌 언론사다. 홈페이지에서 명시하고 있진 않지만 김태훈이 대표로 있다. 사무실 역시 김태훈이 일하던 성신여대 근처이기도 하다. 동명이인일 확률도 있지 않을까 싶어 각 기사 작성자 이메일을 확인했다. 대부분 taihoonn@empas.com으로 되어있다. 그가 논문을 정말 많이 쓴 생산적인 연구자였던만큼 구글링을 통해 김태훈의 이메일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카데믹타임즈의 기사들은 대부분 보도자료를 그대로 가져다 쓴 형태인데, 반대로 다른 언론사에 기사를 작성해서 보낸 사례도 있다. 바로 C-index를 비롯한 아카데믹타임즈의 사업을 홍보하기 위한 보도자료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한국공보뉴스에 실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에는 이영경 기자를 통해 주기적으로 간접광고(PPL)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려운 기사를 내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유명 유튜버 보겸이 사용하는 '보이루'라는 인사말을 여성혐오로 해석한 윤지선 교수의 <철학연구> 논문이 이슈화가 되자 은근슬쩍 R-Index에 따르면 <철학연구>의 평가점수가 높지 않다고 지적하는 기사를 올린 바 있다. 해당 기사를 작성한 이영경 기자의 이름 역시 익숙해서 다시 찾아보니 법인등기 상으로 FuCoS의 대표이사와 같았다. 동명이인인지 확인은 하지 못했다.

아카데믹타임즈의 Index 사업들은 만든지 얼마 되지 않은만큼 자리잡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쪽에 관심이 많은 나조차도 이번에 처음 들었을 정도라면 인지도가 높지는 않은 듯 하다. 하지만 대학랭킹과 마찬가지로 각 학회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단 순위나 등급을 매기기 시작하고 나중에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하면 평가기관의 공신력이나 방법론의 엄밀성과 무관하게 모두가 신경쓰는 Index로 자리잡을 가능성도 작지 않다. 아카데믹타임즈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일단 등급을 다 매겨놓았다.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 깨알같이 FuCoS(이름 변경 전 SoCoRI)와 산하 학술지는 모두 가장 높은 S 혹은 A 등급이 매겨져있는 것도 흥미롭다.

다시 말하지만 아카데믹타임즈의 이러한 Index 사업들이 어떻게 학회/학술대회/학술지를 평가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이 글에서 Index마다 나름 자세히 써져있는 설명을 하나하나 읽고 분석하지 않은 이유다. QS나 THE, 중앙일보 등의 대학랭킹도, Web of Science나 Scopus와 같은 학술인용색인도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신경쓰는 사람은 극소수다.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을 구상한 자가 벌여놓은 판에 하나둘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어느새 모두가 참여자가 되어 높은 순위나 등급을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게임이 된다.

처음으로 돌아와서 FuCoS가 개최하는 학술대회(고맙게도 아카데믹타임즈가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학술 발표가 정상적으로 진행된 것이라는 증거"를 관리해주는 DMI라는 서비스 덕분에 FuCoS 학술대회의 모든 발표를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와 발행하는 학술지를 살펴보자. '융합', '학제간연구'를 표방하고 있지만 정말 융합 내지는 학제간연구를 시도한 연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양한 학문분야 연구들이 모인 메가컨퍼런스 및 메가저널(megajournal)이다. 때문에 더더욱 학술대회나 학술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참여자 간의 학술적 교류가 제대로 일어나고 있는지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뉴스타파가 WASET에서 했던 것처럼 아예 가짜 논문을 제출하고 걸러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지 않는 이상 FuCoS를 비롯한 다른 여러 학회들을 가짜학회 혹은 부실학회로 규정하기는 힘들다. 나 역시도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느낌상 혹은 정황상 그런 쪽에 가까워보인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김태훈이 2018년까지 운영했던 (혹은 지금도 운영중인) 다단계 학회사업 역시 이런 배경 위에서 가능했다.

김태훈이 새롭게 벌이고 있는 사업은 이러한 부실 및 부실의심 학술활동의 정당화 도구로도 쓰일 수 있다. 각종 Index 상으로 보았을 때 형식적으로 괜찮다는 곳을 학술활동의 내용을 토대로 문제삼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그리고 연구자들은 귀신같이 이런 구멍을 잘 찾아내어 활용할 수 있다. HSST의 등재지 AJMAHS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1년에 무려 1000편이 넘는 논문을 실었다. 우리나라에서 게재한 논문 중 6% 이상이 부실학술지임에도 불구하고 Scopus에 등재된 324개의 학술지에 실렸고, 이는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연구) 김태훈은 보다 큰 뜻이 있어 제 발로 교수직을 던지고 대학을 나온 듯 하지만 (돈이 되는 사업이 눈에 보이고 교수직이 방해만 된다면 왜 그러지 않겠는가?), HSST 회장 김행곤 교수는 작년 대구가톨릭대에서 30년 근속상을 받을 정도로 별 문제없이 학계에 머물고 있다. 부실학술활동을 통해 교수에 임용되고 승진하고 자리를 유지한 사람들은 있지만 밝혀진 후에도 처벌받은 사람들은 별로 없다. 시스템 해커들과 그들이 뚫은 백도어를 부단히 활용한 연구자들로 인해 학계는 병들어가고 있지만 겉보기엔 문제가 없어보이니 아무도 소리높여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가? 퇴근 후나 주말 밖에 시간을 못 내고 이런 곳에 돈 쓰기 쉽지 않은 사회초년생이다보니 스모킹건을 확보하기 어려워 아쉬울 뿐이다. 이쯤되면 내가 왜 요지경 학계에 애정을 갖고 연구자가 되고 싶어하는지도 혼란스러운 지경이다.


...라고 한 대학원생이 글을 써서 보내왔다. 화이팅.

'그럴 수 있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던가. 습관처럼 '그럴 수 있지'라고 내뱉던 말은 어느새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내가 갖추는 기본 태도가 되었다. 나는 그것을 진리로 여겼기에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이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고 '그럴 수 있지' 마음가짐을 갖추기를 바랐다. 몇몇 지인이 좋은 습관이라며 칭찬을 하거나 더 나아가 효과를 봤다고 좋아해주면 역시 내가 옳았다며 더 자주 사용하곤 했다.

'그럴 수 있지'는 기본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나누는 일이다.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에게도,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를 집단에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런저런 상황에도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이유를 찾아 이해하고자 한다. 다만 공감할 필요는 없다. '그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도 아니고, 나 역시 그래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책 <<당신이 옳다>>를 처음 접했을 땐 저자가 내가 여태껏 '그럴 수 있지'에 가져왔던 믿음을 확인해주리라 기대했다. 통하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으나 다 읽고 나서는 내가 정말 여태껏 잘못 살았구나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기계적으로 '그럴 수 있지'로 일관해왔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거나,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집단이나 조직, 사건이나 상황 등에서는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고 그냥 머리나 마음 속에서 제쳐두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한 발 짝 더 들어가 존재에 관심을 비추고 이해를 넘어 공감을 해야했다. 그나마 늦지 않게 틀렸다는 사실을 알아 다행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당신이 옳다>>는 전에 읽은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정반대에 놓여있는 책이다. 저자는 서두부터 현대 정신의학을 비판하며 '적정심리학'을 주창한다. 그에게 진료실은 애초에 "의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관계, 의사 중심의 [환자-의사] 관계"가 형성되는 공간이다. 이 때 유리하다는 것은 단순히 환자가 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넘어 환자를 이해하는 방식과 틀이 순전히 의사에게만 있다는 뜻이다. 환자가 누구인지보다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그 증상에 따르면 어떤 병인지, 그 병에는 어떤 처방이 효과적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70만명에 달하는 모두 다른 사람들은 진료실을 찾는 순간 우울증이라는 진단명 아래 비슷한 처방을 받는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에 등장하는 선생님은 독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을만큼 좋은 의사이고, 그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은 <<당신이 옳다>>에서 강조하는 공감과 닿아있긴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목적은 결국 진단과 처방이다.

반면 정혜신이 진료실 바깥에서, 특히 트라우마 현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에 지친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가며 그려낸 '적정심리학'에서는 진단과 처방이 있던 자리를 공감이 차지한다. 공감은 의사라고 더 잘하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의사와 같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배우는 CPR처럼 사람을 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책은 여느 심리 내지는 우울증을 다루는 책과 달리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거나 위로하기보다 독자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다정한 전사'가 되도록 이끈다. 따라서 CPR 교범과 같은 이 책을 가장 인상깊게 읽을 사람은 아마도 우울증 환자의 가족이나 지인일테다. 하지만 당장 본인이 우울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읽어도 충분히 공감받고 위로받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당신이 옳다>>의 진짜 힘은 내가 나 자신과 공감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공감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나 자신에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거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그랬다. 무엇인지도 모를 '어른스러움'을 절대적인 가치로 추구했고, 그에 맞지 않는 감정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화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았다. 내 감정을 인정하고 들여다보기보다 부정하고 의심했다. 또 모순적인 감정이 들 때면 어떻게든 그 모순을 해결하려 들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타인을 대하다보니 대화가 항상 논쟁이나 설득으로 이어졌다. 상대방도 나처럼 자신의 감정에 비판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이 들면 풀려고 노력할 것이며, 결국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을 따를 것이라는 가정을 한 채 소통에 임했다. 나는 종종 판사가 되어 나만 있고 상대방은 없는 대화를 이끌었고, 상대방이 (내가 보기에)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인정하면 '이겼다'며 속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거나 타인에게 져주더라도 공감을 받고 싶어한다. 그 기쁨의 순간 나는 공감할 기회를 놓쳤다. 여태껏 나는 그렇게 이상적인 자아상을 만들고 거기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끼워맞춰왔다. 떄문에 나와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벽을 보고 말하는 것 혹은 목을 조이는 것과 같았으리라. 책을 읽었다고 한순간에 바뀔 수는 없겠지만, 감정을 무시하는 비현실적 이상 세계가 아닌 '리얼월드'에서 살아가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들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책은 나 자신과 내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고민거리와 꺠달음을 주었지만, 더 나아가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도 주었다. 내 존재가 더더욱 중요하게 주목받았으면 하는 인정욕구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어릴 때부터 내 인생 목표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벽돌 한 장을 쌓고 가는 것이었고 (누군가의 명언이었는데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정책에 관심을 갖고 전공으로 삼아 공부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책이라는 도구로 사회를 바꾸려고 하다보면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고 또 정책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즉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지워지곤 한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이 전혀 진행이 안되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큰 고민 없이 책에서 비판하는 '존재의 개별성'을 지우고 '집단적 정체성'만을 부여하는 일이 당연하게 이뤄질 때가 많다.

때문에 저자가 비판하는 현대정신의학의 자리에 사회과학이나 정책학을 대입해도 큰 무리가 없었다. 사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다는 것도 결국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인데, 우리는 종종 효과성과 효율성을 이유로 미시적인 관점을 놓치곤 한다.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정책은 해당 문제나 사회에 대해 겉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어쨌든 모델링을 하게 된다. 그 모델링은 필연적으로 거시적인 사회 체계 뿐만 아니라 정책의 이해관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정책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정책이 상정하는 모습의 개인만이 보이는 것이다. 이 모델링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지만, 한편 너무 매몰되어 놓치는 것들이 생기기도 한다. 더 심각하게는 다양한 문제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방식의 문제해결방법만이 적용되게 된다. 당장 사례가 여럿 생각나지만, 책 리뷰이니 나중으로 미루겠다.

어러모로 책을 통해 인간관계에서나 사회정책에서나 존재 자체에 주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마음 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타인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와 감정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다시금 다짐을 했다. 이전에 부모님께 선물로 책을 드렸을 때 하나도 읽지 않으시는 것 같아 실망하고 다시는 책을 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다시금 희망을 갖고 부모님께 책을 선물드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하는 의미는 단순히 책이 좋아서 한 번 읽어보시라가 아니라, 나는 당신께, 또 당신은 내게 서로 힘들 때 응급처치를 해줄 수 있는 든든한 우군임을 알리는 것이다. 이 응급처치 교본이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스터디 논의 내용만 정리하다보니 정작 책에서 읽은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다시 찾아 읽으려해도 접근성이 떨어져 책의 각 단원별로 중간과 마지막에 정리된 요약과 개념을 번역해서 올려둔다. Notion 링크로 공유하니 논의 내용보다 책 내용이 궁금한 사람은 해당 문서만 보면 되겠다.

이번 단원 정리 link: https://www.notion.so/realjoonha/Chap-8-Contemporary-Feminist-Theories-Summary-Concepts-30393650b3d84916905104631ad32a4c

지난 스터디를 마무리하고 다음 일정을 잡으면서 책 8단원 주제를 살펴봤을 때 내 마음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2년 전 <대학원생 권리강화 방안 연구>를 수행하면서 뿌리깊게 자리잡은 권력구조와 그 파급효과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막상 대학 혹은 학계 안에서의 사례연구나 이론이 많지 않아 다른 분야를 살펴보니 페미니즘이야말로 정말 오랫동안, 또 광범위하게 젠더 간 권력 관계와 그로 인한 차별과 억압을 연구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특히 관심이 깊어졌다. 하지만 나름 관심을 갖고 이런 저런 글을 찾아 읽었다고 하더라도 기사나 칼럼,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연구논문이 주를 이뤘고 부끄럽게도 이론을 공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기대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스터디원 중 나만 남성이라는 점은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책을 읽다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나오거나 내 의견에 반하는 내용이 나왔을 떄, 그것을 전처럼 천진난만하게 잘 모르겠으니 설명을 부탁하거나 의문을 표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또 반대로 내가 남성이기 때문에 같이 스터디하는 분들이 내 눈치를 보고 솔직하지 못하는 건 아닐지 걱정했다. 피차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나쁠 게 없지만, 나도 여성들과 페미니즘에 대해 깊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고, 다른 분들도 비슷할텐데 이 기회에 보다 다양한 관점으로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했다. 다행히도 결과적으로 나도 용기를 내서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했고, 물론 막상 속마음을 들춰보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다른 분들도 그런 것 같다.

다른 단원은 책의 주 저자인 George Ritzer와 Jefferey Stepnisky가 썼지만, 이 단원만 Patricia Madoo Lengermann, Gillian Niebrugge라는 객원 필진이 썼는데, 찾아보니 두 사람은 <<The Women Founders: Sociology and Social Theory, 1830-1930>>이라는 책을 집필한 바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페미니즘과 젠더학이 사회학에서 주변화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왜 사회학 전체를 검토하고 조망하는 책을 쓰는 저자들조차 이 단원만 떼내어 다른 저자들에게 맡기는가? 물론 내가 이번 스터디에 참여하기 전에 가졌던 마음과 비슷한 마음, '나는 남성이라 잘 모르는데...' 혹은 '내가 이 단원을 쓸 자격이 있나...'와 같은 조심스러움에서 비롯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렇다면 단원별로 각각 해당 분야 연구자에게 맡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조심스러움과 책의 한 단원을 페미니스트 이론에 할애했다는 점은 분명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알게 모르게 여전히 페미니즘을 '여성'의 영역으로만 남겨두고 있는 저자들의 생각도 엿보였다.

젠더학의 위치와 페미니즘 연구자에 대한 편견은 본문에서도 나오며, 스터디에서도 논의가 되었다. 바로 다른 학문과 연구자가 그들의 실천주의적인 성향을 빌미삼아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이론을 학문분야나 사회학 이론으로 인정하기보다 사회운동으로 보고 페미니즘 연구자 역시 연구자 아닌 활동가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쉽게 그런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젠더학과 페미니즘에만 해당하는 편견은 아니지만,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공을 바꾸고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하게 된 내가 연구와 운동을 병행하는 사람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 아이러니하다. 학문적 가치가 기존 학계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분과 학문에 소속된 연구자들에 의해 결정된다거나 국내에서 제도적으로 젠더학을 전공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는 등 여러 원인이 논의되었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보이진 않았다. 다만 스터디원 모두 직업 연구자가 되고자 하는 게 아니더라도 학문을 하려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에도 다양한 분파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스터디를 통해 정리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소득이었다. 안티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을 공격할 때 즐겨 노리는 점이 바로 이 다양성이다. 이번 스터디에서 읽은 단원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듯 젠더 간 차이에 주목하는 문화적 페미니즘 (cultural feminism)과 본질주의적 페미니즘(essentialist feminism), 젠더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 (liberal feminism), 합리적 선택 페미니즘(rational choice feminism), 젠더 억압 이론을 설명하려는 정신분석적 페미니즘(psychoanalytic feminism)과 래디컬 페미니즘(radical feminism), 더 나아가 구조적 억압 이론으로 확장시키려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socialist feminism)과 교차성 이론(intersectionality theory)은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명확하다. 모두 여성의 경험과 관점에 중점을 두고 여성성을 비롯한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명제에는 동의하지만 여성의 범주나 여성성의 근원 등 다양한 곳에서 의견을 달리한다.

사실 이런 다양성은 어떤 학문에서나, 또 어떤 운동에서나 나타나는 특징인데 페미니스트, 더 나아가 여성 전체가 같은 입장을 갖도록 요구하는 것은 과한 일이다. 안티페미니스트들이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며 혐오가 아닌 연대, 페미니스트가 아닌 휴머니스트를 외치는 것이 겉보기엔 합리적일 지 모르겠다. 이 다양한 페미니즘 중 하나의 분파, 또 그 분파에서의 운동은 분명 어디선가 틀리거나 다른 페미니즘과 의견이 갈리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지점이 전혀 없는 학문이나 운동은 사이비 종교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숙명여대 일부 학생이 트랜스젠더 신입생이 입학하지 못하도록 거부 운동을 펼친 것에 비판적이지만 그 떄문에 페미니즘은 틀렸다거나 실패했다고 보지 않는다. 여성의 범주를 두고 페미니즘 사이에 이견이 있다고 이해할 뿐이다. 또한 나는 조직의 여성 비율을 늘려야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여성이 장점을 가지는 돌봄과 배려 문화가 조직에 필요하다고 할 때 그것이 오히려 여성의 역할과 능력에 한계를 노정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당 주장에도 역시 저평가된 여성성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재발견하려는 목적이 있다. 다양한 페미니즘들은 틀리기도 하고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서있는 공유지대를 바라보면 절대로 페미니즘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페미니즘은 옳다.

마지막으로 스터디원 한 분이 말씀하셨던 내용은 내게 큰 숙제를 남겼다. N번방 사건과 같은 심각한 성폭력 및 성착취 이슈에서라도 남성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해주고 함께 연대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기대 자체를 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 분의 의견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남자들은 선악이 너무도 분명한 사안에서조차 숨기 바쁜가?

나는 다른 글(<N번방과 새벽의 방문자들>)로 남성으로서 N번방 사건을 접하며 느낀 점을 쓰기도 했고, 스터디에서도 비슷한 내용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남자들이 조용한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우선 N번방 사건과 같은 성폭력과 성착취를 페미니즘과 별개의 사안으로 분리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이들은 숨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통 조주빈을 비롯한 가해자 집단을 비판하는 동시에 페미니스트도 함께 비판하는 특징을 보이며, '우리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지 말라'는 구호 아래 뭉친다. 이런 주장이 왜 틀린데다가 의미도 없는지 이미 밝힌 바 있으니 길게 적지는 않겠다.

동성사회성(호모소셜)을 잃는 것, 즉 남성 카르텔에서 벗어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결코 작지 않지만, 내가 이전 글에서도, 또 스터디에서도 이해를 빌었던 것은 그간 남성문화 속에서 살고 또 기여해 온 자신을 버려야 하는 데에서 오는 장벽이다. 한명의 남성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함께 연대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신, 더 나아가 현재의 자신과도 단절이 필요하다. 나는 특히 섣불리 '난 아니야!'라고 외칠 수 없는데 공개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마치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순적인 행동은 아닐지 고민을 많이 했다. 같은 남성문화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분명히 잘못이 있는데 그 장벽을 깨거나 뛰어넘지 않은 채 성폭력 및 성착취 가해자 집단을 향해 돌을 던지는 남성들은 앞서 말했듯이 결코 여성과 함께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속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투표한 사람이 그의 탄핵을 외치는 촛불시위에 나가는 것에 비유하고 있을 때, 다른 스터디원분께서 탁월한 비유로 기독교인에게도 진정한 회개가 어렵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페미니스트 및 여성분들께 너무도 미안하지만 그 장벽을 깨거나 넘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는 점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비롯한 적지 않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있고, 연대에도 마음이 열려있으며,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을 수 있지만 반성하고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변화를 꾀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함꼐 싸워나가면 좋겠다.


가끔 서점을 들를 때마다 항상 베스트셀러 칸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다. 곰돌이 푸나 카카오프렌즈 등 각종 캐릭터가 제목에 들어가는 수많은 '심리'라는 분야로 분류되지만 실상 별 의미없는 (물론 당시 내 생각이다) 위로로 가득 찬 책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제목이 워낙 자극적이어서 조금이나마 생긴 흥미조차 참고 들춰보지도 않았다. 내 눈에 비슷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길래 그저 '요즘 사람들이 저런 책을 좋아하나보다'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요즘은 예전이라면 절대 읽지 않았을 심리 책이나 에세이에 손이 간다. 여전히 심리학이라는 학문 전체에 대한 불신이 어느 정도 있는데, 이전에는 불신을 넘어 심리학이나 심리 관련 책, MBTI를 비롯한 여러 검사들을 (SNS에서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피했다. 웃기게도 그런 것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 자체를 '약함'을 드러내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청소년 자살률에 대한 기사를 보며 '요즘 애들 정신력이 약해서 걱정'이라고 혀를 끌끌 차실 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된다고 반발해놓고도 막상 나 역시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몸의 fitness에 집착하는 것처럼 마음과 정신 역시 건강하다고, 아니 건강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붙들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나 자신을 속여왔다.

리디셀렉트에서 읽을만한 책이 없나하고 둘러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눈에 들어왔을 때, 의심 가득찬 눈으로 일단 리뷰를 훑어보았다. 흥미롭게도 평가가 정말 극단을 오고갔다. 제목에 속았다, 책 쉽게 쓴다 (책이 주로 정신과 상담 녹취록에 기반하기 때문에),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 덩달아 우울해지기만 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별점 1개를 남겼다. 반면 별점 5개를 남긴 적지 않은 독자들은 공감된다, 위로를 얻었다, 치유받는 느낌이었다는 후기를 남겼다. 한 번 나름 큰 마음 먹고 일기장을 독립출판으로 낸 책을 구입했다가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지만, 사실 돈 낼 필요 없이 (갑자기 분위기 리디셀렉트 홍보..) 읽다가 마음에 안 들면 삭제하면 그만이었기에 읽기 시작했다.

에세이라서 술술 읽힐 줄 알았는데 중간중간 턱턱 막히는 부분이 적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별점 5개를 남긴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나 역시 책의 저자만큼이나 꼬일대로 꼬인 사람이라서인지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계속 거부하다가, 책에 등장하는 (혹은 어떤 리뷰에서 말했듯 책을 '하드캐리하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하는 말 몇 마디에 나도 기분부전장애를 앓고 있는 저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최소한 지금은 말이다. 선생님과 저자가 대화 말미마다 스스럼없이 새로운 종류의 약을 처방하거나 약을 줄이거나 늘릴 때는 흠칫 놀라곤 했지만, 그 외로는 이해나 공감이 전혀 가지 않는다거나 덩달아 우울해진다거나하는 책을 나쁘게 평한 사람들의 말이 와닿진 않았다. 의도적인 노력으로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긴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저자의 고백들과 나 역시도 상담을 받고 싶은 선생님의 반응이 이어졌다.

책을 평하기보다 인상 깊었던 부분 몇 가지를 되짚으며 지금 혹은 앞으로 내가 그런 마음 상태일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 지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존성향과 불안감

의존성향이 강해 보이네요. 감정의 양 끝은 이어져 있기에 의존성향이 강할수록 의존하고 싶지 않아 하죠. 예를 들어 애인에게 의존할 땐 안정감을 느끼지만 불만이 쌓이고, 애인에게서 벗어나면 자율성을 획득하지만 불안감과 공허감이 쌓여요. 어떻게 보면 일에 의존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성과를 낼 때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안도할 수 있으니 의존하지만, 그 만족감 또한 오래가지 않으니 문제가 있죠. 이건 쳇바퀴 안을 달리는 것과 같아요. 우울함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또 노력하고 실패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주된 정서 자체가 우울함이 된 거죠

불안감이 숨어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무언가를 이야기했을 때, 자동으로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떠나지 않을까?’를 생각하니까 불안한 거죠. 이야기하는 게 좋은 경험일 수는 있어요. 하지만 결과가 한 방향일 수는 없다는 걸 알아야 해요. C라는 행동, D라는 행동이 나올 수 있죠. 반응은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걸 깨닫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해요.

서로의 친밀함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욕구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심리 상태를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한다 (...) 나는 늘 혼자이고 싶으면서 혼자이기 싫었다. 의존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할 땐 안정감을 느끼지만 불만이 쌓이고, 벗어나면 자율성을 획득하지만 불안감과 공허감이 쌓이는 상태. 매번 상대에게 지독하게 의지하면서도 상대를 함부로 대했다.

사실은 많은 이에게 소중해지고 싶으면서, 넘치게 사랑받고 싶으면서, 타인에게 아주 관심이 많으면서 아닌 척한다.

항상 자유롭게 혼자이고 싶으면서도 또 항상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싶고, 의존하고 싶다. 전혀 다른 마음이 공존하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겠지만, 혼자일 때도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함께일 때도 같이 있는 그 사람(들)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건 분명한 문제다. 나 혼자 괴로워하는 거야 내가 감내할 일이지만, 그래도 함께인 사람(들)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데 상대방을 실망시킨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렇게 불안감이 쌓이고, 혼자이든 함께이든 그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이 반복된다. 차라리 혼자인 게 낫다는 생각으로 집에 틀어박혀 있지만, 계속 사람을 갈구한다. 그나마 날 절대 떠나지 않을 (물론 이것도 확신해서는 안되겠지만) 오래된 친구들을 만날 떄 가장 자유롭고, 때문에 최근 친구들을 만나며 정말 눈물나도록 감사함을 느끼곤 했다.

처음엔 고슴도치 딜레마의 해결책이 '나 자신이 단단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혼자를 추구했던 것 같다. 물론 아예 틀린 건 아니지만, 책에서 선생님이 종종 언급하는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인 접근을 피할 필요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같은 딜레마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매일 집에 처박혀서 혼자 외로워 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계속 누군가를 만나면서 실상 별로 의미 없는 관계를 계속해서 맺을 필요도 없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기본이되 그보다 더 가까워지려 하는 사람도 멀어지려 하는 사람도 결국 나와 비슷한 사람임을 이해하고 그것이 내가 매력적이어서도 내게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의식 과잉에 빠질 때마다 스스로 되새기곤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다'는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외로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힘들겠지만 더 나아가 내 잘못으로 인해 떠나간 인연 역시 놓아주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할 수는 있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 언제든, 또 누구든 완벽할 수는 없기에 잘못을 저지른 나 역시도 인정하고 지금과 미래에도 잘못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다. 다만, 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잘못 역시 용서하고 이해해야 한다.


    엄격한 초자아와 합리화

나: 양가적인 감정의 원인은 뭔가요?

선생님: 죄책감과 비슷해요. ‘목을 조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자동으로 죄책감이 드는 거죠. 화가 났다가도 바로 죄지은 사람이 되어버려요. 일종의 자기 처벌적인 욕구죠. 나 자신에게 너무도 강력한 초자아가 서 있기 때문이에요(실제 내가 쌓아온 것 말고도 여기저기서 더 좋은 걸 차용해서 이상화된 내 모습을 쌓아놓았다는 것).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에요. 그래서 매번 이상화된 기준에 도달하는 걸 실패하면서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는 거죠. 그렇게 엄격한 초자아가 있으면, 나중에는 벌을 받는 게 만족스러워지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사랑받는 것을 의심하고 일부러 상대에게 욕을 먹을 때까지 행동하면서, 상대가 나를 포기하면 오히려 안심하는 상태까지 가게 되는 거죠. 실제 내 모습보다 밖에서 제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외모 때문에 강박감이 나오는 건 아니에요. 이상화된 내 모습이 있기 때문에 외모에 집착하는 거죠. 그 기준의 폭을 좁고 높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50킬로그램 이상이면 실패야!’ 이렇게요. 결국 이것저것 조금씩 시도해보면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어느 정도로 해야 편한지 알아보는 게 중요해요. 내 취향을 알고, 불안감을 낮추는 방법도 알게 된다면 만족감이 생겨요. 누가 어떤 지적을 해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게 되지요.

누굴 만나든 절대적인 선은 없거든요. 불만도 있을 수 있고요. 늘 부분과 전체를 구분했으면 좋겠어요. 하나가 마음에 든다고 이 사람 전체가 다 마음에 들고, 하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전체가 싫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자신은 ‘욕먹는 게 뭐라고’ 하면서 남들이 말하는 나, 남들이 날 바라보는 눈, 내가 마치 그들의 눈이 된 것처럼 계속 자아비판을 하는 거 같아요. 내가 느끼는 감정마저도 끊임없이, 중간에 어떠한 필터링 없이 반사적으로 타인의 눈을 의식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분명히 나한테 소중하거나 이득인 부분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영향 때문에 과감하게 포기해버린다는 거죠. 그 상황에서 좀 더 이기적으로, 내 마음대로, 내가 중요한 방향으로 선택해도 돼요.

이기적인 욕구를, 마치 살 빼고 싶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들은 다 정상 체중이라고 해도 내 기준에 따라 더 빼고 싶다는 마음처럼, 내 개인적인 기준과 욕구를 좀 증진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나 상식적인 부분으로 바라보면서 그것과 차이 나는 내 욕구를 마치 잘못된 것처럼 낙인을 찍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해봐야 할 거 같아요.

나: 그냥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나를 받아들이는 게 나을까요? 

선생님: 아뇨,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아야죠. 세희 씨는 늘 내면에 이상화된 기준(완벽한 나)을 만들고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해요. 어떻게든 맞춰야 한다는 강박까지 있고요. 날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단점보다 장점을 즐기려는 게 필요해요.

예전부터 '정신승리'하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곤 한다. 즉 정신승리가 정신건강과 행복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부정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정신승리를 하지 못해서 괴로워함과 동시에 정신승리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을 깔보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정신승리 아닌가?

몸도 그렇지만 다른 영역에서도 실상 닿지 못할 이상적인 모습을 상정하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검열하고 자책하고 더 심할 때는 정말 내가 그 이상적인 모습인 양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 명확하지도 않지만 '성숙함', '어른스러움'이 언제부턴가 추구하는 최고 가치로 자리잡아서 자꾸 그 잣대로 남과 나를 평가하고, 또 가까운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요구한다.

감정을 배제하는 태도가 대표적이다. 감정이 중요한 관계에서 상대방이 아무리 나를 두고 말해도 나는 자꾸 제3자가 되어있다.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답답해하고 나는 나대로 불만이 쌓인다. 감정 없이 '그럴 수 있다', '미안하다', '이해한다' 등의 말을 꺼내며 어른스럽게 대화를 풀어나갔다고 정신승리하지만 실상 상대방의 눈에는 내가 영혼 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뻔히 보인다.

나는 그렇게 듣는 척 듣지 않았고, 보는 척 보지 않았다. 이해하는 척 이해하지 않았으며, 공감하는 척 공감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척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적인 모습, 나 자신이 설정한 엄격한 초자아는 그렇게 이상적이지도 않고 또 현실적이지도 않다. 맨박스와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억압하는 동시에 그 모습에서 벗어나는 타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좁은 틀일 뿐이다. 내가 정신승리라고 칭하던 겉으로는 부러워하면서 속으로는 경멸했던 자연스러운 심리적 방어기제에 합리화라는 다른 이름을 부여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나 합리화를 하며 살아간다. 수없이 부딛히는 모순 속에서 합리화하지 않고 살 길은 없다. 상대방도 나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 이것도 저것도 내 모습이다. 이상형에 맞지 않아도 괜찮다. 충분히 합리화할 수 있다. 그 여지를 나 아닌 상대방에게도 주자.


(이미 거의 2주 가까이 지나긴 했지만) 이번 스터디에서는 다섯 번째 단원 <Contemporary Grand Theories 2>를 다뤘다. 해당 단원은 네오맑시즘으로 묶인 Herbert Marcuse가 대표하는 비판이론과 Henri Lefebvre의 공간사회학을 시작으로 Norbert Elias의 문명화 과정(Civilizing process), Juergen Habermas의 식민지화되는 생활세계 (Colonization of the lifeworld), 그리고 21세기 초반 스터디를 하고 있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Anthony Giddens와 Ulrich Beck의 근대성에 대한 여러 논의(근대성 수레(Juggernaut of modernity),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 위험사회(Risk society))들을 공부했다.

책을 읽을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렇게 한 문단으로 정리하고 나니 도대체 어떻게 한 단원에, 또 한 번의 스터디에 여러 명의 사회학 거장들과 그 논의를 다뤘는지 의아할 정도다. 스터디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그만큼 책이 적지 않은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윗 문단에 쓴 것처럼 학자 이름과 주요 이론이나 논의를 하나씩 짚는 방식이었다면 모두 다른 이야기로 들렸겠지만, 처음 비판이론을 설명할 때도 이들이 왜 Neo-marxian에 해당하는 지에서 출발했고, 그리고 이들이 놓치던 부분을 Elias가 어떻게 보완하려 했으며, 더 나아가 Habermas와 Giddens, Beck이 비판이론 학자들이 가지던 비슷한 문제의식을 어떻게 20세기 후반 이후 지금의 현대사회로 끌고 왔는지 그 맥락이 충분히 살아있었다.

책의 저자(George Ritzer, Jeffrey Stepnisky)는 Marxist가 경제체제, 특히 자본주의 비판에 초점을 맞춘 반면, Neo-Marxist는 그보다 문화산업에 주목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문화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었던 경제를 대체했다'고 보았다. 물론 경제의 중요성을 경시하진 않았지만, Marxist의 경제결정론(문화나 정치 등의 상부구조가 전적으로 경제라는 하부구조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보는 시각)을 거부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를 다르게 이해하면 Neo-Marxist가 보기에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너무도 견고하게 자리잡아 이를 직접 비판한다고 해서 바뀌리라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보다 그것을 유지시키는데 기여하는 문화산업을 비판함으로서 우회 전략을 썼다고 볼 수도 있다.

스터디에 북한학을 전공한 분이 계셔서 그 분이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나며 느낀 경제와 문화의 상호연관성이 드러나는 사례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분들에게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살고 있는 우리 - 특히 청년 - 가 느끼는 불안정이나 위기의식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분명히 일상생활에서의 사고방식과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아우르는 문화가 일정 부분 경제에 의존하긴 하나, 단순한 일방적인 관계라기보다 자기계발이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넘어 미덕이 된 것과 같이 반대로 문화가 경제를 지탱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즉 Neo-Marxist의 비판이론은 경제결정론 거부를 넘어 경제와 문화의 관계 재설정을 향한 것이다.

비판이론을 두고 대안보다 비판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이 가장 유명하다고 하나, 내게는 단순히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서라기 보다 논의가 결국 자본주의 비판으로 회귀한다는 문제가 커 보였다.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문화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지만 문화가 자리잡게 된 원인과 그 문화를 유지하는 힘, 그리고 그 대안 모두에서 다시 자본주의를 끌고 들어오다보니 경제결정론을 정말 거부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결국 경제체제에 계속 초점을 맞추고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여겼기 때문에 Neo-Marxist인 거겠지만 말이다.

더 나아가 비판이론에서 technocracy를 너무 가볍게 비판하는 것 역시 마음에 걸렸다. 책에 따르면 비판이론은 technocracy에서 의사결정 기준으로 자리잡은 합리성(rationality)에는 이성(reason)이 부재하다며 합리성의 비합리성(irrationality of rationality)을 꼬집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다양한 방법으로 학살한 데에는 그들 나름의 합리성이 작용했지만 결코 이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보면 얼마나 비합리적이었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거꾸로 '비합리성의 합리성(rationality of irrationality)'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판이론 연구자들에게는 홀로코스트가 합리성의 탈을 쓴 비합리성의 상징이겠으나, 당시 현장에서 그 끔찍한 아이디어를 낸 독일의 군인은 분명 합리적이라고 여겼을테니 말이다.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맥락에 따라, 더 나아가 그 사람 혹은 조직,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냐에 따라 무엇이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인지 뿐만 아니라 이성과 비이성 역시도 결정된다. 홀로코스트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너무도 당연히 틀렸다고 판단을 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무엇이 합리적이고 무엇이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나? 무엇이 이성적이고 무엇이 비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나? 각자 가치관에 따라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이슈에 대해 비판이론은 어떤 비판을 할 수 있나? 이 질문들을 통해 결국 비판이론이 같은 가치체계를 공유하는 사람들만의 것은 아닌지, 또 그 가치체계가 흔들리면 비판 역시 무효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명 일상생활에서 자본주의, 이에 더해 자유주의에 기반한 문화산업에서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한 스터디원은 최근 <그것이 알고싶다>가 드러낸 '벗방'의 산업화를 보며 그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예능에 나와서 감정노동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단지 춤과 노래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결국 돈이 되기 위해서, 또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원치 않아도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자극적인 컨텐츠에 자기 자신을 계속 노출하고 또 감정노동을 해야만 한다. 돈으로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발전해서 몸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N번방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누군가를 노예라고까지 부르며 피해자가 원했다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할 수 있게 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사실 대중문화산업 뿐만 아니라 지식산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학계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하고 싶은 연구'와 '연구비를 주는 연구'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 혹은 갈등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운이 좋으면 그 둘이 잘 맞아 간극이 발생하지 않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연구를 하게 된다. 이를 두고 단순히 연구비 지원 정책을 비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연구비를 지원하는 데에는 이처럼 누구든지 비판이론 연구자가 말하는 '문화산업 (culture industry)'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본인의 욕구는 어느 정도 왜곡 혹은 굴절시켜야만 한다.

한편 나는 이것이 정말 자본주의 때문인가하는 질문을 던졌다. 경제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대중문화인의 감정노동이 사라질 지, 또 연구자들이 느끼는 '하고 싶은 연구'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연구' 사이 갈등이 사라질 지 의문이 들었다. 다른 스터디원은 문화산업에 편입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준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경제체제와 무관한 사회화 과정과도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라고 해서 그런 것들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선택지가 줄어들 수도 있겠지만, 재화와 서비스가 거래를 통해 소비와 동시에 사라지는 자본주의에서는 생존을 위해 그 결정들을 당장 내려야 하는 상황이 잦지만 사회주의에서는 조금 더 긴 호흡을 두고 생각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책을 읽고 스터디를 하며 느꼈던 것 중 하나는 앞에서 내가 지적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너무도 공고히 자리잡았고 또 그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아 거기서 벗어나는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다른 스터디원이 북한학을 전공하면서 실제 사회주의의 모습은 어떻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정확히는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생활했는지를 들려줘서 어렴풋이 다른 경제체제를 그려볼 수 있었다. 동시에 경제체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비판이론 연구자들이 비판한 대상, 문화산업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인지, 정책을 전공하며 배운 'muddling through' 전략이 통할 길은 없는지 계속 고민하게 된다. 당장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닐테니 질문들을 안고 공부를 이어가야겠다.


저번 단편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리뷰하면서 두 작품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새벽의 방문자들>을 따로 빼내 감상 쓰기를 미룬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여성작가만의 발칙함이 돋보였다고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불편함과 죄책감이 머리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에 더해져서 도망치듯 두 손을 키보드에서 거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왠만하면 말을 삼키는 것이 낫다는 생각만 강해져서, 자꾸만 말을 하지 않고 글을 쓰지 않을 이유만 찾게 된다.

성착취, 강간문화, 성차별, 성폭력, 젠더권력, 여성혐오... 이들을 '페미니즘 이슈'라고 통칭하는 것이 차라리 편할 수도 있겠다. 혹자는 N번방 사건과 같은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페미니즘과 애써 구분하려 들테지만, 그럴 수 없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내지는 범죄자로 몰지 말라'는 주장은 틀렸다. N번방에 가입한 사람이 26만명이든, 중복된 사람이 있어서 그보다 적든, 텔레그램이 아닌 다른 통로를 통해서 유포하고 공유했을 사람들 때문에 그보다 많든, 그 수와 상관없이 그들이 남성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반대로 피해자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당했다.

그 이유는 재작년 과학뒤켠에 기고한 글에서 '교수니까 괴수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한 논리와 다르지 않다. 조주빈을 포함한 26만명의 성범죄자들과 같은 남성인 나를 다른 유형의 사람으로 구분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인간 유형으로 치부하면 내 마음이야 편할테지만, 여전히 같은 남성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해당 성범죄에 분명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 남아있다.

다시 말해, 조주빈이 남성이라는 사실과 조주빈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우연히 상관관계를 가지는 독립사건이 아니다. 전자는 후자의 필요조건에 해당하며,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성착취를 당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잠재적 가해자 내지는 범죄자로 몰려서 억울한 남성이 있다면, 불안과 두려움, 공포에 빠진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에게 뭐라 할 것이 아니라, 단지 XY 염색체를 갖고 태어났을 뿐인 남자가 어떻게 남성이 되는지, 더 나아가 어떻게 그들 중에 조주빈과 같은 사람들이 탄생하는지, 반대로 단지 XX 염색체를 갖고 태어났을 뿐인 여자가 어떻게 여성이 되는지, 역시 더 나아가 어째서 자꾸 그들 중에 성착취 피해자가 나오는지를 물어야 한다. 단순히 그 질문들을 던지는 게 아닌 자기 자신에게도 되묻고, 또 다른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묻고 답해야만 한다. 내가 이해하는 바가 맞다면, 그게 페미니즘이 답하고자 한 질문이다.

내가 이 주제로 글쓰기를 주저했던 이유는 내가 '나도 다르지 않다'는 깨달았다고 말함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르다'고 말하는 모순을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25년 넘게 남성으로 살아왔기에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적지 않은 요소들을 조주빈과 26만명의 N번방 회원들과 공유하며, 따라서 여성혐오, 젠더권력, 성폭력, 성차별, 강간문화, 성착취와 같이 페미니즘에서 제기하는 심각한 문제들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나는 그들과 나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어 구분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순 속에서 남성으로서 나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끝없는 고민을 하다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글을 쓰고 있다.

장류진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를 남성인 지훈 입장에서 쓴 이유를 두고 '자기 자신에게 심취해 있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사람을 주인공으로 쓰기 위해서였다기엔 결국 자신과 '자주지 않는' 지유에게 마음속으로 '씨발년'하고 욕하고서 '난 여기 [후쿠오카에] 왜 온 거지?'라고 자문하는 지훈의 여행은 남성들끼리 모였을 때 한번쯤은 꼭 나오는, 혹은 경쟁하듯 마구 쏟아지는 '무용담'과 놀라우리만치 닮아있다. 글을 읽으며 분명 작가는 어쩌다 남자들 위주로 모여있는 술자리 같은 곳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그러지 않고서는 남성의 생각과 마음을 이토록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남성들 사이에서 그 숱한 무용담은 지유처럼 여성이 욕을 먹거나, 섹스를 쟁취한 남성이 승리자가 되는 두 결말 중 하나로만 끝이 났다면,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끝까지 지훈을 비추며 무용담의 진정한 결말을 보여준다.

냐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기억 속의 여성들을 한 명 씩 불러내서 'XX년'으로 만들거나 성관계에 성공했다며 어깨를 으쓱거릴 때, 그 모습이 피해자를 '노예'라 칭하며 낄낄대던 N번방과 무엇이 크게 다른지. 많은 여성들이 주변에 n번방 회원이 있지는 않을지 두려워한다면, 나는 내 주변 혹은 지인 중에 n번방 회원이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분명 있을 거라 확신이 들기도 한다. 혹시나 있을 이 글을 읽는 여성분들의 공포를 조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N번방 사건이 N번방 회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가 남성의 언어로 남성의 내면이 얼마나 찌질한지 드러냈다면, <새벽의 방문자들>은 시선의 방향을 바꾸고는 '이래도 남성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인정하지 않을래?'라고 묻는 듯 하다. 두 작품이 실린 책의 해설을 쓴 인아영이 정확히 지적했듯 "시선이 곧 권력이자 정치이기 때문"에,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위계적인 구조가 전복되면서, 오직 성적인 대상으로 물화되고 교환되는 여성의 신체 대신 새벽에 남몰래 성매매를 하러 온 남성들의 초조한 얼굴이 대상화된다."

작가는 더 나아가 그 얼굴들에 '누군가의 아빠', '회사 옆자리 동료', 또 '전 남자친구'를 그려넣음으로서 단순한 대상화 그 이상의 것을 시도한다. 성매매를 실제로 했든 안했든, 그들은 여성의 몸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는걸까. 장류진은 인터뷰에서 <새벽의 방문자들>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다른 세계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어느 시점에는 나도 돈 주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겠다 싶었다"고. 질문은 여성들에게 이토록 현실적으로 다가가지만, 남성인 나는 그저 그것을 수요와 공급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하고 올건데, 같이 갈래?'라고 물어볼 때, 별 생각 없이 '하고 와. 난 한숨 잘래'라고 답하고서 불편한 마음 하나 없이 잘 수 있었다. 그 순간에 이미 우리는 같은 'N번방'에 들어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N번방 안에서 살고 있다. 나만큼은 N번방 밖에 있다고 자위하고 싶지만, 그리고 자신만큼은 N번방 밖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부럽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 N번방에서 추방당하는 것이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창피하게도 오히려 그 수많은 N번방에 의해 차별과 억압 속에서 피해받아 온 여성들에게 짐을 떠넘겼다. 찌질하고 초라한 한남답게 뒤에서만 조용히 지지하고 응원해왔다. 물론 N번방 안에서는 아닌 척 하고 말이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될 줄 알았건만, 정리는 커녕 머리와 마음은 더 복잡해져만 간다. 분명한 건 N번방 사건이 조주빈을 비롯한 N번방 회원들과 그 피해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건이 공분을 산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공감하며, 또 함께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남성 중에 나처럼 그 분노가 자기 자신에게도 향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더 공개적으로, 또 전보다 더 자주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응원하기를 제안한다. 그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몇 개일 지 모를 N번방 중 한개라도 더 부수기 위해서.

작년 초 시작했던 사회학 스터디에서 1년만에 고전사회학 책을 끝내고 현대사회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대학원 다니던 때와 비교해보면 읽는 양은 대폭 줄고 주기는 엄청 늘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게 어딘가! <<Contemporary Sociological Theory and Its Classical Roots: The Basics>>라는 새로운 책과 더불어 스터디원 2명을 영입해서 5명으로 새출발을 한다. 일찍이 원격으로 진행하고 있던 스터디라 5명이 한꺼번에 모일 일은 잘 없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새로 오시는 분들 모두 초면이라서 조금 긴장이 되기도 한다.

(아, 우리가 한 명 추가 모집 중이기 때문에 혹시 이 글을 읽고 스터디에 관심이 생긴 분이 계시다면 댓글로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작년 멤버들과만 진행한 스터디에서는 현대사회학 책 네번째 단원 <Contemporary Grand Theories 1>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당 단원은 파슨스(Talcott Parsons)와 머튼(Robert K. Merton)의 구조기능주의(Structural Functionalism),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의 갈등이론, 그리고 루만(Niklas Luhmann)의 일반체계이론(General Systems Theory)을 다루었는데, 이전 책이 파슨스와 머튼의 주요 저작을 다루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에 앞부분은 복습하듯 읽을 수 있었다. 반면 다렌도르프는 처음 듣는 사람이라서, 또 루만은 하도 많이 들었지만 체계이론을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하며 읽었다. 여기서는 각 이론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기보다 내가 책을 읽으며 가졌던 의문들과 스터디에서 논의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1. 파슨스이 구조의 기능적 요건(functional imperatives)으로 제시한 AGIL scheme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이 어떻게 기능별 조직(society and subsystem)으로 이어지는지는 모호하다. (http://www.kapa21.or.kr/epadic/epadic_view.php?num=883 참고)

    예를 들어, 경제 내지는 생산조직이 사회에서 적응 기능을 담당한다는 식인데, 사실 기업과 같은 경제-생산조직은 적응 기능 말고도 통합, 목표달성, 체제유지 기능을 모두 담당하고 있으며 다른 조직 (혹은 구조)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생긴 의문인데, 논의를 하다보니 구조기능주의의 체계를 확립한 사람답게 파슨스가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에 맞추어 AGIL scheme을 짠 것이 아니라 '기업 등 경제-생산조직은 마땅히 사회에서 적응 기능을 담당해야만 한다 (그래야 사회가 존속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베버가 이념형을 연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파슨스 역시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개념화한 것에 다름 아니고, 사회 하부 조직 및 구조는 그 요소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능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AGIL scheme으로 정리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파슨스로부터 20세기 인간 특유의 사회가 특정 기능을 온전히 수행해야만 유지되고 효율적으로 굴러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강박적인 성격이 보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2. 다렌도르프는 구조기능주의가 갈등을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치부하는 데에 맞서 갈등이야말로 사회 변화를 설명하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며 특정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quasi-group이 interest group으로, 또 다시 conflict group으로 진화함으로서 실제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 quasi-group이 형성되는 조건을 1) 구조적으로 결정될 때, 2) 단순히 운에 따라서로 나누어 전자에서 interest group으로 또 conflict group으로 조직화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회적 내지는 구조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 곧 의료인이 될 스터디원은 quasi-group의 예로 의료인 집단 전체를 들며 이들은 물론 의료에 종사한다는 공통점 및 이해관계를 공유하지만 의료인이 된 이유는 제각각인만큼 꼭 interest group과 conflict group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일단 의사와 간호사, 병원 운영진 등은 의료인 집단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질 것이며, 직업이 같더라도 단순히 돈을 보고 의료인이 된 사람과 어떤 사명을 갖고 의료인이 된 사람 역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뜻이다. 설명을 듣고 다렌도르프가 어떤 생각으로 조직을 나누었는지 이해가 어느 정도 갔지만, 여전히 어떻게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고 실제로 사회를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해보였다.

  3. 루만은 갈등이론의 구조기능주의 비판을 반영해서 구조기능주의를 체계이론으로 새롭게 치장한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명확하지 않은 듯 하다.

    이에 대해서는 곧 미국으로 떠날 스터디원이 '구조 형성 과정'에 대한 언급 유무만으로도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들며 의문을 해소시켜주었다. 즉, 구조기능주의는 구조 내지는 시스템의 질서 유지에 분명한 당위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것이 영속적이라고 본 반면 체계이론은 진화론적 관점에 가까워서 사회가 어떻게 재생산하고 또 변화하는지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는 것이다.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 구조기능주의는 답할 수 없고, 체계이론은 나름 준비된 답변이 있다.

  4. 마지막으로 책이 미국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 정책 기조를 두고 기능적인지 (Is the "War on Terror" Functional?) 묻는 글상자를 두고도 의미있는 대화가 오고갔다. 그것이 꼭 구조기능주의의 유산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는 어떤 현상을 두고 그것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따지며 'net balance of functional consequences'를 고민한다. (조금 더 찾아보니 머튼이 처음 사용한 단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좋았냐 나빴냐를 따지는 건데, 의사결정 차원에서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소 불편한 감이 없지 않은 이유는 실제 사회에서 순기능과 역기능은 플러스나 마이너스와 같이 부호가 정해져있지도, 또 숫자처럼 정량화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순기능은 누군가의 역기능이 되곤 하며, 누군가에게는 크게 순기능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작은 순기능이기도 하다.

    순기능과 역기능을 따져서 결국 net balance가 어떻게 되는지 계산하듯 내리는 의사결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방향'이 분명하게 있다고 인식하게끔 만들고, 의사결정 자체가 정치적이며 또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게끔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무엇이 순기능이고 무엇이 역기능인지 따질 때부터, 또 얼마나 순기능 혹은 역기능인지 계산할 때부터 이미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배제하거나 포함시키고 또 얕보거나 과장해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다음 단원에서는 네오맑시즘, 문명화와 식민지화, 근대화를 다룬다. 다음주도 의미있는 스터디가 되기를!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오랜만에 독후감을 쓴다.

직장생활을 한 지도 2년째다. 대학원에서도 끊임없이 일했지만 졸업 후 회사에 출근하고서야 취업자가 되었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세 번 읽고도 아리송해 했던 나는 일과 업 사이 간극에 스트레스 받다 못해 둘을 완벽히 나누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창작과비평 웹사이트에 올라온 <일의 기쁨과 슬픔>을 낄낄 웃으며 읽었을 때도 별 생각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유학 준비를 마쳤어야 하는 지금, 유학 준비는 시작도 못한 채 홀린 듯 단편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꺼내들었다. 하고픈 일을 업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업이 내 일을 지배하는 건 너무도 쉽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소설집 속 작품들은 단편 치고도 꽤 짧은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을 제외하고는 길이가 모두 한 호흡에 읽기 좋았다. 다른 연구서를 읽다가 집중이 안 될 때나 자기 전에 한 편씩 읽다보니 아쉬울 정도로 일찍 다 읽어버렸다. 창비 홈페이지에서 표제작만 읽었을 때는 '판교 하이퍼리얼리즘' 장르를 창시했다는 평에 동의하는 정도였다면, 다른 작품과 함께 한 권의 책으로 읽고 나니 일터의 디테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안에 또 다른 나 내지는 내 주변 사람을 등장시켜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단편 하나하나 안에서 나를 발견한만큼 책 전반에 대한 감상을 남기기보다 작품 각각에 대해 감상을 짤막하게나마 남기고자 한다. 우리가 사회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에 단계가 있다면 첫번째로 올 '첫 출근'을 다룬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부터 결혼과 내 집 마련 이후 이야기 <도움의 손길>까지 하나의 글로 풀어도 어색하지 않을 6편을 먼저 다룰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도 느꼈던 여성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발칙함이 돋보인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와 <새벽의 방문자들> 감상은 잠깐 미뤘다가 조만간 추가하도록 하겠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연봉을 듣고서도 감히 협상하지 못하는 사회초년생은 출근 전부터 어떻게 돈을 아낄지, 그래서 언제까지 얼마나 모을지를 계획한다. 마이크 타이슨이 '얼굴에 한방 쳐맞기 전까진 누구나 계획이 있다'고 한 것처럼,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의 주인공은 하루 11000원만 쓰기로 계획했지만 출근길에 쳐맞듯이 12500원을 쓰고만다. 아무도 겨드랑이가 축축해질 정도로 더운 날엔 커피에 '아이스'만추가해도 2500원이 더 비쌀 줄은, 첫 출근인만큼 눈치가 보여 정시도착할 버스대신 택시를 타야할 줄은, 그럼에도 설레는 마음에 계획이 어긋난 것도 잊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괜찮다. 다들 그렇게 배우기 시작하니깐.

한편 사회초년생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다소 낮음>의 주인공도 있다. 그는 장난스럽게 올린 '냉장고송' 영상 하나로 대박나서 스타가 될 뻔 했지만 그 영상 속 냉장고의 에너지 소비 효율 등급처럼 다시 다소 낮아져서 영상 이전과 다를 바 없어진 밴드 보컬이다. 28장 팔린 밴드 음반이 무색할만큼 유튜브 영상은 조회수가 곧 30만...50만...100만을 찍었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획사 제안을 거절한다. 급하게 돈이 필요한 그가 새로 업로드한 '세탁기송' 영상 조회수는 100을 넘기지 못한다. 기회를 놓친 주인공에게 여자친구가 떠나며 뱉었던 말처럼 그의 삶이 너무도 비효율적인 것도 같다. 하지만 원래 누구에게나 잡은 기회보다 놓친 기회가 많아보이지 않던가. 우리 모두가 어쩔 수 없이 다소 낮은 효율인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닐지, 또 그게 우리의 편한 제자리가 아닐까 싶다.

<탐페레 공항>의 주인공은 아티스트의 고집을 지켰던 <다소 낮음>의 주인공과 달리 피디의 꿈을 접고 회사 회계팀에 취직했다. 포기는 참으로 멋없지만 그만큼 홀가분하다. 포기하고서야 다른 길이 눈에 들어오고 또 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후회라는 흔적을 남기기에 실수로라도 들춰보지 못하도록 그 기억들을 꽁꽁 숨겨놓곤 한다. 한창 다큐멘터리 피디를 꿈꾸던 주인공은 어쩌다 탐페레 공항에서 만난 핀란드 할아버지 앞에서 본인의 꿈을 향한 사랑을 고백한 적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사진과 편지에 오랜 기간 답장하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테다. 마음 한켠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면서 말이다. 다행히 살아있다는 핀란드 할아버지에게 주인공이 6년만에 쓰는 답장에 뭐라고 적을지도 궁금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가 애써 잊고 있던 기억과 꿈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합시다, 스크럼"이라는 첫 대사 문장 하나만으로도 판교의 수많은 독자들을 휘어잡은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사실 뚜렷한 기쁨과 슬픔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내가 기쁨과 슬픔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는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가 아니라도 우리가 보통 일에서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지 의문이 든다. 내가 그 정도로 일에 빠져있지 않아서 그런 걸까? 어쨌든, 소설에 나오는 가장 큰 기쁨이라곤 주인공과 동료 개발자가 대화하던 중에 울린 월급 입금 알림이나, 그 월급으로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라는 메세지가 오고 가는 채팅방 사람들과 함께 클래식 공연 예매와 항공권 구매하는 장면뿐이다. 슬픔 역시 찾자면 그나마 우동마켓의 큰 손 거북이알이 대표에게 밉보여서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만 받게 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 정도가 있겠다. 물론 나도 월급쟁이인만큼 그 기쁨이나 슬픔을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소소하면서도 찜찜한 감정선의 상승과 하강이 정말 우리 노동자들의 일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일로 인한 감정 기복이 그 이상이 되면 오히려 안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직장생활을 하며 겪는 당혹스러운 일이나 스트레스는 보통 업무보다 사람으로부터 오기 마련이다. 꼭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빌런 급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정말 사소한 것에서부터 신경을 건드는 평범한 타인이 많다. 아니, 사실 순진한 그 사람들이 아닌 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왜 이렇게 그들을 신경써야 하는지 억울할 정도로 인간관계에는 품이 참 많이 들어간다. <잘 살겠습니다>의 주인공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앞둔 동료 직원의 뻔뻔함 혹은 순수함에 혼자 답답해하다가, 고민하다가, 분노하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만다. 복수랍시고 결혼 선물을 저렴한 핸드크림으로 준비했는데 선물을 받아든 동료 직원이 고마움에 눈물을 흘리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까지 올린 것이다. 그렇게 업무가 아니라 사람 때문에 한바탕 롤러코스터를 탔던 주인공은 결국 그 동료 직원을 응원하게 된다. '빛나 언니는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결혼 후 그 어렵다는 내 집 마련에 성공한 <도움의 손길> 주인공은 아마도 생전 처음으로 마음 속 왠지 모를 불편함을 무릅쓰고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을 '쓰기로' 한다. 남편에게 '아줌마'가 아닌 '도우미 아주머니'라고 부르라고 한소리 하고, 아주머니가 일한 돈이 아들에게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속상해 하는 등 주인공은 자매애를 갖고 아주머니를 대한다. 하지만 고용인-피고용인 관계, 세대 차이, 종교관처럼 절대 사소하지 않은 다른 요소들 때문에 둘 사이에는 균열이 일어나고 만다. <기생충>이 대저택에 사는 부자 가족과 냄새 나는 반지하에서 생활하는 가난한 가족을 대비시켜서 그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켜 보여줬다면, 이 작품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 등장인물을 병치하고서 그 사이의 미세한 갈등을 딱 신경쓰일 정도로만 바늘로 찌르듯 묘사한다. 사회생활을 하며 우리가 느끼는 인간관계에서의 스트레스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돈을 한푼이라도 아끼려는 사회 초년생 이야기부터 분명 돈 받고 일하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도우미'라 불리는 아주머니와 긴장 속 고용관계를 이어간 사회인까지. 책의 작품들은 모두 이렇다 할 분명한 기승전결은 없지만 하나 같이 깔끔하게 마무리되면서도 여운이 있다. 아마도 그 여운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상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따라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는 인생의 단계들을 많이 거친 사람일수록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작품들 모두 딱 충격적이지 않을 정도의 소소한 반전을 갖고 있기에, 그래서 이 독후감을 통해서 책을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책 읽는 재미가 반감될 수 있고 또 다시 읽을 가치를 크게 못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종종 다시 꺼내읽고 싶은 책임에는 틀림없다.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을 읽게 된 건 다름 아닌 회사 세미나 때문이었다. 올해 초에 이미 회사 대표님이 승진자들한테 선물로 이 책을 나눠준 바 있는데, 대표님이 책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인지 그 이후로 계속해서 이 책 이야기를 하시고 사업에서도 책이 지적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는게 눈에 보였다. 우리 부서에서도 매달 진행하는 책 세미나 때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책을 받고 나서 점심시간마다 틈틈이 읽었더니 한달 정도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을 갖고 있어 나 역시 처음에는 약간의 오해를 했는데, 이 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루지는 않는다. 조금 더 명확히 하자면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가깝다. 물론 여전히 큰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아니면 충분히 오래 살았기 때문에 죽음이 가시권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즉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과 그 가족이 하는 고민이라 한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의학 기술의 발전 덕에 돈과 의지만 있으면 병원에서 치료 혹은 연명수단을 통해 충분히 죽음을 미룰 수 있는 시대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우선 책을 읽으면서 책 원제가 참으로 탁월하다 느꼈다. Being Mortal. 마치 언젠가는 죽음을 정복할 것처럼 현대의학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낼 지 결정해야만 한다. 반면 제목 번역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니, 너무 진부하잖아.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덮고나니 저 질문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툴 가완디라면 (그가 쓴 다른 책들 제목을 살펴보면 모두 한두 단어다) 절대로 부제를 붙이지 않았을테지만, 붙였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말이지 않았을까. 물론 'How to die'는 아니었겠지만. ('How to give a death'가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아툴 가완디는 책의 앞부분에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오늘날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이루고 있는 일종의 패러다임을 설명한다. 

첫째로, 현대 사회에서 삶에서 독립(혹은 자율)은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가족의 범위는 줄어들었고, 부모와 자녀마저도 특정 시기가 되면 당연하게 서로 독립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삶은 도와주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미안한 일이 되었다. 

둘째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 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p.15) 실제로 인간의 수명은 계속해서 연장되고 있다. 맞닥뜨리면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려야했던 수많은 질병 역시 정복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툴 가완디는 이 삶과 죽음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분명히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은 언젠가 분명히 독립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죽음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생명이 자연스럽게 꺼지는 과정이다. 이 두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갑작스레 눈앞에 죽음을 목도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들이 보다 행복하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텐데, 저자가 몸담고 있는 현대의학계를 포함해서 현대 사회 전체는 아직도 이 문제를 직면하고 있지 않다. 단적으로 의학계에서는 질병 정복이 노인 돌봄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로 여겨진다.

책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아툴 가완디는 본격적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해법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노령에 접어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병실을 비우기 위해 시작된"(p.116) 어빙 고프먼이 말했던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 사례로서의 요양원 대신 정말 사람이 중요한 '어시스티드 리빙(assisted living)'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말뿐인 어시스티드 리빙은 그저 노인의 자녀들에게 안심만을 심어주고 노인을 생각하지는 않는 곳과 다를 바 없다. 

저자 역시 어떻게 하면 어시스티드 리빙이 정말 성공할 수 있는지 - 사업 차원으로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의 만족 차원으로나 - 뚜렷한 정답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관심사가 일상적인 기쁨과 가까운 가족과 친구로 바뀐다는 '사회정서적 선택 이론'이나 시설에 동물을 들여놓으며 노인들이 조그마한 충성심(loyalty)을 가질 수 있도록 함으로서 활력을 불어넣은 '에덴 얼터너티브 프로그램' 등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할 뿐이다. 그는 물론 제대로 된 '어시스티드 리빙'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한다.  

아툴 가완디가 책 중반부에서 제도 차원의 해법을 찾고자 했다면 말미에서는 보다 미시적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 노인 혹은 환자와 그 가족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야기 한다. 물론 우리는 죽음이라는 너무나도 무거운 주제 앞에서 그래도 희망을 노래할 수 밖에 없고 아무리 현실적이더라도 부정적인 말은 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생기는 단순히 경제적만은 아닌 낭비와 피해가 심하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싸우는 방식에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것들, 이를테면 가족, 여행,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을 위해 싸우는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을 때 나누는 일련의 대화"인(p.283) Breakpoint discussion이 중요한 이유다. 

저자는 경험많은 의사답게 의료진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학생 시절 읽었던 의료윤리학 논문 주장을 빌려 의사와 환자가 가부장적(paternalistic, 의학적 권위를 가진 의사가 본인이 생각하는 최선의 처방을 제공하는 것)도, 단순히 정보만을 주는(informative, 환자가 알아서 선택할 수 있도록 의사가 여러 선택지와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닌 해석적(interpretive) 관계로 재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석적 관계에서 "의사의 역할은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p.308) 물론 이 해석 과정은 지난하기 마련이고 환자의 욕구 역시 분명하지 않거나 변하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해서는 안되는 관점이기도 하다.

책이 그리는 죽음은 '한편의 이야기를 완결짓는 과정'이다. 그리고 완결에 다다른 사람들에겐 선택지도, 그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할 시간도 많지 않다. 그 과정을 본인의 일로 직접 고민한 사람들은 모두 얼마 안가 스러졌기에 여전히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죽음을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독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그 어렵고, 무섭고, 두려운 고민을 하게 만들 것인가? 단순히 아툴 가완디 본인이 의사라서 책의 상당 부분을 환자 사례로 채운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저자의 아버지가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저자도 어쩔 수 없이 경험하는 갈등은 여러 사례 중 하나일 뿐이지만 읽는 사람에게 가장 와닿을 뿐만 아니라 책이 한 권으로 마무리되는데 큰 기여를 한다. 

죽음에 대한 수많은 글은 다소 뻔하게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심지어 당장 죽을 수도 있다'며 공포를 불러일으킨 후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곤 한다. 아툴 가완디의 책은 달랐다.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글이었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만 한다. 언젠가는 나 역시 떠나야만 한다.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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