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 있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던가. 습관처럼 '그럴 수 있지'라고 내뱉던 말은 어느새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내가 갖추는 기본 태도가 되었다. 나는 그것을 진리로 여겼기에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이 '그럴 수 있지'라고 말하고 '그럴 수 있지' 마음가짐을 갖추기를 바랐다. 몇몇 지인이 좋은 습관이라며 칭찬을 하거나 더 나아가 효과를 봤다고 좋아해주면 역시 내가 옳았다며 더 자주 사용하곤 했다.

'그럴 수 있지'는 기본적으로 이해와 공감을 나누는 일이다.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을 한 사람에게도, 대체 왜 그러는지 모를 집단에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런저런 상황에도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이유를 찾아 이해하고자 한다. 다만 공감할 필요는 없다. '그럴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도 아니고, 나 역시 그래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도저히 '그럴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책 <<당신이 옳다>>를 처음 접했을 땐 저자가 내가 여태껏 '그럴 수 있지'에 가져왔던 믿음을 확인해주리라 기대했다. 통하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으나 다 읽고 나서는 내가 정말 여태껏 잘못 살았구나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기계적으로 '그럴 수 있지'로 일관해왔던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거나,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집단이나 조직, 사건이나 상황 등에서는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고 그냥 머리나 마음 속에서 제쳐두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에게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한 발 짝 더 들어가 존재에 관심을 비추고 이해를 넘어 공감을 해야했다. 그나마 늦지 않게 틀렸다는 사실을 알아 다행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당신이 옳다>>는 전에 읽은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정반대에 놓여있는 책이다. 저자는 서두부터 현대 정신의학을 비판하며 '적정심리학'을 주창한다. 그에게 진료실은 애초에 "의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관계, 의사 중심의 [환자-의사] 관계"가 형성되는 공간이다. 이 때 유리하다는 것은 단순히 환자가 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을 넘어 환자를 이해하는 방식과 틀이 순전히 의사에게만 있다는 뜻이다. 환자가 누구인지보다 어떤 증상을 보이는지, 그 증상에 따르면 어떤 병인지, 그 병에는 어떤 처방이 효과적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70만명에 달하는 모두 다른 사람들은 진료실을 찾는 순간 우울증이라는 진단명 아래 비슷한 처방을 받는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에 등장하는 선생님은 독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을만큼 좋은 의사이고, 그가 환자를 대하는 방식은 <<당신이 옳다>>에서 강조하는 공감과 닿아있긴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목적은 결국 진단과 처방이다.

반면 정혜신이 진료실 바깥에서, 특히 트라우마 현장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에 지친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가며 그려낸 '적정심리학'에서는 진단과 처방이 있던 자리를 공감이 차지한다. 공감은 의사라고 더 잘하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의사와 같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배우는 CPR처럼 사람을 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책은 여느 심리 내지는 우울증을 다루는 책과 달리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거나 위로하기보다 독자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다정한 전사'가 되도록 이끈다. 따라서 CPR 교범과 같은 이 책을 가장 인상깊게 읽을 사람은 아마도 우울증 환자의 가족이나 지인일테다. 하지만 당장 본인이 우울함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읽어도 충분히 공감받고 위로받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당신이 옳다>>의 진짜 힘은 내가 나 자신과 공감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공감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나 자신에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거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그랬다. 무엇인지도 모를 '어른스러움'을 절대적인 가치로 추구했고, 그에 맞지 않는 감정은 옳지 않다고 여겼다. 화내지 않고 슬퍼하지 않았다. 내 감정을 인정하고 들여다보기보다 부정하고 의심했다. 또 모순적인 감정이 들 때면 어떻게든 그 모순을 해결하려 들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타인을 대하다보니 대화가 항상 논쟁이나 설득으로 이어졌다. 상대방도 나처럼 자신의 감정에 비판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이 들면 풀려고 노력할 것이며, 결국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을 따를 것이라는 가정을 한 채 소통에 임했다. 나는 종종 판사가 되어 나만 있고 상대방은 없는 대화를 이끌었고, 상대방이 (내가 보기에)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인정하면 '이겼다'며 속으로 기뻐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거나 타인에게 져주더라도 공감을 받고 싶어한다. 그 기쁨의 순간 나는 공감할 기회를 놓쳤다. 여태껏 나는 그렇게 이상적인 자아상을 만들고 거기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끼워맞춰왔다. 떄문에 나와의 대화는 다른 사람들에게 벽을 보고 말하는 것 혹은 목을 조이는 것과 같았으리라. 책을 읽었다고 한순간에 바뀔 수는 없겠지만, 감정을 무시하는 비현실적 이상 세계가 아닌 '리얼월드'에서 살아가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감정들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책은 나 자신과 내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적지 않은 고민거리와 꺠달음을 주었지만, 더 나아가 사회를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도 주었다. 내 존재가 더더욱 중요하게 주목받았으면 하는 인정욕구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어릴 때부터 내 인생 목표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벽돌 한 장을 쌓고 가는 것이었고 (누군가의 명언이었는데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정책에 관심을 갖고 전공으로 삼아 공부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정책이라는 도구로 사회를 바꾸려고 하다보면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고 또 정책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즉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지워지곤 한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이 전혀 진행이 안되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큰 고민 없이 책에서 비판하는 '존재의 개별성'을 지우고 '집단적 정체성'만을 부여하는 일이 당연하게 이뤄질 때가 많다.

때문에 저자가 비판하는 현대정신의학의 자리에 사회과학이나 정책학을 대입해도 큰 무리가 없었다. 사실 더 나은 사회를 위한다는 것도 결국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인데, 우리는 종종 효과성과 효율성을 이유로 미시적인 관점을 놓치곤 한다. 어떤 사회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정책은 해당 문제나 사회에 대해 겉으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어쨌든 모델링을 하게 된다. 그 모델링은 필연적으로 거시적인 사회 체계 뿐만 아니라 정책의 이해관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정책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정책이 상정하는 모습의 개인만이 보이는 것이다. 이 모델링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지만, 한편 너무 매몰되어 놓치는 것들이 생기기도 한다. 더 심각하게는 다양한 문제해결방법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방식의 문제해결방법만이 적용되게 된다. 당장 사례가 여럿 생각나지만, 책 리뷰이니 나중으로 미루겠다.

어러모로 책을 통해 인간관계에서나 사회정책에서나 존재 자체에 주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 마음 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타인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와 감정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다시금 다짐을 했다. 이전에 부모님께 선물로 책을 드렸을 때 하나도 읽지 않으시는 것 같아 실망하고 다시는 책을 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다시금 희망을 갖고 부모님께 책을 선물드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선물하는 의미는 단순히 책이 좋아서 한 번 읽어보시라가 아니라, 나는 당신께, 또 당신은 내게 서로 힘들 때 응급처치를 해줄 수 있는 든든한 우군임을 알리는 것이다. 이 응급처치 교본이 널리 읽히기를 바란다.


가끔 서점을 들를 때마다 항상 베스트셀러 칸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다. 곰돌이 푸나 카카오프렌즈 등 각종 캐릭터가 제목에 들어가는 수많은 '심리'라는 분야로 분류되지만 실상 별 의미없는 (물론 당시 내 생각이다) 위로로 가득 찬 책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제목이 워낙 자극적이어서 조금이나마 생긴 흥미조차 참고 들춰보지도 않았다. 내 눈에 비슷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길래 그저 '요즘 사람들이 저런 책을 좋아하나보다'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요즘은 예전이라면 절대 읽지 않았을 심리 책이나 에세이에 손이 간다. 여전히 심리학이라는 학문 전체에 대한 불신이 어느 정도 있는데, 이전에는 불신을 넘어 심리학이나 심리 관련 책, MBTI를 비롯한 여러 검사들을 (SNS에서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피했다. 웃기게도 그런 것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 자체를 '약함'을 드러내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청소년 자살률에 대한 기사를 보며 '요즘 애들 정신력이 약해서 걱정'이라고 혀를 끌끌 차실 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된다고 반발해놓고도 막상 나 역시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몸의 fitness에 집착하는 것처럼 마음과 정신 역시 건강하다고, 아니 건강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붙들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나 자신을 속여왔다.

리디셀렉트에서 읽을만한 책이 없나하고 둘러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눈에 들어왔을 때, 의심 가득찬 눈으로 일단 리뷰를 훑어보았다. 흥미롭게도 평가가 정말 극단을 오고갔다. 제목에 속았다, 책 쉽게 쓴다 (책이 주로 정신과 상담 녹취록에 기반하기 때문에),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 덩달아 우울해지기만 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별점 1개를 남겼다. 반면 별점 5개를 남긴 적지 않은 독자들은 공감된다, 위로를 얻었다, 치유받는 느낌이었다는 후기를 남겼다. 한 번 나름 큰 마음 먹고 일기장을 독립출판으로 낸 책을 구입했다가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지만, 사실 돈 낼 필요 없이 (갑자기 분위기 리디셀렉트 홍보..) 읽다가 마음에 안 들면 삭제하면 그만이었기에 읽기 시작했다.

에세이라서 술술 읽힐 줄 알았는데 중간중간 턱턱 막히는 부분이 적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별점 5개를 남긴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나 역시 책의 저자만큼이나 꼬일대로 꼬인 사람이라서인지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계속 거부하다가, 책에 등장하는 (혹은 어떤 리뷰에서 말했듯 책을 '하드캐리하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하는 말 몇 마디에 나도 기분부전장애를 앓고 있는 저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최소한 지금은 말이다. 선생님과 저자가 대화 말미마다 스스럼없이 새로운 종류의 약을 처방하거나 약을 줄이거나 늘릴 때는 흠칫 놀라곤 했지만, 그 외로는 이해나 공감이 전혀 가지 않는다거나 덩달아 우울해진다거나하는 책을 나쁘게 평한 사람들의 말이 와닿진 않았다. 의도적인 노력으로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긴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저자의 고백들과 나 역시도 상담을 받고 싶은 선생님의 반응이 이어졌다.

책을 평하기보다 인상 깊었던 부분 몇 가지를 되짚으며 지금 혹은 앞으로 내가 그런 마음 상태일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 지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존성향과 불안감

의존성향이 강해 보이네요. 감정의 양 끝은 이어져 있기에 의존성향이 강할수록 의존하고 싶지 않아 하죠. 예를 들어 애인에게 의존할 땐 안정감을 느끼지만 불만이 쌓이고, 애인에게서 벗어나면 자율성을 획득하지만 불안감과 공허감이 쌓여요. 어떻게 보면 일에 의존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성과를 낼 때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안도할 수 있으니 의존하지만, 그 만족감 또한 오래가지 않으니 문제가 있죠. 이건 쳇바퀴 안을 달리는 것과 같아요. 우울함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또 노력하고 실패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주된 정서 자체가 우울함이 된 거죠

불안감이 숨어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무언가를 이야기했을 때, 자동으로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떠나지 않을까?’를 생각하니까 불안한 거죠. 이야기하는 게 좋은 경험일 수는 있어요. 하지만 결과가 한 방향일 수는 없다는 걸 알아야 해요. C라는 행동, D라는 행동이 나올 수 있죠. 반응은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걸 깨닫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해요.

서로의 친밀함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욕구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심리 상태를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한다 (...) 나는 늘 혼자이고 싶으면서 혼자이기 싫었다. 의존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할 땐 안정감을 느끼지만 불만이 쌓이고, 벗어나면 자율성을 획득하지만 불안감과 공허감이 쌓이는 상태. 매번 상대에게 지독하게 의지하면서도 상대를 함부로 대했다.

사실은 많은 이에게 소중해지고 싶으면서, 넘치게 사랑받고 싶으면서, 타인에게 아주 관심이 많으면서 아닌 척한다.

항상 자유롭게 혼자이고 싶으면서도 또 항상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싶고, 의존하고 싶다. 전혀 다른 마음이 공존하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겠지만, 혼자일 때도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함께일 때도 같이 있는 그 사람(들)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건 분명한 문제다. 나 혼자 괴로워하는 거야 내가 감내할 일이지만, 그래도 함께인 사람(들)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데 상대방을 실망시킨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렇게 불안감이 쌓이고, 혼자이든 함께이든 그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이 반복된다. 차라리 혼자인 게 낫다는 생각으로 집에 틀어박혀 있지만, 계속 사람을 갈구한다. 그나마 날 절대 떠나지 않을 (물론 이것도 확신해서는 안되겠지만) 오래된 친구들을 만날 떄 가장 자유롭고, 때문에 최근 친구들을 만나며 정말 눈물나도록 감사함을 느끼곤 했다.

처음엔 고슴도치 딜레마의 해결책이 '나 자신이 단단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혼자를 추구했던 것 같다. 물론 아예 틀린 건 아니지만, 책에서 선생님이 종종 언급하는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인 접근을 피할 필요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같은 딜레마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매일 집에 처박혀서 혼자 외로워 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계속 누군가를 만나면서 실상 별로 의미 없는 관계를 계속해서 맺을 필요도 없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기본이되 그보다 더 가까워지려 하는 사람도 멀어지려 하는 사람도 결국 나와 비슷한 사람임을 이해하고 그것이 내가 매력적이어서도 내게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의식 과잉에 빠질 때마다 스스로 되새기곤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다'는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외로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힘들겠지만 더 나아가 내 잘못으로 인해 떠나간 인연 역시 놓아주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할 수는 있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 언제든, 또 누구든 완벽할 수는 없기에 잘못을 저지른 나 역시도 인정하고 지금과 미래에도 잘못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다. 다만, 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잘못 역시 용서하고 이해해야 한다.


    엄격한 초자아와 합리화

나: 양가적인 감정의 원인은 뭔가요?

선생님: 죄책감과 비슷해요. ‘목을 조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자동으로 죄책감이 드는 거죠. 화가 났다가도 바로 죄지은 사람이 되어버려요. 일종의 자기 처벌적인 욕구죠. 나 자신에게 너무도 강력한 초자아가 서 있기 때문이에요(실제 내가 쌓아온 것 말고도 여기저기서 더 좋은 걸 차용해서 이상화된 내 모습을 쌓아놓았다는 것).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에요. 그래서 매번 이상화된 기준에 도달하는 걸 실패하면서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는 거죠. 그렇게 엄격한 초자아가 있으면, 나중에는 벌을 받는 게 만족스러워지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사랑받는 것을 의심하고 일부러 상대에게 욕을 먹을 때까지 행동하면서, 상대가 나를 포기하면 오히려 안심하는 상태까지 가게 되는 거죠. 실제 내 모습보다 밖에서 제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외모 때문에 강박감이 나오는 건 아니에요. 이상화된 내 모습이 있기 때문에 외모에 집착하는 거죠. 그 기준의 폭을 좁고 높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50킬로그램 이상이면 실패야!’ 이렇게요. 결국 이것저것 조금씩 시도해보면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어느 정도로 해야 편한지 알아보는 게 중요해요. 내 취향을 알고, 불안감을 낮추는 방법도 알게 된다면 만족감이 생겨요. 누가 어떤 지적을 해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게 되지요.

누굴 만나든 절대적인 선은 없거든요. 불만도 있을 수 있고요. 늘 부분과 전체를 구분했으면 좋겠어요. 하나가 마음에 든다고 이 사람 전체가 다 마음에 들고, 하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전체가 싫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자신은 ‘욕먹는 게 뭐라고’ 하면서 남들이 말하는 나, 남들이 날 바라보는 눈, 내가 마치 그들의 눈이 된 것처럼 계속 자아비판을 하는 거 같아요. 내가 느끼는 감정마저도 끊임없이, 중간에 어떠한 필터링 없이 반사적으로 타인의 눈을 의식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분명히 나한테 소중하거나 이득인 부분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영향 때문에 과감하게 포기해버린다는 거죠. 그 상황에서 좀 더 이기적으로, 내 마음대로, 내가 중요한 방향으로 선택해도 돼요.

이기적인 욕구를, 마치 살 빼고 싶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들은 다 정상 체중이라고 해도 내 기준에 따라 더 빼고 싶다는 마음처럼, 내 개인적인 기준과 욕구를 좀 증진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나 상식적인 부분으로 바라보면서 그것과 차이 나는 내 욕구를 마치 잘못된 것처럼 낙인을 찍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해봐야 할 거 같아요.

나: 그냥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나를 받아들이는 게 나을까요? 

선생님: 아뇨,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아야죠. 세희 씨는 늘 내면에 이상화된 기준(완벽한 나)을 만들고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해요. 어떻게든 맞춰야 한다는 강박까지 있고요. 날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단점보다 장점을 즐기려는 게 필요해요.

예전부터 '정신승리'하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곤 한다. 즉 정신승리가 정신건강과 행복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부정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정신승리를 하지 못해서 괴로워함과 동시에 정신승리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을 깔보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정신승리 아닌가?

몸도 그렇지만 다른 영역에서도 실상 닿지 못할 이상적인 모습을 상정하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검열하고 자책하고 더 심할 때는 정말 내가 그 이상적인 모습인 양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 명확하지도 않지만 '성숙함', '어른스러움'이 언제부턴가 추구하는 최고 가치로 자리잡아서 자꾸 그 잣대로 남과 나를 평가하고, 또 가까운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요구한다.

감정을 배제하는 태도가 대표적이다. 감정이 중요한 관계에서 상대방이 아무리 나를 두고 말해도 나는 자꾸 제3자가 되어있다.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답답해하고 나는 나대로 불만이 쌓인다. 감정 없이 '그럴 수 있다', '미안하다', '이해한다' 등의 말을 꺼내며 어른스럽게 대화를 풀어나갔다고 정신승리하지만 실상 상대방의 눈에는 내가 영혼 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뻔히 보인다.

나는 그렇게 듣는 척 듣지 않았고, 보는 척 보지 않았다. 이해하는 척 이해하지 않았으며, 공감하는 척 공감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척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적인 모습, 나 자신이 설정한 엄격한 초자아는 그렇게 이상적이지도 않고 또 현실적이지도 않다. 맨박스와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억압하는 동시에 그 모습에서 벗어나는 타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좁은 틀일 뿐이다. 내가 정신승리라고 칭하던 겉으로는 부러워하면서 속으로는 경멸했던 자연스러운 심리적 방어기제에 합리화라는 다른 이름을 부여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나 합리화를 하며 살아간다. 수없이 부딛히는 모순 속에서 합리화하지 않고 살 길은 없다. 상대방도 나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 이것도 저것도 내 모습이다. 이상형에 맞지 않아도 괜찮다. 충분히 합리화할 수 있다. 그 여지를 나 아닌 상대방에게도 주자.


저번 단편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리뷰하면서 두 작품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새벽의 방문자들>을 따로 빼내 감상 쓰기를 미룬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여성작가만의 발칙함이 돋보였다고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불편함과 죄책감이 머리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에 더해져서 도망치듯 두 손을 키보드에서 거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왠만하면 말을 삼키는 것이 낫다는 생각만 강해져서, 자꾸만 말을 하지 않고 글을 쓰지 않을 이유만 찾게 된다.

성착취, 강간문화, 성차별, 성폭력, 젠더권력, 여성혐오... 이들을 '페미니즘 이슈'라고 통칭하는 것이 차라리 편할 수도 있겠다. 혹자는 N번방 사건과 같은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페미니즘과 애써 구분하려 들테지만, 그럴 수 없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내지는 범죄자로 몰지 말라'는 주장은 틀렸다. N번방에 가입한 사람이 26만명이든, 중복된 사람이 있어서 그보다 적든, 텔레그램이 아닌 다른 통로를 통해서 유포하고 공유했을 사람들 때문에 그보다 많든, 그 수와 상관없이 그들이 남성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반대로 피해자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당했다.

그 이유는 재작년 과학뒤켠에 기고한 글에서 '교수니까 괴수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한 논리와 다르지 않다. 조주빈을 포함한 26만명의 성범죄자들과 같은 남성인 나를 다른 유형의 사람으로 구분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인간 유형으로 치부하면 내 마음이야 편할테지만, 여전히 같은 남성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해당 성범죄에 분명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 남아있다.

다시 말해, 조주빈이 남성이라는 사실과 조주빈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우연히 상관관계를 가지는 독립사건이 아니다. 전자는 후자의 필요조건에 해당하며,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성착취를 당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잠재적 가해자 내지는 범죄자로 몰려서 억울한 남성이 있다면, 불안과 두려움, 공포에 빠진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에게 뭐라 할 것이 아니라, 단지 XY 염색체를 갖고 태어났을 뿐인 남자가 어떻게 남성이 되는지, 더 나아가 어떻게 그들 중에 조주빈과 같은 사람들이 탄생하는지, 반대로 단지 XX 염색체를 갖고 태어났을 뿐인 여자가 어떻게 여성이 되는지, 역시 더 나아가 어째서 자꾸 그들 중에 성착취 피해자가 나오는지를 물어야 한다. 단순히 그 질문들을 던지는 게 아닌 자기 자신에게도 되묻고, 또 다른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묻고 답해야만 한다. 내가 이해하는 바가 맞다면, 그게 페미니즘이 답하고자 한 질문이다.

내가 이 주제로 글쓰기를 주저했던 이유는 내가 '나도 다르지 않다'는 깨달았다고 말함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르다'고 말하는 모순을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25년 넘게 남성으로 살아왔기에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적지 않은 요소들을 조주빈과 26만명의 N번방 회원들과 공유하며, 따라서 여성혐오, 젠더권력, 성폭력, 성차별, 강간문화, 성착취와 같이 페미니즘에서 제기하는 심각한 문제들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나는 그들과 나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어 구분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순 속에서 남성으로서 나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끝없는 고민을 하다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글을 쓰고 있다.

장류진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를 남성인 지훈 입장에서 쓴 이유를 두고 '자기 자신에게 심취해 있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사람을 주인공으로 쓰기 위해서였다기엔 결국 자신과 '자주지 않는' 지유에게 마음속으로 '씨발년'하고 욕하고서 '난 여기 [후쿠오카에] 왜 온 거지?'라고 자문하는 지훈의 여행은 남성들끼리 모였을 때 한번쯤은 꼭 나오는, 혹은 경쟁하듯 마구 쏟아지는 '무용담'과 놀라우리만치 닮아있다. 글을 읽으며 분명 작가는 어쩌다 남자들 위주로 모여있는 술자리 같은 곳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그러지 않고서는 남성의 생각과 마음을 이토록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남성들 사이에서 그 숱한 무용담은 지유처럼 여성이 욕을 먹거나, 섹스를 쟁취한 남성이 승리자가 되는 두 결말 중 하나로만 끝이 났다면,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끝까지 지훈을 비추며 무용담의 진정한 결말을 보여준다.

냐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기억 속의 여성들을 한 명 씩 불러내서 'XX년'으로 만들거나 성관계에 성공했다며 어깨를 으쓱거릴 때, 그 모습이 피해자를 '노예'라 칭하며 낄낄대던 N번방과 무엇이 크게 다른지. 많은 여성들이 주변에 n번방 회원이 있지는 않을지 두려워한다면, 나는 내 주변 혹은 지인 중에 n번방 회원이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분명 있을 거라 확신이 들기도 한다. 혹시나 있을 이 글을 읽는 여성분들의 공포를 조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N번방 사건이 N번방 회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가 남성의 언어로 남성의 내면이 얼마나 찌질한지 드러냈다면, <새벽의 방문자들>은 시선의 방향을 바꾸고는 '이래도 남성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인정하지 않을래?'라고 묻는 듯 하다. 두 작품이 실린 책의 해설을 쓴 인아영이 정확히 지적했듯 "시선이 곧 권력이자 정치이기 때문"에,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위계적인 구조가 전복되면서, 오직 성적인 대상으로 물화되고 교환되는 여성의 신체 대신 새벽에 남몰래 성매매를 하러 온 남성들의 초조한 얼굴이 대상화된다."

작가는 더 나아가 그 얼굴들에 '누군가의 아빠', '회사 옆자리 동료', 또 '전 남자친구'를 그려넣음으로서 단순한 대상화 그 이상의 것을 시도한다. 성매매를 실제로 했든 안했든, 그들은 여성의 몸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는걸까. 장류진은 인터뷰에서 <새벽의 방문자들>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다른 세계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어느 시점에는 나도 돈 주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겠다 싶었다"고. 질문은 여성들에게 이토록 현실적으로 다가가지만, 남성인 나는 그저 그것을 수요와 공급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하고 올건데, 같이 갈래?'라고 물어볼 때, 별 생각 없이 '하고 와. 난 한숨 잘래'라고 답하고서 불편한 마음 하나 없이 잘 수 있었다. 그 순간에 이미 우리는 같은 'N번방'에 들어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N번방 안에서 살고 있다. 나만큼은 N번방 밖에 있다고 자위하고 싶지만, 그리고 자신만큼은 N번방 밖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부럽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 N번방에서 추방당하는 것이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창피하게도 오히려 그 수많은 N번방에 의해 차별과 억압 속에서 피해받아 온 여성들에게 짐을 떠넘겼다. 찌질하고 초라한 한남답게 뒤에서만 조용히 지지하고 응원해왔다. 물론 N번방 안에서는 아닌 척 하고 말이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될 줄 알았건만, 정리는 커녕 머리와 마음은 더 복잡해져만 간다. 분명한 건 N번방 사건이 조주빈을 비롯한 N번방 회원들과 그 피해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건이 공분을 산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공감하며, 또 함께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남성 중에 나처럼 그 분노가 자기 자신에게도 향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더 공개적으로, 또 전보다 더 자주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응원하기를 제안한다. 그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몇 개일 지 모를 N번방 중 한개라도 더 부수기 위해서.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오랜만에 독후감을 쓴다.

직장생활을 한 지도 2년째다. 대학원에서도 끊임없이 일했지만 졸업 후 회사에 출근하고서야 취업자가 되었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세 번 읽고도 아리송해 했던 나는 일과 업 사이 간극에 스트레스 받다 못해 둘을 완벽히 나누기에 이르렀다.

처음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창작과비평 웹사이트에 올라온 <일의 기쁨과 슬픔>을 낄낄 웃으며 읽었을 때도 별 생각 없었다. 계획대로라면 유학 준비를 마쳤어야 하는 지금, 유학 준비는 시작도 못한 채 홀린 듯 단편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꺼내들었다. 하고픈 일을 업으로 삼기는 어렵지만 업이 내 일을 지배하는 건 너무도 쉽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소설집 속 작품들은 단편 치고도 꽤 짧은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을 제외하고는 길이가 모두 한 호흡에 읽기 좋았다. 다른 연구서를 읽다가 집중이 안 될 때나 자기 전에 한 편씩 읽다보니 아쉬울 정도로 일찍 다 읽어버렸다. 창비 홈페이지에서 표제작만 읽었을 때는 '판교 하이퍼리얼리즘' 장르를 창시했다는 평에 동의하는 정도였다면, 다른 작품과 함께 한 권의 책으로 읽고 나니 일터의 디테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 안에 또 다른 나 내지는 내 주변 사람을 등장시켜 따뜻하게 위로해주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단편 하나하나 안에서 나를 발견한만큼 책 전반에 대한 감상을 남기기보다 작품 각각에 대해 감상을 짤막하게나마 남기고자 한다. 우리가 사회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에 단계가 있다면 첫번째로 올 '첫 출근'을 다룬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부터 결혼과 내 집 마련 이후 이야기 <도움의 손길>까지 하나의 글로 풀어도 어색하지 않을 6편을 먼저 다룰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도 느꼈던 여성작가만이 가질 수 있는 발칙함이 돋보인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와 <새벽의 방문자들> 감상은 잠깐 미뤘다가 조만간 추가하도록 하겠다.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연봉을 듣고서도 감히 협상하지 못하는 사회초년생은 출근 전부터 어떻게 돈을 아낄지, 그래서 언제까지 얼마나 모을지를 계획한다. 마이크 타이슨이 '얼굴에 한방 쳐맞기 전까진 누구나 계획이 있다'고 한 것처럼,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의 주인공은 하루 11000원만 쓰기로 계획했지만 출근길에 쳐맞듯이 12500원을 쓰고만다. 아무도 겨드랑이가 축축해질 정도로 더운 날엔 커피에 '아이스'만추가해도 2500원이 더 비쌀 줄은, 첫 출근인만큼 눈치가 보여 정시도착할 버스대신 택시를 타야할 줄은, 그럼에도 설레는 마음에 계획이 어긋난 것도 잊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괜찮다. 다들 그렇게 배우기 시작하니깐.

한편 사회초년생이라고 부르기 애매한 <다소 낮음>의 주인공도 있다. 그는 장난스럽게 올린 '냉장고송' 영상 하나로 대박나서 스타가 될 뻔 했지만 그 영상 속 냉장고의 에너지 소비 효율 등급처럼 다시 다소 낮아져서 영상 이전과 다를 바 없어진 밴드 보컬이다. 28장 팔린 밴드 음반이 무색할만큼 유튜브 영상은 조회수가 곧 30만...50만...100만을 찍었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획사 제안을 거절한다. 급하게 돈이 필요한 그가 새로 업로드한 '세탁기송' 영상 조회수는 100을 넘기지 못한다. 기회를 놓친 주인공에게 여자친구가 떠나며 뱉었던 말처럼 그의 삶이 너무도 비효율적인 것도 같다. 하지만 원래 누구에게나 잡은 기회보다 놓친 기회가 많아보이지 않던가. 우리 모두가 어쩔 수 없이 다소 낮은 효율인 것처럼 보이는 건 아닐지, 또 그게 우리의 편한 제자리가 아닐까 싶다.

<탐페레 공항>의 주인공은 아티스트의 고집을 지켰던 <다소 낮음>의 주인공과 달리 피디의 꿈을 접고 회사 회계팀에 취직했다. 포기는 참으로 멋없지만 그만큼 홀가분하다. 포기하고서야 다른 길이 눈에 들어오고 또 열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 후회라는 흔적을 남기기에 실수로라도 들춰보지 못하도록 그 기억들을 꽁꽁 숨겨놓곤 한다. 한창 다큐멘터리 피디를 꿈꾸던 주인공은 어쩌다 탐페레 공항에서 만난 핀란드 할아버지 앞에서 본인의 꿈을 향한 사랑을 고백한 적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사진과 편지에 오랜 기간 답장하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을테다. 마음 한켠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면서 말이다. 다행히 살아있다는 핀란드 할아버지에게 주인공이 6년만에 쓰는 답장에 뭐라고 적을지도 궁금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가 애써 잊고 있던 기억과 꿈을 다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합시다, 스크럼"이라는 첫 대사 문장 하나만으로도 판교의 수많은 독자들을 휘어잡은 <일의 기쁨과 슬픔>에는 사실 뚜렷한 기쁨과 슬픔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내가 기쁨과 슬픔의 기준을 너무 높게 잡는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가 아니라도 우리가 보통 일에서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는 지 의문이 든다. 내가 그 정도로 일에 빠져있지 않아서 그런 걸까? 어쨌든, 소설에 나오는 가장 큰 기쁨이라곤 주인공과 동료 개발자가 대화하던 중에 울린 월급 입금 알림이나, 그 월급으로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라는 메세지가 오고 가는 채팅방 사람들과 함께 클래식 공연 예매와 항공권 구매하는 장면뿐이다. 슬픔 역시 찾자면 그나마 우동마켓의 큰 손 거북이알이 대표에게 밉보여서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만 받게 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 정도가 있겠다. 물론 나도 월급쟁이인만큼 그 기쁨이나 슬픔을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다. 다만 이 소소하면서도 찜찜한 감정선의 상승과 하강이 정말 우리 노동자들의 일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일로 인한 감정 기복이 그 이상이 되면 오히려 안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직장생활을 하며 겪는 당혹스러운 일이나 스트레스는 보통 업무보다 사람으로부터 오기 마련이다. 꼭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빌런 급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정말 사소한 것에서부터 신경을 건드는 평범한 타인이 많다. 아니, 사실 순진한 그 사람들이 아닌 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왜 이렇게 그들을 신경써야 하는지 억울할 정도로 인간관계에는 품이 참 많이 들어간다. <잘 살겠습니다>의 주인공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앞둔 동료 직원의 뻔뻔함 혹은 순수함에 혼자 답답해하다가, 고민하다가, 분노하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만다. 복수랍시고 결혼 선물을 저렴한 핸드크림으로 준비했는데 선물을 받아든 동료 직원이 고마움에 눈물을 흘리고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까지 올린 것이다. 그렇게 업무가 아니라 사람 때문에 한바탕 롤러코스터를 탔던 주인공은 결국 그 동료 직원을 응원하게 된다. '빛나 언니는 잘 살 수 있을까. 부디 잘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결혼 후 그 어렵다는 내 집 마련에 성공한 <도움의 손길> 주인공은 아마도 생전 처음으로 마음 속 왠지 모를 불편함을 무릅쓰고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을 '쓰기로' 한다. 남편에게 '아줌마'가 아닌 '도우미 아주머니'라고 부르라고 한소리 하고, 아주머니가 일한 돈이 아들에게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속상해 하는 등 주인공은 자매애를 갖고 아주머니를 대한다. 하지만 고용인-피고용인 관계, 세대 차이, 종교관처럼 절대 사소하지 않은 다른 요소들 때문에 둘 사이에는 균열이 일어나고 만다. <기생충>이 대저택에 사는 부자 가족과 냄새 나는 반지하에서 생활하는 가난한 가족을 대비시켜서 그 사이의 갈등을 증폭시켜 보여줬다면, 이 작품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 등장인물을 병치하고서 그 사이의 미세한 갈등을 딱 신경쓰일 정도로만 바늘로 찌르듯 묘사한다. 사회생활을 하며 우리가 느끼는 인간관계에서의 스트레스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돈을 한푼이라도 아끼려는 사회 초년생 이야기부터 분명 돈 받고 일하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도우미'라 불리는 아주머니와 긴장 속 고용관계를 이어간 사회인까지. 책의 작품들은 모두 이렇다 할 분명한 기승전결은 없지만 하나 같이 깔끔하게 마무리되면서도 여운이 있다. 아마도 그 여운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상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따라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는 인생의 단계들을 많이 거친 사람일수록 더 크게 다가올 것이다. 작품들 모두 딱 충격적이지 않을 정도의 소소한 반전을 갖고 있기에, 그래서 이 독후감을 통해서 책을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책 읽는 재미가 반감될 수 있고 또 다시 읽을 가치를 크게 못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종종 다시 꺼내읽고 싶은 책임에는 틀림없다.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을 읽게 된 건 다름 아닌 회사 세미나 때문이었다. 올해 초에 이미 회사 대표님이 승진자들한테 선물로 이 책을 나눠준 바 있는데, 대표님이 책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인지 그 이후로 계속해서 이 책 이야기를 하시고 사업에서도 책이 지적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는게 눈에 보였다. 우리 부서에서도 매달 진행하는 책 세미나 때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책을 받고 나서 점심시간마다 틈틈이 읽었더니 한달 정도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을 갖고 있어 나 역시 처음에는 약간의 오해를 했는데, 이 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루지는 않는다. 조금 더 명확히 하자면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가깝다. 물론 여전히 큰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아니면 충분히 오래 살았기 때문에 죽음이 가시권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즉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과 그 가족이 하는 고민이라 한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의학 기술의 발전 덕에 돈과 의지만 있으면 병원에서 치료 혹은 연명수단을 통해 충분히 죽음을 미룰 수 있는 시대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우선 책을 읽으면서 책 원제가 참으로 탁월하다 느꼈다. Being Mortal. 마치 언젠가는 죽음을 정복할 것처럼 현대의학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낼 지 결정해야만 한다. 반면 제목 번역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니, 너무 진부하잖아.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덮고나니 저 질문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툴 가완디라면 (그가 쓴 다른 책들 제목을 살펴보면 모두 한두 단어다) 절대로 부제를 붙이지 않았을테지만, 붙였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말이지 않았을까. 물론 'How to die'는 아니었겠지만. ('How to give a death'가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아툴 가완디는 책의 앞부분에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오늘날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이루고 있는 일종의 패러다임을 설명한다. 

첫째로, 현대 사회에서 삶에서 독립(혹은 자율)은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가족의 범위는 줄어들었고, 부모와 자녀마저도 특정 시기가 되면 당연하게 서로 독립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삶은 도와주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미안한 일이 되었다. 

둘째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 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p.15) 실제로 인간의 수명은 계속해서 연장되고 있다. 맞닥뜨리면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려야했던 수많은 질병 역시 정복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툴 가완디는 이 삶과 죽음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분명히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은 언젠가 분명히 독립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죽음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생명이 자연스럽게 꺼지는 과정이다. 이 두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갑작스레 눈앞에 죽음을 목도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들이 보다 행복하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텐데, 저자가 몸담고 있는 현대의학계를 포함해서 현대 사회 전체는 아직도 이 문제를 직면하고 있지 않다. 단적으로 의학계에서는 질병 정복이 노인 돌봄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로 여겨진다.

책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아툴 가완디는 본격적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해법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노령에 접어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병실을 비우기 위해 시작된"(p.116) 어빙 고프먼이 말했던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 사례로서의 요양원 대신 정말 사람이 중요한 '어시스티드 리빙(assisted living)'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말뿐인 어시스티드 리빙은 그저 노인의 자녀들에게 안심만을 심어주고 노인을 생각하지는 않는 곳과 다를 바 없다. 

저자 역시 어떻게 하면 어시스티드 리빙이 정말 성공할 수 있는지 - 사업 차원으로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의 만족 차원으로나 - 뚜렷한 정답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관심사가 일상적인 기쁨과 가까운 가족과 친구로 바뀐다는 '사회정서적 선택 이론'이나 시설에 동물을 들여놓으며 노인들이 조그마한 충성심(loyalty)을 가질 수 있도록 함으로서 활력을 불어넣은 '에덴 얼터너티브 프로그램' 등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할 뿐이다. 그는 물론 제대로 된 '어시스티드 리빙'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한다.  

아툴 가완디가 책 중반부에서 제도 차원의 해법을 찾고자 했다면 말미에서는 보다 미시적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 노인 혹은 환자와 그 가족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야기 한다. 물론 우리는 죽음이라는 너무나도 무거운 주제 앞에서 그래도 희망을 노래할 수 밖에 없고 아무리 현실적이더라도 부정적인 말은 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생기는 단순히 경제적만은 아닌 낭비와 피해가 심하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싸우는 방식에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것들, 이를테면 가족, 여행,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을 위해 싸우는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을 때 나누는 일련의 대화"인(p.283) Breakpoint discussion이 중요한 이유다. 

저자는 경험많은 의사답게 의료진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학생 시절 읽었던 의료윤리학 논문 주장을 빌려 의사와 환자가 가부장적(paternalistic, 의학적 권위를 가진 의사가 본인이 생각하는 최선의 처방을 제공하는 것)도, 단순히 정보만을 주는(informative, 환자가 알아서 선택할 수 있도록 의사가 여러 선택지와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닌 해석적(interpretive) 관계로 재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석적 관계에서 "의사의 역할은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p.308) 물론 이 해석 과정은 지난하기 마련이고 환자의 욕구 역시 분명하지 않거나 변하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해서는 안되는 관점이기도 하다.

책이 그리는 죽음은 '한편의 이야기를 완결짓는 과정'이다. 그리고 완결에 다다른 사람들에겐 선택지도, 그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할 시간도 많지 않다. 그 과정을 본인의 일로 직접 고민한 사람들은 모두 얼마 안가 스러졌기에 여전히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죽음을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독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그 어렵고, 무섭고, 두려운 고민을 하게 만들 것인가? 단순히 아툴 가완디 본인이 의사라서 책의 상당 부분을 환자 사례로 채운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저자의 아버지가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저자도 어쩔 수 없이 경험하는 갈등은 여러 사례 중 하나일 뿐이지만 읽는 사람에게 가장 와닿을 뿐만 아니라 책이 한 권으로 마무리되는데 큰 기여를 한다. 

죽음에 대한 수많은 글은 다소 뻔하게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심지어 당장 죽을 수도 있다'며 공포를 불러일으킨 후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곤 한다. 아툴 가완디의 책은 달랐다.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글이었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만 한다. 언젠가는 나 역시 떠나야만 한다.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올해 설 명절 기간에 맞추어 사읽었으니 책을 덮은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대학원에 남아있었다면 명절에 광주와 곡성으로 내려가는 것을 정말 싫어했겠지만, 회사를 다니다보니 그래도 '일 안하는' 시간이 생긴다는 생각에 최근 지인들이 연달아 내놓은 책을 구매해 전자책에 저장해두고 읽었다. 과정남이 쓴 <과학기술의 일상사>, 김우재 교수가 쓴 <플라이룸>, 그리고 양승훈 교수의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를 샀는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에 먼저 손(가락)이 갔다.

물론 어디서 떠들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글에 썼듯 나 역시도 조선업과 거제를 연구한 적 있다. (https://stpforerbody.tistory.com/27) 석박사모험연구사업(이하 모험연구)이라고, 신문기사 몇 개를 보고서는 뭔가 느낌이 왔던 나와 한 때 운동하고 다닌 경험을 바탕으로 산업과 노동 정책에 관심있던 형 둘이서 생각이 맞아 다른 두 명을 더 불러모아 제안서를 작성했는데, 덜컥 몇 백만원 지원을 받고서 막무가내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가며 연구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안서를 쓰는 시점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이건 연구감이다'라고 생각한 계기가 바로 양승훈 교수의 글이었다. 대표적으로 경향신문 기고문이 있고, 이외로도 그의 블로그 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 찾으려니깐 못 찾겠다. 여하튼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면서도 산업정책에는 도저히 흥미를 붙이기가 힘들었는데, <중공업 가족의 유토피아> 책이 나오기 전부터 그가 조선업과 거제를 바라볼 때 중요하게 여긴 '가족'과 같은 미시적 요소들을 바라보면 재밌게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 때 한창 이정동 교수의 <축적의 시간>도 열심히 읽고 있었고, 학위논문 연구를 통해 지역 산학협력에 대한 논문이나 책도 살펴보고 있었다. 조선업이라는 한 산업과 함께 몰락하고 있다는 거제라는 도시에 내려가야만 했다. 그 곳에서 '조선업 위기'를 견뎌내고 있는 노동자들과 그 가족, 더 나아가 학생들을 만나야 했다.

우리는 '모험연구'라는 단어에 걸맞는 활동들을 했다. 전/현업 노동자들과의 인터뷰는 거진 술과 함께 진행되었고, 꼭 조선소 노동자들이 아니더라도 다들 산업에 대한 자부심만큼은 대단해서 인터뷰를 거절당하는 일은 없었다. 발주사 감독관이 주로 머문다는 아파트부터 창원의 어느 고시원까지 다양한 곳에서 머물면서 부단히 움직였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에 비해 마무리로 작성한 보고서가 깔끔하지 못했던 것 같지만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사실 책을 읽고 나서는 보고서를 아무리 잘 썼어도 이 책의 아류밖에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결과물에 대한 아쉬움도 별로 남지 않는다.

잡설이 길었는데 본격적으로 책 내용을 살펴보자.

책은 프롤로그에서부터 '중공업 가족'이라는 중소단위의 조직을 중심으로 층위를 자유롭게 다루면서도, 흔히 조선업 산업을 다룰 때 주로 언급하는 '세계 물동량', '빅 사이클'과 같이 산업을 아우르는 큰 개념이나 3대 조선업체의 수주량이나 해양플랜트 산업 진입 전략과 같은 회사를 최소 단위로 하는 것들에는 깊이 천착하지 않는다. 대신, (아마도 저자가 대우조선해양에 다니며 직접 경험했을) 개인이 당장 마주하는 회사 안팎의 조직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필요할 때마다  TV 프로그램에서 볼 법한 가상의 재연코너가 등장하니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나 역시 연구를 하면서 꿈꿔왔던 기존 '조선업 위기' 담론의 전복이 일어난다. 기존 담론은 마치 예정된 것처럼, 너무도 거시적인 추세라 어쩔 수 없이 찾아온 불황과 그에 따른 구조조정을 이야기한다. 이른바 '말뫼의 눈물' 담론은 그 안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 거제라는 도시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저 어쩔줄 몰라하는 사람들과 침체된 분위기만 사진이나 영상으로 담을 뿐이다. 

반면 책은 거꾸로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 그들이 사는 거제가 어떻게 모이고 만들어졌는지를 보이고 조선업 위기를 그 사이에 생겨나는 균열로 읽어낸다. 바로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의 실패다. 이것이 기존 담론을 전복한다고 해서 그와 정면으로 충돌하거나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를 살펴봄으로서 우리는 기껏 자세히 들여다봐야 개별 회사의 전략과 중국 및 동남아에 비해 비싼 노동력을 고려 대상으로 삼았던 산업 정책에 조직문화, 도시, 작업장/랩실 엔지니어로서의 노동자라는 층위를 더할 수 있다. 

책의 앞부분이 조선소 울타리를 넘나들며 '중공업 가족 프로젝트'가 어떻게 착실히 진행되었고 또 어떻게 실패에 직면해있는지를 보였다면, 뒷부분은 '작업장 엔지니어'와 '랩실 엔지니어'가 공존하는 조선소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저자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조선업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는 해양플랜트 사업 진출 실패(라고까지 하기는 어려울 수 있겠으나...)가 이른바 '엔지니어-노동자 구성 포트폴리오' 고민 부족에 기인한다고 보는 듯 하다. 현장에 강한 '작업장 엔지니어'와 이론에 강한 '랩실 엔지니어'를 어떻게 배치하고 조화시킬 것인가? 각각 숙련도와 임금에 있어 뚜렷한 장단점을 지닌 직영과 하청 노동자를 어떤 비율로 조합할 것인가? 기업들이 "궁극적으로 엔지니어들이 익숙하게 느끼는 작업 방식 자체를 질문하고 문제 삼는 작업"으로 가득찬 해양플랜트 사업에 진출한 이상 대답해야만 하는 질문들이다. 

조선업 회사는 그 고민을 거의 하지 않은 듯 하지만, 저자는 그나마 책 <축적의 시간>이 같은 질문을 다루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책에서 내놓은 '산학연계 강화'라는 해법은 공허한 주장이라고 비판한다. "랩실 엔지니어들의 지식이 '현장'의 노하우를 대체할 정도로 압도적이지 않았다"면서, "배우는 곳은 학교이고, 일하는 곳은 일터라는 틀에 박힌 이분법을 묵인"하는 교수 관점의 산학협력이 가진 한계를 꼬집은 것이다. 

저자가 내놓는 대답은 '산학연계'에서 한발짝 더 나아간 '산학일체'다. "일하는 엔지니어들이 끊임없는 학습을 통해 자신의 공학 능력을 발전시켜야" 한다며 "중공업 엔지니어들이 살아 있는 지식을 교류하기 위한 장은 여전히 척박"한 부산, 마창진(마산, 창원, 진해), 거제가 단순한 산업도시가 아닌 제조업의 실리콘밸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리콘밸리라는 단어에서 약간의 배신감(?)과 함께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실리콘밸리의 모습이 무엇인지 좀 더 살펴보자. 아마도 "('현장 중심' 기풍 하에서 '쟁이 근성'에 기초하는 작업장 엔지니어와 달리) 지금의 우수한 랩실 엔지니어들은 오픈소스판에서 뛰노는 해커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 일을 해내려고" 하는데, 지금은 "조선소 현장을 제외하고 제조업의 가장 첨단 기술을 경험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곳"은 판교, 서울대나 카이스트 정도이고 이 둘 사이 거리는 너무 멀기 때문에 '산학일체'의 환경 조성이 힘들다는 것이다. 이 둘을 같은 공간에 둔다면 실리콘밸리에 걸맞는 곳이 되지 않겠나하고 묻는 듯 하다.

문제는 여기서 저자가 '작업장 엔지니어'의 대척점에 자리하던 '랩실 엔지니어'의 위치를 바꾸었다는 점이다. 독자는 암묵지와 형식지, 현장과 대학, 실전과 이론 등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대립항으로서의 '랩실 엔지니어'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었고, 저자 역시 그에 기대어 두 단어를 사용해왔는데, 알고보니 그가 그리는 (우수한) '랩실 엔지니어'는 코딩하는 computer science geeks에 가까운, 흔히 실리콘밸리형 인재라 불리는 '문제해결형 엔지니어'였던 것이다. 이렇게 '랩실 엔지니어'를 새롭게 바라보면 당연하게도 두 엔지니어 개념이 가지고 있던 갈등은 쉽게 해소된다. 둘을 같은 공간에 두고 서로 자주 만나도록 '밋업' 등의 행사를 개최하면 실리콘밸리와 같이 저절로 혁신이 일어날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저자는 앞서 내가 비판적으로 요약한 것보다는 더 상세한 '산학일체' 방안을 설명했고, (석사 수준 밖에 아니지만) 산학협력 정책을 연구해 본 나 역시 큰 방향에 있어 그의 주장에 동의하는 바다. 문제는 효과적인 산학협력이라는 뿌리깊은 난제를 '랩실 엔지니어'라는 개념의 위치를 살짝 바꿈으로서 쉬워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는 저자가 '엔지니어는 어떻게 성장하는가?'라는 질문을 두고  '오픈소스'와 '해커 문화'를 다소 장황하게, 하지만 끝맺음이 불분명하게 다룬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에 따르면 "오픈소스가 '현장'이라는 필드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는 분야"인 IT 계열과 자동화된 산업에서는 유효했을지 모르지만 조선업, 특히 해양플랜트 산업에서는 결국 프로젝트를 통한 현장 경험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 역시 오픈소스나 해커 문화는 잘 모르지만) 오픈소스 역시 현장을 만나야 실제 서비스와 사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책에서 예시로 든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화폐는 왜 논란만 가득한채 실제 서비스와 사업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오픈소스와 해커 문화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하지 않은 채 '랩실 엔지니어'를 그 속의 해커들로 바라보고 더 나아가 '산학일체' 해법에도 그 둘을 상당 부분 불러왔기에 책의 주장은 설득력을 일부 잃고 만다.

이후 책은 조선업을 둘러싼 낙관론에 대해 비판적으로 응답하며 산업을 바라보더라도 눈길을 단순히 시장을 비롯한 외부 환경에만 둘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조선업을 구성하는 지역과 조직에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더 나아가 산업과 너무도 강하게 결합된 지역과 조직 체계에서 발생하는 문제 역시 다룬다. 조선업을 바라보는 기존 관점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물론 '조선업 위기'를 다룬 각종 르포를 접한 사람이라면 그 내용은 익숙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책만큼 차별화된 관점으로 깊이 들어간 경우는 드물다. 여전히 저자가 곳곳에 연구가 더 필요한 지점들을 남겨놓았기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그 지점을 파고들 수 있기를 희망한다.  

  





원래 명절 연휴동안 읽은 다른 책을 리뷰하려다가, 전자책으로 읽고서는 따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이 눈에 밟혔다. 졸업논문 쓰면서 아무도 논문 작성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현실에 한숨 쉬며 이런 저런 책을 뒤적거렸더랬다. 그 중 한권인데, 나름 실용적인 팁이 많아서 재밌게 읽었다. 물론 학문 분야나 시대 때문에 적용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꽤나 유용한 책이었다.

1. 졸업 논문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필요한가

(Ph.D. 논문의 의미) 

"자신이 전념하는 학문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학자라는 걸 보여 주어야 한다." (p.25)

"논문을 작성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념을 체계화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p.32)


2. 테마의 선택

"분야를 제한할수록 작업은 더욱 잘 이루어지고 더욱 확실하게 진행된다 (...)" (p.44)

"소박할지라도 한계를 확정하고, 그 한계 안에서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p.53)

"연구는 이러한 대상(앞서 켄타우로스 예를 들었지만 모든 연구대상을 의미)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들을 말하거나 또는 이미 언급된 것들을 다른 시각에서 재조명해야 한다." (p.72)

"정치적 관심이 많은 학생이 <18세기의 어느 식물학 저술가의 지시 대명사의 반복 사용>에 대한 논문을 쓴다고 해서, 자신의 정치적 관심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p.80)
-> 보다 실천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 정치사회적 관심을 가진 - 학생일 경우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소명과 연결된 논문을 작성하고 싶을 수 있겠지만 지식 습득과 자료 조사 방법을 익혀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와 동떨어져 보이는 주제로 논문을 작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맥락)

(정치적 성격을 가진 논문이 쉽게 피상성의 위험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수많은 <미국식> 사회 연구 방법론이 수치 및 통계적 방법을 물신화함으로써, 실제적인 현상의 이해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대량의 연구를 산출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치화된 수많은 젊은이들은 기껏해야 <사회 측정법>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사회학에 대하여 불신의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껍데기로 둘러싸인 체제에서 단지 기능적인 역할을 할 뿐이라고 비난한다." (p.83)


3. 자료 조사

(재인용은 되도록 피하라) 

"내 연구 대상에 의해 확정된 범위 안에서 출전들은 언제나 직접적인 것이어야 한다(...)" (p.113)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단 하나, 마치 원문을 직접 살펴본 것처럼 간접적인 출전에서 인용하는 일이다." (p.115)

"간접적인 출전에 의존할 때(그것을 명백히 밝히면서) 주의할 점은, 하나 이상의 출전에서 확인을 하고, 어떤 인용이나 사실 또는 견해에 대한 언급이 여러 저자에 의해 확인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자료에 의존하는 것을 피한다든지, 아니면 원본에서 확인해야 한다." (p.116)


(징징대지 마라(...))

"어떤 테마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아는 것도 없이 지방의 도서관에 가서 세 번의 오후를 보낸 다음에는, 충분히 명백하고 완벽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p.209)


(문헌을 읽어야 하는가? 어떤 문헌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 본문은 책으로 되어 있으나 모든 참고문헌에 해당하기도. 다만, 에코는 문학 분야 논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은 유의)

"대개 책에 대한 논문은 두 가지 유형의 책들, 즉 언급의 대상이 되는 책들과 언급에 도움을 주는 책들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연구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들이 있고, 또한 그 텍스트들에 관한 문헌들이 있다. (...) 우리는 원래의 텍스트와 비평적 문헌을 구별해야 한다. (...) 우선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곧바로 아주 일반적인 비평적 텍스트 두세 권을 읽는다. 그런 다음 직접 원래의 저자를 접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이해하도록 한다. 그러고 나서 나머지 비평적 문헌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새로 얻은 생각들에 비추어 저자를 재검토한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이론적인 충고이다." (p.213-4)


4. 작업 계획과 카드 정리

(어차피 계속해서 다시 쓰게 될 서문에 잠정적인 연구 내용과 결론을 담아 생각을 내 중심선에 고정시켜 이탈을 방지하라는 의미)

"졸업 논문 작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들 중의 하나는 바로 제목, 서문, 그리고 최종적인 차례를 쓰는 일이다 - 말하자면 모든 저자들이 마지막에 하는 일들이다." (p.216)

"테마의 범위에 초점을 맞춘 다음에 거기에서 단 하나의 구체적인 관점만을 다루기로 한다는 의미이다." (p.219)

"서문이란 단지 차례에 대한 분석적인 언급일 뿐이다." (p.221)

"차례와 서문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여러분은 그것이 여러분의 논문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서문을 쓸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떻게 출발해야 할지 아직 명백한 생각을 갖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 여러분이 어떻게 출발해야 할지 명백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최소한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의혹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혹을 토대로 여러분은, 마치 이미 달성한 연구 작업의 서평을 쓰듯이 서문을 써야 한다. 지나치게 앞으로 나아간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이 뒤로 되돌아갈 시간은 언제나 있다." (p.223)

"(최종 버전에서의) 서문은 신중해야 하고, 또한 논문이 나중에 줄 수 있는 것만을 약속해야 한다. (...) 서문은 또한 무엇이 논문의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인가 확정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p.224)

"(가설적인 차례의 의미) 실험적인 성격의 논문에서는, 몇 가지 증거에서 출발하여 이론을 제기하는 귀납적 계획을 세우고, 반면에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논문에서는, 먼저 이론을 제기한 다음 구체적인 실례들에 대해 가능한 적용을 하는 연역적 계획을 세울 수 있다." (p.225)


(인용 문헌 정리하기)

"여러분은 각 장들의 번호가 잘 매겨진 작업 계획(또는 가설적인 차례, 4.1 참조)을 준비한 다음에, 차례차례 책들을 읽으면서 밑줄을 치고 또 각 장들에 해당하는 약자들을 모서리에 표시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업 계획의 각 장들 옆에다 주어진 책에 해당하는 약자와 페이지 숫자를 기록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원고를 작성하는 순간에 어떤 인용 또는 생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알게 된다. (...) (이는) 작업 계획이 이미 결정적으로 작성되어 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p.232-3)

"복사물의 소유는 책 읽기를 방해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발생한다. 그것은 일종의 수집 현기증이며, 정보의 신자본주의다. 복사물에서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일단 복사를 하자마자 읽고 곧바로 기록하라. 정말로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전의 복사물을 소유하기(말하자면 읽고 기록하기) 이전에는 새로운 것을 복사하지 말라. 어떤 텍스트를 복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내가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마치 내가 그것을 읽은 것처럼 안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p.247)

"참고 문헌 카드는 책을 찾는 데 필요한 것이고, 독서 카드는 최종적인 참고 문헌 목록에 기록하듯이 그 책에 대해 말하고 인용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p.267)

"누구든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줄 수 있다." (p.274)


5. 원고 쓰기

"논문이란 우연하게도 단지 지도 교수 또는 심사 위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많은 사람들, 또 그 학문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학자들까지 읽고 참조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작업이다. (...) 무엇보다도 대상 학문의 규범적이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용어들이 아닌 이상, 사용되는 용어들을 정의해야 한다. (...) 우리 논의의 핵심 범주들로 사용된 모든 용어들을 정의해야 한다. (...) 당신의 논문을 펼쳐 보는 누구든 그와 친숙해지도록 서둘러야 한다." (p.276-8)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모두 쓰라. 다만 최초의 원고를 쓸 때에만. 강한 주장이 여러분의 손을 사로잡았다가 여러분을 테마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면 괄호 안의 부분들, 이탈된 부분들을 없애고, 그것들을 주 또는 부록에 넣도록 하라. 논문은 여러분이 처음에 제기한 하나의 가설을 증명하려는 것이지, 여러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다. (...) 외로운 천재 놀이를 하지 마라." (p.286-7)


(어떤 언어로 논문을 쓸 것인가?)

"논문의 언어는 메타언어, 말하자면 다른 언어들에 대해서 말하는 언어이다. 어떤 정신 분석가가 정신병자에 대해 설명할 때 정신병자들처럼 표현할 수는 없다." (p.284) -> 논문은 예술과 다르다는 의미

"(반어가 아닌 절대적으로 지시적인 언어 또는 비유적인 언어를 쓰라) 지시적인 언어라는 말로 필자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사물들이, 그것들의 가장 일반적인 이름, 즉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언어이다." (p.287)

"어떤 용어를 처음 도입할 때에는 언제나 그 용어를 정의하라. 만약 그 용어를 정의할 수 없다면 그 용어를 피하도록 하라. 만약 그것이 여러분 논문의 주요 용어 중의 하나인데 정의를 내릴 수 없다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하라. 여러분은 논문(또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p.293)


(인용의 열가지 규칙)

"비평적 문헌의 텍스트들은, 그것의 권위와 함께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확인해 주는 경우에만 인용한다. (...) 실제적으로 인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1) 하나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그것에 대해 해석을 가하는 것, (2) 자신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텍스트를 인용하는 것이다. (...)" (p.298)

"해석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구절들은 상당히 방대하게 인용한다. (...) 비평적 문헌을 인용할 때 그 인용문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또는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권위 있게 확인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p.298-9)


(학문적 자부심)

"입을 열기 전에는 겸손하고 신중하도록 하라. 그러나 일단 입을 열었을 때에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라. (...) X라는 테마에 대해 논문을 쓴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누구도 그 테마에 대해 그토록 명료하고 완벽하게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이다." (p.350)


6. 최종적인 원고 작성

"첫머리를 시작한다는 것은, 여러 문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일관적인 문단이 유기적으로 완결되었으며, 논의의 다른 부분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말을 하면서 어느 순간에 이르러 잠깐 중단하고, <알았는가? 동의하는가? 좋다, 그렇다면 계속하기로 하자>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355)


원제는 Writing for Social Scientists (1986). 

나는 논문을 포함해서 어떤 글쓰기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때문에 석사 학위논문을 쓰면서 극심한 불안감에 빠질 수 밖에 없었는데,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중고로 구매한 하워드 베커의 <사회과학자의 글쓰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책을 처음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글쓰기나 방법론에 관한 책을 읽었고, 석사학위논문을 제 때 마칠 수 있었다.

현재 같은 책이 2018년 2월 <학자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을 통해서 하워드 베커라는 사회학자를 알게 되었고, 애초에 시리즈로 기획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학계의 술책>, <사회에 대해 말하기>로 이어지는 사회과학자를 위한 글쓰기 가이드 3부작을 모두 구매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90세의 나이로 그가 새로 낸 책 <Evidence>는 느낌상 이 3부작을 아우르는 저작으로 예상된다. (물론 이 책도 샀다.) 쭉 읽고 리뷰할 생각.

아래에 내게 특히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옮겨본다.


1-1. "만약 당신이 연구 초기부터 - 예를 들어 모든 자료들을 모으기 전부터 -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조만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할 수 있다. 자료없이 초고를 쓰면, 자신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더 명료해지며, 그래서 앞으로 수집해야 할 자료들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글쓰기를 통해서 연구설계 방법을 구체화시킬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먼저 연구를 하고 나서 "연구결과를 쓰라"는 좀더 일반적인 생각과 구별되는 것이다." (p.43)


1-2. "개요는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개요를 가지고 글을 시작하면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개요에 의존하여 시작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적어가면서, 가능한 한 빨리 아이디어를 토해내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 - 당신이 작업해야만 하는 미완의 부분은 당신이 방금 적어놓은 다양한 것들이다 - 을 발견할 것이다." (p.102)


 2-1. "해결 불가능한 것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당신은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당신이 생각하는 해결 방식은 무엇인지를, 왜 덜 완벽한 해결책을 선택했는지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설명할 수 있다...(중략)...연구에서 흥미로운 딜레마를 구체화시키지 않았다면,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제기되지도 않았을 것." (p.107)

2-2.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에 대해 글을 써라.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분석의 초점으로 삼아라...(중략)...당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독자에게 털어놓으려면, 당신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으며, 항상 올바른 방법을 알고 결함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p.111-112)


3-1. "만약 혼자 힘으로 과학적 또는 학문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상과학은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을 씀으로써 이해와 지식을 향상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구와 글에서 이런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는데도, 불가능한 것을 목표로 삼음으로써 스스로 실패를 자초해서는 안 된다." (p.213)

3-2.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인식하고, 지배적
인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요소를 찾아내고, 그 문제에 대한 좀더 중립적이고 과학적인 입장을 찾아 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중략)...진지한 학자라면 동일한 주제를 논의하는 경쟁적인 방식들을 일상적으로 점검해야만 한다. 지금 사용하는 언어로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문헌이 우리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이다...(중략)...문헌을 이용하라. 그러나 문헌이 당신을 이용하게 하지는 말라."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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