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생노조로부터 요청을 받아 오마이뉴스에 이런 글을 기고했다.(링크) 원래 잘 모르는 영역에 대해서는 기고를 꺼리는데 어찌저찌 공부하면서 쓰고나니 또 나름의 보람이 있는 듯.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많은 만큼 혹 해당 이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글 말고도 김래영 님의 글이나 다른 분들의 글도 함께 읽으면 좋겠다. 편집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지워진 부분이 있어 원고를 여기에 공유한다.


대학원생이 짊어진 실험실 현장의 위험

 

전준하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정책위원회 자문위원)


실험실 사고가 드러낸 문제

 

실험을 하지 않는 비이공계 전공으로 대학원을 진학하여 오랜 기간 실험실 생활을 해본 건 아니나 학부 시절 자발적으로, 또 졸업논문 작성을 위해 실험실을 드나들며 연구한 적이 있다. 다니기로 한 연구실에서 대학원생 선배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실험실에 들어선 순간 멈칫했던 기억이 난다. 흔히 실험실이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는데 현실은 너무 달랐던 것이다. 눈부실 만큼 순백색의 배경에 최신 장비와 깨끗한 기자재 대신 익숙해지지 않는 유기용매 냄새, 기존에 있던 낡은 것을 개조해 손이 많이 가는 장비, 여기저기 그을음 자국이 있는 기자재들이 나를 반겼다. 당시 사수 선배가 교수님의 은퇴가 얼마 안 남은 만큼 오래된 실험실이라며 머쓱해 했다.

 

모두 아무렇지 않게 자기 실험에 집중하고 있어 내색하기는 어려웠지만, 실험실에 출근할 때마다 약간의 불안감을 안고 다녀야 했다. 뭐 하나만 잘못되어도 큰 사고로 이어지겠구나 싶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게 까딱하면 터진다, 잘못하면 다친다는 둥 무서운 소리를 곁들이며 화학물질이나 실험장비를 다루는 법을 알려주는 사수 옆에서 얼어붙은 채 그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노트에 적었다. 다행히 별일 없이 내 실험실 생활은 끝났지만, 이후 크고 작은 실험실 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운이 있고 없는 문제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 안전이란 이상적으로는 위험이 전혀 없어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의미는 위험을 줄여 사고가 일어날 확률을 최소화하려는 노력과 과정에 더 가깝다. 안전한 사회라면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위험 요인을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예방 대책을 세워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발생한 사고에 대해 그 과정을 반복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고로 인해 피해를 본 사회 구성원은 단순히 운이 나쁘게 사고를 당한 사람이 아니라 사회가 놓친 피해자며, 따라서 사회로부터 재해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 산업안전보건법이나 연구실안전법 등 안전을 다루는 법률이 보상제도인 보험을 명시하는 이유다.

 

지난 10월 초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이하 대학원생노조)은 작년 말 경북대학교 화학실험실에서 발생한 폭발사고로 큰 화상을 입은 피해 대학원생의 아버지가 쓴 편지를 대독하며 국회 앞 농성을 시작했다. 해당 사고로 인해 총 4명의 학생연구원이 다친 한편, 중화상을 입은 학생은 현재(2020년 11월) 기준으로 여전히 힘겨운 치료를 버텨내고 있다. 사고는 무릇 화학물질을 다루는 실험실이라면 기업에서 일하는 연구원이든 대학에서 연구하는 대학원생이든 장소나 신분에 무관하게 수행하는 오래된 시료 폐기 업무 도중 발생했다. 회사연구원이었다면 산업재해보상보험(이하 산재보험)을 통해 돈 걱정 없이 치료를 받았겠지만, 피해자와 그 가족은 대학원생이라는 이유로 연구활동종사자 상해보험(이하 연구자보험)의 보상한도를 넘는 치료비를 두고 오랜 기간 경북대학교와 씨름을 이어가야 했다. 피해자 가족과 대학원생노조 등의 연대와 투쟁을 통해 대학으로부터 치료비 지급 약속을 받은 상태나, 피해 대학원생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려는 대학을 쉽게 믿을 수 없다. 또한 이 사고가 드러낸 제도상 허점과 함께 여전히 많은 대학원생이 안전 사각지대에 남아있다. 대학원생들이 국회로 간 첫 번째 이유다.

 

제도상 허점의 기원

 

"비슷한 실험을 하더라도 연구소에서 하면 산업재해보상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이공계 대학원생은 노동자가 아니라 학생이라는 이유로 관련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없다"

 

경북대 화학실험실 폭발사고가 드러낸 제도상 허점은 사실 굉장히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위 문장은 2004년 5월 KAIST 대학원총학생회(이하 원총) 산하 안전쟁취특별위원회가 그로부터 1년 전 있었던 풍동실험실 폭발사고로 대학원생 두 명이 각각 숨지고 두 다리를 잃은 후에도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기는커녕 학교 측이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자 내놓은 입장이다. 같은 시기 KAIST 원총은 실험실 안전 관련 법안 마련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진행, 대학이 속한 지역구 의원에게 전달하여 연구실안전법이 제정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연구실안전법을 통해 아무런 보상체계가 없던 과거보다 진일보할 수 있었으나, 위 인용문이 말하는 똑같은 연구를 함에도 대학원생만 산재보험이 아니라 보다 낮은 보상한도를 가진 연구자보험에 가입하고 있는 문제는 여전하다.

 

당시 연구실안전법 제정 과정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문제가 어디서 기원했는지 작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연구실안전법을 연구한 한 보고서에 따르면 2003년 과학기술부는 풍동실험실 폭발사고 직후 연구안전환경진흥법(가칭)을 준비했다. 현재 연구실안전법과 겹치는 내용이 많은 이 법안은 국회에 제출되기 전 "기존의 산업안전보건법 등과 중복되기 때문에 일부 기존 법령의 개정으로 입법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유로 입법 추진이 중단되었다. (박정임 외. 2012, p.26) 이후 앞서 언급한 대로 국회의원을 통해 현 연구실안전법이 발의되었는데, 이때 역시 기존 법령과의 중복 문제로 제정이 1년여 늦춰졌다. 흥미로운 것은 오히려 당시 노동부는 산업안전보건법을 보완하여 연구자들에 대한 안전조치와 보상을 하자고 주장한 한편 교육부와 과학기술부는 보험료 부담을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는 사실이다. 결국 법률 적용 범위 중복을 피하고자 부처 간 합의를 거쳐 연구실안전법과 연구자보험은 사실상 대학원생들에게만 적용되었다. 더불어 대학원생노조 신정욱 지부장이 지적했듯 연구실안전법은 현재 기준으로[각주:1] 적용대상인 대학원생을 연구자원으로 보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법이 되었다. 

 

연구실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연구실안전법을 따로 제정한 것은 이해하더라도, 재해보상 체계를 이원화하여 대학원생만 산재보험이 아닌 별도 연구자보험에 가입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넷을 통해 접할 수 있는 자료만으로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대학원생들은 이미 그간 수많은 경험을 통해 그 뒤에는 결국 대학원생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학원생이 각종 국가장학금을 받기 위해서는 4대 보험 가입자가 아니라고 증명해야 하는 것만 보더라도 분명히 인지할 수 있는 사실이다. 경북대 화학실험실 폭발사고의 피해자가 오래된 시료를 폐기했던 것처럼 실험실 및 연구실이, 더 나아가 대학이 제대로 굴러가는데 필요한 모든 곳에 대학원생이 있는데, 사회는 이들의 일을 노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제도상 허점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반복되는 사후약방문을 벗어나려면

 

다행히 대학원생노조가 농성을 시작한 날 학생연구원에 대한 특례로 연구실안전법에서 정의하는 연구활동종사자도 산재보험을 통해 재해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산재법 개정안이 접수되었다. 여당 주도로 발의된 법안이지만 국정감사에서 여야가 모두 개정안 취지에 공감한 만큼 조속히 처리되기를 기원한다. 대학원생노조 역시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계속해서 목소리를 낼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이렇게 사후약방문식 제도 개선을 반복하게 될지 씁쓸하기도 하다. 연구실안전법이 있기 전 앞서 언급한 KAIST 풍동실험실 폭발사고 말고도 1999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에서 세 명의 대학원생이 목숨을 잃은 폭발사고가 있었다. 2016년에는 한국화학연구원에서 학생연구생[각주:2] 한 명이 실험 중 손가락이 절단당하는 사고를 당했지만, 산재보험 가입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고, 소식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고서야 뒤늦게 연구자보험 보장이 확대되고 학생연구생에 한해 근로계약이 이뤄졌다. 요컨대 지금의 연구실안전법을 비롯한 실험실 안전을 다루는 제도는 누군가의 부상과 죽음 위에 세워진 것이다.

 

우리는 '김용균법'을 둘러싼 논의를 통해 산업 현장에서 위험이 외주화되어 가장 취약한 하청 또는 계약직 노동자에게 떠넘겨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목격한 바 있다. 그렇다면 연구 현장에서 위험은 누가 짊어지고 있는가. 2018년 연구실 사고 중 80% 이상(발생 건수 기준)이 대학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과기정통부 외. 2019, p.145) 대학원생이 처한 현실에 주목하고 대학원생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다. 




참고문헌

 

박정임 외. 2012. “연구실 안전환경 조성에 관한 법률 해설집 및 고시 정비 방안 연구”, 한국연구재단 연구보고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외. 2019. "2019 연구실 안전관리 실태조사"

 

  1. 연구실안전법 제1조에 해당하는 목적은 2020년 6월 "연구실사고로 인한 피해를 적절하게 보상하여 연구활동종사자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한다는 문구로 개정되었다. 법의 제정 취지를 고려하면 환영할 일이나, 제정 후 15년이나 걸릴 일이었는지는 의문이 든다. [본문으로]
  2. 학생연구생은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연구하며 학위 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확실히 회사를 다니면서 글을 기고하는 일이 줄었다. 2020년에는 꼭 기고가 아니더라도 글을 더 많이 써야 할텐데...

대학원 졸업할 때즈음부터 계속 써야지 써야지 했던 소재와 주제를 2019년 하반기에 와서야 <철창 속 일차원적 연구자>라는 제목으로 과학뒤켠에 기고했다. 아래 과학뒤켠 공식 블로그에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내 마음에 가장 드는 문단 하나만 인용하자면..

"오늘날의 연구자 자아정체성은 [인정 대신] 성과 지표로 구성된다. 연구자의 이력서에는 연구 주제나 중요성 대신 끝없이 긴 논문 출판 목록이 나열되어 있다. 동시에 학계에선 제대로 된 동료평가 문화가 사라져간다. 굳이 바쁜 시간 내어 다른 연구자가 무엇을 연구했는지, 연구 과정과 결과는 타당한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두 명 남짓한 익명의 평가자가 통과시켰으니 논문으로 출판되었겠지 싶다. SCI와 같은 인용색인에 등재된 학술지면 더더욱 믿을만하다. 연구자들은 평가를 아웃소싱 했고, 그 자리는 인용색인시스템과 성과지표가 채워왔다. 이것 없이 학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즉 학계는 더 높은 성과지표가 인정을 대체한 금융시스템이자 경쟁사회가 된 것이다."

더 읽기: https://behindsciences.kaist.ac.kr/2019/12/23/%EC%B2%A0%EC%B0%BD-%EC%86%8D-%EC%9D%BC%EC%B0%A8%EC%9B%90%EC%A0%81-%EC%97%B0%EA%B5%AC%EC%9E%90/

p.s. 이름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것도 같아 SNS에는 따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만화 일부 사용을 허락해주신 신인철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포닭 블루스 책도 구매해서 너무 재밌게 봤고 이후 연재 중이신 조교수 블루스 역시 너무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노트북 파일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기고문. 나 자신이 '과학기술'을 하지 않는 '과학기술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던 시절에 쓴 글이다. 뭐 이제는 과학기술인이라는 명칭(?)에도 더이상 미련이 없다. 

AAAS에서 경험한 각종 행사와 우리나라에서의 그것을 비교하기 위해 참석했던 <대한민국 과학발전 대토론회>에서 있었던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일동' 이름으로 진행된 선언식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하하, 지금 보니 별일 아닌데. 더한 일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데. 

아, 그 '대토론회'에는 DGIST 총장 시절 미국과의 협력연구센터 설립 때 이면계약 체결한 것으로 드러나 감사받고 있는 신성철 총장도 있었다. (기사 링크) 열심히 대본 읽으시면서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운운했던 것으로 기억. 허허.    

---

원글 링크는 여기에: http://times.kaist.ac.kr/news/articleView.html?idxno=3337

올해 초 5개월동안 난 운 좋게도 워싱턴 DC에 있는 AAAS 본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었다. AAAS는 사이언스지 발행 외로도 미국 내 과학문화 및 과학 애드보커시 활동의 본산이며, 과학기술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이 글은 거기서 일하면서 느낀 점을 우리 학교 학우들뿐만 아니라 교수님들, 또 전 학교 구성원들과 공유하기 위해 쓰여졌다.


내가 일하던 부서는 OISA(Office of International and Security Affairs)로, 잘못 해석하면 국제안보 업무를 보는 곳으로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첫째로 국제과학외교 업무를 보고, 둘째로 과학과 안보의 교점을 연구를 하는 곳이다. 우리 부서 말고도 AAAS의 다른 부서들은 R&D 예산과 정책을 분석하고, 대중의 과학 참여방법을 물색하며, 정부와 의회에 과학계 이슈 및 의견을 전달하는 일 등을 맡고 있다. 물론 사이언스지 발행부서도 있다. AAAS는 “공익을 위해서 과학과 공학, 혁신을 전세계적으로 발전(진흥)”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고, 이를 이루기 위한 실천이 바로 위에 언급한 AAAS 내 여러 부서들이 하는 일인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우면서도 당연한 점을 하나 짚고 싶다. 바로 AAAS가 과학발전을 목표로 삼는데, 과학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흔히 우리가 쓰는 표현 내에서 AAAS가 하는 활동들을 과학이라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AAAS에서 일하는 직원들은-대부분 이학공학 학위를 갖고 있긴 하다-앞서 언급한 AAAS의 목표를 위해 일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과학을 하지 않아도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사실을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잊고 사는 것 같다.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네바 부시는 미 국립과학재단(NSF)를 설립하는 데에 있어 지대한 공을 세웠다. 지금까지도 많은 과학자들이 그가 70년 전 작성한 <과학, 그 끝없는 프런티어> 보고서를 인용해서 연구개발투자의 필요성을 역설하곤 한다. 미 국립과학재단(NSF) 설립 후 미국의 과학기술은 크게 발전하여 기초과학, 응용과학을 막론하고 미국을 언급하지 않고는 현대과학이 어떻게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없는 데에 이르렀다. 그의 업적 역시 과학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을 쉽게 부인할 수는 없다.


지난 10월 23일,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일동은 대전에서 열린 세계과학정상회의의 부대행사였던 대한민국 과학발전 대토론회에서 <과학기술 혁신과 미래창조를 위한 우리의 다짐>이라는 선언문을 통해 “과학기술인들은 창의와 성실을 바탕으로 연구개발에 정진하여 국민행복에 이바지 할 것을 다짐”하고, “국가번영의 원동력은 강력한 리더십에 있음을 주목하고, 과학적, 합리적 국정운영을 펼치도록 적극 협조하고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보았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사전 동의는커녕 듣도 보도 못한 선언문에 한 쪽 손을 들고 같이 다짐하는 모습을. 거부의 의미로 선언문 낭독이 끝날 때까지 앉아있으면서, 한때 녹색성장 인재의 요람이었던, 그리고 지금은 창조경제의 전진기지인 우리 학교를 생각했다. 한번 되돌아보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학기술인으로 규정하고, 우리의 역할을 과학기술로 규정된 범위 내에서 공부와 연구를 하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정체와 역할을 너무나 비좁게 인식하고 있다. 그건 우리에게도, 과학발전에도,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 날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아닐 듯 하다. 그리고 감히 우리 학교 구성원들 역시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이 아니었으면 한다.

대학원생을 통한 대학원 제도 개혁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전준하

1.     서론: 대학원생이 말하는 대학원 제도

현대 지식기반사회에서 대학원이라는 제도의 중요성 및 필요성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여기에 필요한 대학교원을 공급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던 초기 (1960~70년대) 대학원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원은 글로벌 경제 시대의 국가경쟁력을 책임질 고급인재를 양성하고 사회 발전을 위해 필요한 수준 높은 연구를 수행하는 필수불가결한 기관이자 제도가 되었다. 특히 1971KAIST가 설립되어 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산업화에 효과적으로 기여해 국내 이공계 연구중심대학 선도모델로 자리잡았고, 정부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연구중심대학내지는 대학원중심대학육성을 천명하며 관련 정책을 만들고 시행했다. 여기에 힘입어 많은 대학들이 대학원을 설치 및 운영하기 시작해 대학원()의 규모는 지난 수십년간 괄목할만한 양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혁신만이 살 길이라는 현대 사회에서의 격언에 따라 그 주체가 될 고급인재를 육성하는 대학원의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앞서 장황하게 늘어놓은 문장들은 대학원 내지는 연구중심대학과 관련한 담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최근 2010년대 들어 대학원 제도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형성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학원생이 있다. 기존 담론이 고급인력양성과 연구역량 제고라는 두 축을 토대로 끝없이 대학원의 중요성을 역설해왔다면, 고급인력당사자인 대학원생들은 대학원이라는 제도를 직접 체험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대학원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 그 기능인 교육과 연구가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증언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20년 가까이 이러한 대학원생들의 목소리들은 쌓이고 쌓여 지금에 이르러서야 감히 거스를 수 없는 당위에 기반한 연구중심대학 육성담론에 제동을 걸고 대학원 제도를 대대적으로 검토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오늘 대학원생들이 직접 국회에서 대학원 제도 개선을 위한 간담회를 여는 것과 같이 대학원생이 말하는 대학원 제도담론 형성은 그간 제도의 대상이었던 대학원생들이 제도의 주체로 거듭난다는 결코 작지 않은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대학원생은 대학원 제도에 있어 단순한 당사자가 아니다. 대학원 사회, 더 크게는 학계에 막 발을 디딘 그들은 일종의 사회취약계층과 다를 바 없다. 대학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졸업하기까지, 심한 경우 졸업 이후까지도 지도교수의 동의 내지는 허락, 지원과 도움 하에 지도교수를 통과해야만 원하는 것을 얻거나 이룰 수 있다. 다시 말해, 대학원생은 지도교수라는 의무통과점(obligatory passage point)’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동시에 대학원생은 대학원 사회와 학계가 지속하여 굴러갈 수 있도록 기능하는 메인테이너(maintainer)’이기도 하다. 조교와 학회 간사, 학생연구원 등은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인데, 이들이 없다면 대학원과 연구시스템, 학계 전체는 작동을 멈추고 말 것이다. 이렇게 가장 아래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대학원생은 대학원 제도, 국내연구시스템, 학계의 구조적 모순에 그 누구보다도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이는 대학원생들이 겪는 문제와 이들이 말하는 대학원을 분석함으로써 대학원 제도를 넘어 국내 연구시스템과 학계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파헤치고 그 해결방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대학원생이 말하는 대학원 제도에 주목해야하는 이유다.

 

2.     대학원생을 통한 대학원 제도 문제 이해

앞서 대학원생 연구환경실태 개괄 보고에서도 충분히 언급이 되었으나, 대학원생은 그간 여러 경로를 통해 대학원 제도의 다양한 문제를 지적해왔다. 동시에 이에 대한 유형 정리 노력 역시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가장 최근에 실시된 실태조사 중 하나인 한국연구재단이 발표한 <청년과학자의 연구 및 학업 관련 애로요인 분석>(2018) 보고서는 청년과학자의 불편한 연구실 문화 유형을 열정페이형’, ‘워라밸파괴형’, ‘무관심/방임형’, ‘교수재량 남용(불통/독재)’, ‘인격무시/강압형’, ‘연구윤리 위반형’, ‘과도한 잡무 요구형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2300여명 중 10%를 넘는 청년과학자가 이 중 하나 이상의 유형과 관련한 애로사항을 호소했다고 한다. 물론 대학원생이 처한 문제를 계속해서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고 다시 유형화 하는 등의 노력이 무의미하지는 않겠으나, 실태조사나 몇몇 사례에 대한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대학원생의 목소리가 충분히 쌓인 만큼, 중장기적인 개혁을 고려하여 이를 정리한 기초 문서에 기반하여 논의를 진전시킬 것을 제안한다. 바로 대학원생 권리장전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원생 권리장전은 2014KAIST 대학원 총학생회가 그간 수행해 온 연구환경 실태조사를 바탕 삼아 대학본부와 함께 선언한 것이 그 시초다. 이어 같은 해에 대통령직속청년위원회와 전국 13개 대학원 총학생회 역시 전국 단위의 연구환경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대학원생 권리장전 표준()을 마련한 바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전국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연구환경 실태조사를 수행한 후 그 결과보고서에 대학원생 인권장전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는데, 해당 가이드라인에는 대학원생의 권리 유형 각각에 대해권리 침해시 조사 과정부터대학원생 대표기구 기능 명시등 그 세부 조항을 포괄적으로 명시하고 있으며, 헌법과 국제인권규범이라는 분명한 기반을 마련하여 말그대로 가이드라인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실제로 교육부는 해당 가이드라인을 바탕으로 각 대학원에 권리장전 선언 여부를 확인하고 채택을 독려하고 있으며, 그 결과 현재 적지 않은 대학원에서 형식적으로나마 대학원생 권리장전을 채택하고 있다.

한편, 권리장전은 말 그대로 대학원생이 보장받아야 할 권리를 나열하여 대학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이를 함께 존중하고 지키자고 하는 구두 약속 내지는 상징적 선언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실제 명시된 권리를 침해하더라도 아무도 법적 조치 등의 책임을 지지 않아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권리가 존중되어야 하는지를 모두에게 비교적 명백한 언어로 인지시킬 수 있다는 점과 자율적인 규범이기에 오히려 확장성을 지니며 대학원 사회 구성원 간 지속적인 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1]에 있어 대학원생을 통한 대학원 제도의 중장기적 개혁 이정표로 삼기엔 매우 적합한 기초 문서가 바로 대학원생 권리장전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학원 제도의 문제라고 뭉뚱그렸던 여러 사례들을 대학원생 권리라는 개념하에 이해하고 대학원 제도 개혁을 대학원생 권리 보호 및 증진과 같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3.     대학원생 권리 확장: 연구윤리 및 연구비 운영관리 문제

기존 대학원생을 통한 대학원 제도 문제 제기 방식은 누가 봐도 뻔히 문제인연구환경 실태조사를 통한 현황을 정리하고 눈에 띄게 심각한일부 사례가 언론 보도를 통해 주목을 받는 형태로 이루어져왔다. 하지만 대학원생 권리장전을 기준으로 삼으면서도 대학원생 권리 개념의 확장을 염두에 둔다면 보다 다양한 대학원 제도의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 여기서는 올해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의 가짜 내지는 부실 학술대회에 대한 심층취재기사 보도에 따른 연구윤리 이슈와 잊을만하면 발생하는 연구비 횡령사건과 관련한 연구비 운영관리 이슈를 어떻게 대학원생 권리 개념의 확장을 통해 다룰 수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1)    와셋 사태 등의 연구윤리 이슈: 학업연구권 중 적절한 지도를 받을 권리의 확장

2)    연구비 횡령 등의 연구비 운영관리 이슈: 학업연구권 중 연구 지원 인적자원 및 시설 이용할 권리의 확장

 

4.     제언[2]: 대학원생 권리 실현을 통한 대학원 제도 개선 방안

1)    대학원 등록금 및 장학금 책정 합리화

대학원 등록금은 정부에 의해 인상이 적극적으로 제재받고 있는 학부와 다르게 증가하는 추세인 반면 지급하는 장학금은 줄어드는 추세로, 이는 곧 대학원생들에 대한 경제적 처우가 악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계열별로 살펴볼 경우 공학과 의학을 제외하고 2016년에 전년보다 큰 폭으로 인상되었으나, 평균적으로 인상률이 1%를 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학금은 상대적으로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어 (2%) 대학원생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제적 어려움은 꽤 클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국대학원총학생회협의회 등에서 대학이 학부 등록금 인상에 제재를 받고 입학금 역시 폐지되면서 재정 확보의 우회로로 대학원생 등록금 및 입학금 인상을 해왔다는 주장에도 설득력이 있음을 의미한다. 해당 주장에 따른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아래와 같은 대학원 등록금 결정 과정 및 납부 대상 합리화 방안을 도입 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로, 대학원 설립 대학의 경우 등록금심의위원회에 대학원 학생대표 등 대학원 이해관계자의 참석을 의무화해야한다. 현재 교육부령의 『대학 등록금에 관한 규칙』은 등록금 인상율을 학부와 대학원을 구분하여 계산하라는 조항 외로 대학원에 대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등록금심의위원회에서 정하고 있는 학생 위원이 학부생으로만 선임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해당 규칙을 개정하여 대학원이 설치된 대학의 경우 등록금심의위원회를 구성하는 위원에 학부생과 대학원생 각각 따로 정하는 최소 인원 이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필요에 따라 대학원 규모가 큰 대학의 경우 대학원 별도의 등록금심의위원회를 두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각 대학이 학부와 대학원 각각에 대해 등록금 책정 기준을 명확히 하도록 하고, 이에 대해 등록금심의위원회를 통해 공개적으로 논의하도록 해야 한다.

특히 대학원생의 등록금 책정 시에는 적지 않은 대학원생이 국가 혹은 산업체 연구개발과제에 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대학원 생이 연구과제에 참여할 시 연구개발에 소요되는 인력지원비, 연구지원비, 성과활용지원비는 간접비로 책정되어 이미 연구과제 발주기관으로부터 해당 대학에 지급되므로 대학이 해당 대학원생에게 같은 명목으로 등록금을 청구 시 이중청구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 등록금을 책정해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대학원생들의 장학금 실 수혜율을 제고하기 위해 관련 정보공시 규정을 개정해야 한다. 현재 『교육관련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특례법』과 그 시행령을 통해 각 대학은 등록금 외로도 장학금 수혜 현황을 공개하도록 되어 있으며, 다행히도 학부와 대학원 각각에 대해 산정이 되고 있다. 그 중 교외 장학금은 그 출처에 따라 구분되어 공시되고 있고, 교내 장학금은 명목에 따라 구분되어 공시되고 있다. 해당 명목은 성적우수장학금, 저소득층장학금, 근로장학금, 교직원장학금, 기타장학금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조교 등 근로에 대한 대가성 장학금에 대한 정보가 누락되어 있다는 문제가 존재한다. 대다수의 대학이 대학원생 조교를 장학제도를 통해 임용하면서 성적 우수 혹은 저소득층 학생 우선 등의 조건을 두고 있어 조교로 근무하며 받는 장학금이 대학에 따라 성적우수장학금, 저소득측장학금, 근로장학금, 혹은 기타장학금으로 산정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대학원생이 조교로 근무하여 수령하는 대가성 임금을 장학금으로 인정해야하는지에 대한 여부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조교 등 일정 형태의 근로 의무가 부과되는 장학금과 그렇지 않은 장학금을 구분하여 공시할 필요가 있다. , 대학정보공시 시 장학금 수혜현황에 현재와 같은 명목상 구분 외로 조교 등 근로 대가성 장학금 금액을 따로 공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학원생을 비롯한 일반 국민의 각 대학의 대가성 및 무대가성 장학금 수혜 현황에 대한 알 권리를 충족시켜야 한다.

2)    대학원생 재정지원 방식 합리화 및 다양화

대학원생 권리강화를 위해 필요한 대학원생 재정지원 시 고려사항에 대해 몇 가지 원칙적인 정책 방향을 제안한다. 첫 번째로, 조교 등 각종 대학원생 재정지원 방식에 있어 그 금액을 등록금뿐 만 아니라 최소생활비를 포함하여 책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대학원생 조교 제도와 비교할만한 해외 선진국 대학들의 제도를 조사 및 분석해보면, 둘 사이에 지원 금액 책정 원칙상의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국내 대학원의 경우 대부분의 장학금이 등록금과 연동하여 등록금(혹은 수업료)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반면, 해외 대학원에서는 장학금(stipend) 책정 시 등록금 외로도 대학원생의 최소 생활비를 고려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 대학원 역시 조교 등 각종 대학원생 재정지원 방식에 있어 그 금액을 등록금뿐만 아니라 대학원생이 필요로 하는 최소생활비를 고려하여 이를 포함한 금액으로 책정한다면 앞서 살펴본 국내 대학원생의 열악한 경제적 여건을 크게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며, 더불어 대학원생의 학업연구권 역시 일정 정도 보장될 것으로 기대된다.

두 번째로, 대학원생의 소속 대학/학과/연구실 및 지도교수 종속성을 완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재정지원 방식을 개선하고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영국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해외 대학원에서 Fellowship 제도를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글로벌박사펠로우십 제도가 시행중이다. Fellowship 제도는 대학원생이 재정 지원을 해당 대학이나 학과, 연구실 및 지도교수를 통해서가 아닌 Fellowship을 운영하는 재단 등을 통해 받기 때문에 경제권을 볼모로 한 부당 업무 지시 등의 각종 권력형/위계형 권리 침해로부터 원천적으로 자유롭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글로벌박사펠로우십 제도의 규모를 보다 확대할 필요가 있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재단이 아닌 여러 장학재단에도 Fellowship 형태의 재정지원 방식을 홍보하고 지원할 필요가 있다.

세 번째로, 이공계 등 연구실별 다수 연구과제 수행 시 학생인건비 기관별 통합관리 제도(일명 기관별 풀링제)를 적극 도입하고 더 나아가 연구비 집행과 관련한 행정업무를 연구인력(교수와 대학원생 포함) 아닌 전문 연구지원인력이 맡도록 할 필요가 있다. 기존 연구책임자별 인건비 풀링제는 개별 교수의 연구과제 수주가 불확실할 경우 해당 교수 아래에서 학생연구원으로 일하는 대학원생들의 인건비에 불안정성이 발생한다는 지적을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지급 여부 및 규모가 연구책임자(주로 지도교수)에 의해 결정되어 대학원생의 지도교수 종속성을 강화시키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었다. 이에 따라 대학원생이 연구과제참여에 따른 인건비를 안정적으로 합당한 금액을 받을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연구비 집행 투명성 및 효율성 제고를 위해 기관별 풀링제 방안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이는 현재 4개 과학기술원에서 도입중인 Stipend 제도를 통해 부분적으로 현실화 되었는데, 차후 과학기술원 외 타 대학으로의 확장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3)    대학원생 알 권리 및 참여권 개선, 권리장전 실효성 제고

더불어 대부분이 사립인 국내 고등교육 체계와 더불어 다른 교육 및 연구기관 과 달리 대학원은 학문 생태계의 중요한 일부로서 보다 분명하게 자치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부 차원의 법률 내지는 규정 외로도 각 대학원에서 자율적으로 대학원생 권리강화를 위한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다만, 단순히 대학 자치라는 명목으로 제도적 개입을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대학 자치를 위한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관련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관련 노력으로 2017년 말 기존 사립대에만 설치가 의무였던 학생대표가 당연직으로 참석하는 대학 평의원회가 국·공립대에도 설치되도록 법률 개정안이 통과된 것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최근 2018 4월에는 총신대 총장의 여러 비리를 두고 교육부가 실태조사를 벌여 해당 대학 이사회에 파면을 요구한 것 역시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대학원생의 학내 의사결정 및 거버넌스 참여권을 보장하고 확대하여 교수-대학원생의 도제식 종속적 관계를 집단적인 수준에서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KAIST 인권벨트 내지는 대학원위원회 사례를 참고하여 보직교수와 대학원생 대표 간에 수시로 대학원 현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도록 할 경우 학내 갈등이 불필요하게 확산되어 대학원 분위기를 저해하는 등의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앞서 등록금심의위원회나 정보 공시 등을 통한 등록금 및 장학금 책정 과정에 대한 대학원생의 알 권리 및 참여권을 언급한 바 있으나, 대학원생의 알 권리 및 참여권은 등록금심의위원회를 넘어 인권 관련 위원회(인권센터 운영위원회 등), 중장기발전계획 수립위원회, 평의원회 등으로 광범위 하게 보장될 필요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대학원생 연구환경 및 인권 실태조사를 실시하거나 연구 환경 및 인권/권리 관련 지표를 설정하여 대학정보공시 항목에 반영하여 예비 대학원생들이 해당 사항을 고려하여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하고 대학원 이 학생 유치를 위해서 연구 및 인권환경을 자율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2014년 대통령직속청년위원회,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의 노력을 통해 적지 않은 대학들이 대학원생 권리장전을 제정 및 채택하였으나, 여전히 제정 및 채택을 하고 있지 않는 대학들이 많고, 했더라도 권리장전 제정 및 채택 여부와 권리장전에 명시된 권리에 대한 인지도가 떨어져 강제성을 부과하고 있지 않다는 문제의식을 제외하고서라도 권리장전의 실효성을 제고할 방안이 필요하다. 우선적으로 현재와 같이 반년 주기로 교육부에서 계속하여 권리장전 채택 및 제정 여부를 조사하여 이에 대한 결과 공개가 필요하다. 또한 대학원생 권리장전의 실효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학내 구성원의 권리장전에 적힌 각종 권리 항목에 대한 인지 및 이해가 필수적이다. 따라서 권리장전을 채택 및 제정한 대학원은 대학 공식 홈페이지 등을 통해 권리장전 전문을 항시 공개하여 해당 내용에 대한 논의가 대학 내에서 활발히 이뤄지도록 홍보하여야 하며, 신입생 입학식 및 신임교원 임용식, 재학생 및 교직원 인권교육 등의 자리를 통해 권리장전의 내용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대학원생과 교수가 공동 선언을 한다거나 개별적인 권리장전 준수 캠페인을 진행하는 등의 퍼포먼스 또한 대학 내 구성원 상호간의 권리와 의무를 확인하 고 증진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1] 대학원생 권리장전의 의의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서울대학교 인권가이드라인 제정에 힘쓰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표한 대학원생 인권장전 제작에도 참여한 이우창 선생의 글을 참고하라. http://begray.tistory.com/347 (대학원생 권리장전: 역사, 의의, 전략과 쟁점. 2016.3.10.)

[2] 본 발제문의 제언 부분은 발제자가 참여한 교육부 정책연구용역과제의 최종보고서 <대학원생 권리강화 방안 연구> (김소영 외, 2018)에서 상당 부분 가져왔음을 밝힌다.


안녕하십니까,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전준하입니다. 사실 제 지도교수님께서 오늘 제 지정토론 대상인 과학기술인의 인권분과에 집필위원으로 계시는데, 원래도 허심탄회하게 생각을 주고받는 관계이기도 하고, 또 오늘 자리에 계시지 않기도 하니 어느 때보다 솔직한 토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서 세 분과는 한림원에서 제게 요청했던 토론 주제인 과학이 인권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내지는 과학이 인권침해에 쓰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안에 알맞은 발표를 해주셨습니다. 한편, 네번째 분과인 과학기술인의 인권은 어떻게 보면 혼자 주제가 조금 달라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홍성욱 교수님께서도 왜 젊은 과학기술인인가?”라는 질문으로 발표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오픈포럼에 맞추어 질문을 좀더 명확히 하자면 왜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인가?”가 될 텐데, 이 주제가 단순히 요즘 언론을 통해 워낙 회자되는 이슈라는 이유로 본 프로젝트에 포함된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과학이 인권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을 물어야 할까요?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인권향상에 기여하는 과학의 출발점은 바로 그 과학을 하는 과학기술인의 인권이 존중받고 보호받는 환경일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인권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만, 인권을 존중받은 경험과 보호받는 환경이 그 사람의 인권의식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결론을 내린 선행연구가 다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이 인권향상에 기여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에 앞서 과학기술인의 인권은 꼭 검토해야만 하는 조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발표를 통해 보셨듯 젊은 과학기술인이 몸담고 있는 연구환경은 인권친화적이지 않습니다. 발표자료에서도 언급이 된 바 있는 올해 한국연구재단에서 발표한 <청년과학자의 연구 및 학업 관련 애로요인 분석> 보고서는 청년과학자의 불편한 연구실 문화 유형을 열정페이형’, ‘워라밸파괴형’, ‘무관심/방임형’, ‘교수재량 남용(불통/독재)’, ‘인격무시/강압형’, ‘연구윤리 위반형’, ‘과도한 잡무 요구형등으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2300여명 중 10%를 넘는 청년과학자가 이 중 하나 이상의 유형과 관련한 애로사항을 호소했고, 각 유형별 응답자 수는 전체 대비 앞의 네 유형에서 2% 정도, 뒤의 세 유형에서 1% 정도라고 합니다.

물론 인권을 논하는 이 자리에 계시는 훌륭한 교수 및 연구책임자 분들께서는 그러지 않겠지만, 제 관찰 결과, 오늘 발표자료나 제가 언급한 것과 같은 젊은 과학기술인이 처한 인권환경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와 그 사례들을 두고 일부 대학본부나 교수들이 일관되게 보인 반응이 있습니다. 바로난 아니야내지는 내 주변에 그런 경우 못 봤다고 하는 부류와 극소수 사례로 일반화하지 말라고 항변하는 부류입니다. 개인적으로 전자의 경우 남궁석 교수님께서 BRIC에 쓰신 칼럼 제목과 칼럼서 다룬 사례만으로도 별 의미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반응이라는 것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는 칼럼인데, 글은 직접 물어본 결과에 따르면 나오지 말아야 할 오줌 성분이 분명 수영장 물에서 검출이 된다는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한편 인권침해를 당한 젊은 과학기술인이 많지 않은데 이러한 일부 소수 사례를 일반화하지 말라는 반응은 보다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교수에 의한 대학원생의 인권침해 사례가 많이 알려져서인지 일부 교수들은 더 나아가 교수 전체를 잠재적 가해자 내지는 범죄자 취급하지 말라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과학기술인의 인권 증진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현실을 소수 인권침해 사례와 다수 문제없는 나머지로 구분하여 그 소수만을 문제 삼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다양한 인권침해 유형이 상존하고 같은 유형 안에서도 사람마다 느끼고 의식하는 바가 다른 현실을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현실은 최악의 인권환경부터 (아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는) 최고의 인권환경까지 하나의 연속적인 스펙트럼 위에 그려진 분포도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이 분포도를 어떻게 좋은 쪽으로 계속해서 이동시킬 것인가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홍성욱 교수님께서 발표하신 내용 문제의식과 개선 방향 및 제언 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에 대해 최근 부쩍 늘어난 관심이 현황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이에 기반한 보다 실효성 있는 정책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몇가지 보완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로, 교수님께서는 왜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인가?’라는 질문에 대학원생 인구 증가에 따른 신진 연구인력 공급 과잉을 지적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셨는데, 물론 구조적인 수요-공급 불균형 상태에 놓인 고급과학기술인력시장 역시 빼 놓아선 안되는 요인이겠으나 다른 요인들에 대한 분석도 추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당장 제 머릿속에 두가지 요인이 더 떠오릅니다. 하나는 연구책임자는 과제를 수주해와 연구비를 조달하고 연구실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고 그 아래에 있는 젊은 과학기술인들은 그 과제를 수행하는데 급급해하고 가르침을 받기보다 관리되고 있는 연구실의 현실입니다. 오늘날의 교수는 중소기업 사장과 다를 바 없다라는 말을 적잖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연구실에 팽배하고 있는 어떻게든 더 많은 논문과 특허를 내야한다는 성과주의입니다. [JJ1]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에 대한 배경을 분석할 때 이러한 연구시스템의 문제, 물론 이것들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만, 또 이로 인한 연구실 내 문화적인 요인도 함께 그 범위에 넣어야 보다 정확한 현실 인식과 보다 구조적인 개선 방향 및 제언을 도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오늘 발표 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 과학기술인 내지는 대학원생의 인권현황에 대한 분석은 누가 봐도 문제인실태조사 결과와 몇몇 눈에 띄는 사례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선방향과 제언으로 사실 모두가 아는 당연한 내용을 되풀이하곤 합니다. “정당한 정신적/물질적 보상과 인정,” “연구지원의 실질적 확대,” “연구안전 확보,” “인권거버넌스 고도화등처럼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의미가 없다는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제 이보다 한발짝 더 나아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젊은 과학기술인이 가지는 역할과 기능, 그들이 기성 과학기술인(교수 등 연구책임자 급의 시니어 과학기술인)과 맺는 관계와 그 관계에서의 상대적 지위를 살펴봄으로서 그들의 인권과 권리가 침해당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젊은 과학기술인과 그들의 인권 및 권리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하자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미 다른 곳에서 글을 통해 이 이론화를 시도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는 짧게 결론만 말하자면, 첫째, 오늘날 젊은 과학기술인 내지는 대학원생은 대학과 학문 및 연구생태계가 유지되고 지속되도록 기능하는 메인테이너(maintainer)’라는 것, 둘째, 이들에게 있어 연구책임자 내지는 교수는 곧 의무통과점(obligatory passage point)’라는 것입니다. 특히 저는 후자가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 개선이 요원한 이유 중 하나로 보고 있는데, 이 분석에 따르면 현재 연구책임자 및 교수에게 집중적으로 제도화된 권력을 분산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야 보다 근본적으로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과학기술인이라는 범주를 보다 세분화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발표한 자료 중 경제권 항목에서 연구재단의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같은 청년과학자 사이에서도 높은 수준의 소득 불평등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속 대학, 학과 내지는 전공, 연차 등에 따른 차이를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득을 예로 들었지만 연구환경과 문화도 그런 요소에 따라 모두 다를 것입니다. 이들을 모두 젊은 과학기술인으로 묶어 공통점을 찾는 것도 하나의 숙제겠지만, 차차 이들간의 차이점을 분석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확장해가야 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제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위기론기반 과학기술인력정책에 대한 비평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전준하

대학원생이라는 사회적 지위 특성상 주로 청중 자리에 앉아있기 마련이지만, 이런 행사에 참석하게 되면 주최 측에서 배부하는 자료에 나오는 단어들을 유심히 살펴보곤 합니다. 오늘은 어쩌다 지도교수님 인맥을 통해 창의재단 이사장님, 교수님, 회사 대표님 사이에 끼어 패널토론자가 되긴 했는데,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여성과총에서 제시한 단어들을 뜯어보며 토론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포럼의 주제는 디지털변환시대: 벼랑 끝 대학교육, 미로 속 과학인재 위기탈출하기이며, 기조강연으로 민동준 연세대 부총장님께서 새로운 과거와 오래된 미래를 위하여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으로 발표해 주셨습니다. 제목이 다소 철학적인데, 제멋대로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모로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대학은 위기에 처해있고, 위기의 본질과 그 해법 모두 교육에 있으니 새로운 교육을 모색해야 한다.’ 이어서 여성과총에서는 제게 급변하는 세상, 융합인재로 살아가기라는 제목 아래 우리나라 과학기술인력정책에 대한 청년의 시각을 다뤄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제 눈에 띈 단어들을 한번 읊어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전환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만) 변환, 급변, 벼랑, 미로, 위기. 다시, 전환, 급변, 벼랑, 미로, 위기, 그리고 과학기술인력정책.

이 단어들이 함께 쓰인 것과 그것이 너무나도 익숙하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과학기술인력정책은 이른바 위기론에 큰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지요. ‘전 산업에서 디지털전환이 일어나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 속에서 우리나라는 발빠르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될 벼랑 끝 위기에 처해있다.’ 20년이 넘도록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되어 왔고, 작금의 ‘4차 산업혁명광풍 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에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절벽, 이공계 기피현상과 두뇌유출 등의 뉴스는 위기론에 불을 더욱 지피고, 결국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과학기술인력육성에 더욱 힘을 써야한다는 당위로 이어집니다. 글로벌 경제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특정 산업에서의 이들의 합집합은 결국 과학기술 전분야지요 국가 경쟁력을 갖추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해당 산업에서의 우수인재를 육성하여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과학기술인력정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4차 산업혁명 선도 SW인재육성: 실무인재 4만명, 핵심인재 4천명’ (4차 산업혁명 시대 혁신성장을 통한 소프트웨어 일자리 창출 전략. 관계부처 합동, 2018.9.11.)

혁신성장 핵심인재 1만명을 신규로 육성’ (혁신인재 양성을 위한 5개년 로드맵 만든다: ‘혁신인재 양성 TF’ 발족.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018.9.6.)

미래수요 대응 전문인력 확충 : 청년고급인재, 실무인력 중심 5만명 양성’ (데이터 산업 활성화 전략: I-KOREA 4.0 데이터 분야 계획, I-DATA+. 관계부처 합동, 2018.6.)

위 내용은 모두 올해 발표된 정책입니다. 사실 이런 정책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돌고 돕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내용이지요. 중앙정부 예시만 들었지만 비슷한 정책을 지방자치단체별로, 산업군별로, 대학별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모두 같은 위기론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5년 전 정부는 다음과 같은 정책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소프트웨어 인력 22만 대군 양병” (최문기 당시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인터뷰. 중앙일보, 2013.10.01,)

제 인생도 그렇고 우리나라도 그렇고 위기라면 오늘도 위기이고 언제든지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위기에 대비하여 장기적인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키우기 위한 정책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으나, 우리나라 과학기술인력정책은 그보다 위기에 대한 불안감에 기초한 사재기(panic buying)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정책의 문제는 앞서 나열한 사례에서 읽을 수 있듯 특정 산업분야 과학기술인력의 섣부른 공급 확대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를 정부와 대학, 기업 모두 윈윈하는 방법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정부에게는 정책을 통해 배출된 인력이 곧 실적이니 뭔가 대처했다는 위안을 삼을 수 있어 좋고, 대학은 해당 인력을 교육하라고 정부에서 돈을 주니 좋고, 기업은 뽑을 수 있는 인력풀이 늘어나니 좋지요. 정책을 결정하는 이 세 이해관계자 집단이 모두 좋기 때문에 비슷한 정책이 반복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정부 지원 하에서 교육받은 수 만명의 과학기술인력이 알아서 학계나 산업계의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그 숫자만큼이나 정부 의도대로 우리나라의 국가 경쟁력 증대에 기여한다면 좋겠지만, 현실에선 대부분의 과학기술인력은 험난한 일자리 시장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들 윈윈했다고 안심하는 사이 사실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여야 할 과학기술인재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지요. 기실 더 나아가 정책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모두가 졌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앞서 언급한 ‘SW인력 22만양병 정책에 대해 당시 SW 개발자 커뮤니티 OKJSP(OKKY)가 미래부 장관에게 보낸 공개질의서를 인용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소프트웨어 개발자 수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정부지원 IT 취업과정을 통해 인력 시장이 과포화 상태에 이를 지경으로 많은 신규 개발자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정말로 부족한 것은 절대적인 개발자의 수가 아니라 국제 수준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행복경제 구현에 도움을 줄 핵심역량을 지닌 우수 개발 인력입니다. …(중략)… 우리나라 개발자들이 전 세계 개발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실력을 갖추기 힘든 것은 정부 지원 교육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시장 구조가 기술력에 대해 보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중략)…왜곡된 시장 구조에 대한 근본적 문제 해결이 선행되지 않은 무리한 인력 공급은 잘못된 관행을 고착시키는 부작용을 불러올 것[입니다.]” (소프트웨어 인력 22만 대군 양병계획에 대해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님께 드리는 공개질의서 中)

물론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 나름의 특징이 있겠으나, 위 질의서는 과학기술인력정책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단순한 공급 부족이 아니라 보다 복합적인 고려가 필요한 구조적 문제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를 고민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섣부른 공급 확대는 쓸만한 인재가 없다는 기업과 갈만한 일자리가 없다는 졸업생 사이 구조적 간극을 더 심화시킬 뿐입니다.

과학기술인력정책에 있어 어떻게해야 어떻게에 보다 주목하고 개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제언을 드리는 것으로 토론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모두가 시도 때도 없이 위기라고 부르짖을 때 누가 어디서 어떻게 왜 그렇게 인식하고 목소리를 내는지 보다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료집에 따로 인용을 못했으나, 김태호 선생님의 주간경향 구석구석 과학사연재 글을 보면 IMF 경제위기 당시 터져나온 이공계 위기담론은 사실 교수와 학생에게 다른 의미를 가졌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교수들에게 위기란 학생이 줄어들어 연구실 운영이 어려워지는 것이었던 반면, 학생들에게는 학위를 마쳐도 좋은 일자리를 잡기 힘든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국가나 기업에게는 고급 인력이 감소하여 산업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는 것이었을 테고요. 이 모두의 서로 다른 위기인식을 각각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앞서 언급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여러모로 무조건적 과학기술인력의 양적 성장은 바람직한 정책 방향이 아님을 고려할 때, 과학기술인력양성의 질적 제고, 교육의 방법과 내용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등교육이 일어나는 대학 현장이 정말 교육의 방법과 내용을 바꿀 수 있는 상황에 놓여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대학원생을 배출하는 많은 연구중심대학은 갈수록 교육기관이 아닌 연구기관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더 심하게 말하는 사람들은 연구소도 아닌 중소기업과 다를 바 없다고 씁쓸해 합니다. 학생을 지도하는 지도교수이자 연구를 이끄는 연구책임자여야 할 교수들은 단지 연구실이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CEO, 지도를 받으며 자유롭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배우는 학생이자 산학연 곳곳으로 퍼져나가 본인의 전문성을 살려 문제를 해결하는 미래 과학기술인이 될 대학원생들은 연구실에 수주한 연구과제를 수행하기 급급한 직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직접하면서 배우는 방식)learning by doing’ 역시 좋은 교육 방법이며 교육과 연구가 항상 따로 있는 것은 아니나, 이러한 연구환경 하에서 많은 대학원생들이 지도와 교육의 부족 내지는 부재를 문제삼고 있으며 더 많은 연구과제를 수주해서 더 많은 보고서를 쓰고 더 많은 논문이나 특허와 같은 성과와 실적을 내는 데에만 집중하는 대학의 연구환경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결국 대학에서 교육의 주체는 교수와 학생인데 이들이 변화할 여건을 마련해주지 않으면서 교육 혁신을 논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과학기술인력은 공익을 증대시키니 최대한 늘려야한다는 주장의 생각이 충분히 사려깊지 못한 것처럼 무작정 과학기술인력을 전적으로 그 수요처인 산업계의 요구에 맞게 양성해야한다는 주장 역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대학이 너무 이론 교육과 학술 연구에만 치중해왔다며 이를 문제 삼고 산업계 요구에 맞추어 응용 교육 및 연구와 사업화 등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저는 그러한 문제의식이 부분적으로만 맞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은 원래 그런 곳에 특화된 교육기관이니, 실습 등 직업 교육과 제품 개발 등의 사업화는 그것을 해온 기업/산업계에 맡기는 것이 더 효율적인 방법이 아닐지요. 대학은 교육과 관련한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는 완벽한 기관이나 제도가 아니며, 과학기술인력양성의 책임을 대학에만 지우는 것은 효과적일 수 없습니다. 대학이 가진 역량 이상의 것을 괜히 그 쪽으로는 비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대학에 산업계 요구대로 교육과 연구를 하라고 시키면서 돈을 쥐어주기보다 애초에 산업계를 비롯한 응용과 사업화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기관과 제도 등 다른 통로를 통해 그런 교육을 맡길 수는 없을까요? 물론 이 둘의 깊은 연계가 필요하겠습니다만, 지금과 같이 일방적으로 대학을 기업 쪽으로 미는 산학협력 정책 방향에는 의문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 쓰기 힘들었던 과학뒤켠 기고글이다. ('글쓰기가 두렵다' 포스팅 참고)

원문은 여기에 전부 옮겨오기보다 과학뒤켠 홍보 차원으로 과학뒤켠 블로그에서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링크: https://behindsciences.kaist.ac.kr/2018/10/07/%EB%8C%80%ED%95%99%EC%9B%90%EC%97%90-%EC%83%81%EC%8B%9D%EC%9D%84-%EB%AC%BB%EB%8B%A4/)

과학뒤켠 매 호는 PDF 파일로도 볼 수 있다. 이 글은 파일에서 꽤 뒤쪽에 있고, (링크: https://stp.kaist.ac.kr/0608/view/id/1033) 여기에는 파일이 커서 전체를 첨부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 부분만 잘라서 첨부했다. 

아래에는 개인적으로 가장 쓰기 고통스러웠지만 써놓고 보니 고민했던 것들이 풀리는 기분이라 후련했던 "교수니까 괴수다"라는 소제목을 붙인 부분에서 일부만 인용하겠다. 

차후 과학뒤켠에 실은 내용은 논문이든 책의 한 단원이든 좀더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대학원생 인권침해 문제는 ‘극소수 괴수’만의 문제일 뿐 ‘대다수 교수’는 문제없다는 사고방식과 태도는 분명 논파할 필요가 있다. ...(중략)... 하지만 괴수와 교수를 나눠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문제를 일으킨 교수를 괴수라는 다른 유형의 사람으로 구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치부한 채 괴수가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과 교수니까 괴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중략)...
교수는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괴수이기도 아니기도 하다. 괴수라는 유형의 사람이 따로 있어 그가 인권 침해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교수도 인권 침해를 할 수 있으며 그 순간 바로 괴수가 되는 것이다. 이는 교수가 아니고서는 괴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논문지도를 모텔에서 해주겠다거나, 훈계라면서 폭언이나 폭행을 일삼거나, 인건비를 횡령하거나 연구저작물을 가져가고, 이를 지적하거나 고발한 대학원생에게 학계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교수에 의한 대학원생 인권 침해 사건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유형은 모두 그가 교수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었던 짓이다. 운 나쁘게 괴수임이 드러나도 대부분 교수로 구성된 징계위원회로부터 휴가에 가까운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받고서 다시 교단에 설 수 있는 것 역시 그가 괴수이기 이전에 교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교수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그가 교수라서 그럴 수 있었다는 생각을 갖고 ‘괴수가 된 교수’를 이해해야한다. ...(중략)... 교수가 어떻게 괴수로 변하는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할 경우 우리는 교수가 대학에서, 특히 대학원생과의 관계에서 어떤 입장과 위치에 서게 되는지, 어떤 요소들이 교수라는 자리를 구성하고 그 중 어떤 것이 괴수를 만드는 데에 기여하는지를 분석할 수 있다. 즉, 괴수를 개인이 아닌 사회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는 제도적 해법을 도출하기 위한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교수는 어떻게 괴수가 되는가?

...(후략: 여기까지 읽을 정도로 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원문을 읽으시는 것으로!)...


작년 봄부터 대학원에서 돌아가면서 기고했던 과총에서 발간하는 월간 <과학과기술> '젊은이의 광장' 섹션이 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끝날 듯 하다.

워낙 원고료를 많이 주는 곳이라 아쉽기도 하지만, 대학원 안에서도 쓸 사람 구하느라 급급한 상황이라 (당장 나 역시 대학원을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쓸 사람이 없어 7월호인가에 썼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9월호에 다시 등판한 것...) 차라리 잘 된 것도 같다. 

한창 고민하던 WASET 사태에 대한 글을 썼고, 이는 앞서 다른 포스팅에도 언급했듯 과총에서 개최한 <연구윤리 대토론회 I>에 패널 토론자로 참석하는 계기가 되었다. PDF와 이북 링크는 아래와 같으며, 아래 원문 역시 옮겨놓는다.

PDF 링크: https://www.kofst.or.kr/kofst/PDF_20160211/2018/n031s592/201809_27.pdf

ebook 링크: http://ebook.kofst.or.kr/book/201809/#page=114

-----

와셋(WASET) 사태가 비추는 학계의 민낯

지난 7월 뉴스타파라는 한 국내 탐사보도 전문언론기관이 와셋(WASET, World Academy of Science, Engineering, and Technology)이라는 수상한 학술단체가 개최한 이른바 ‘가짜 학술대회’ 심층취재기사를 공개했다. 기사는 소속을 속인 채 SCIgen이라는 논문처럼 보이는 아무 말을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을 사용해 논문을 제출해도 등록비만 내면 발표할 수 있는 학술대회가 성행하고 있고, 여기에 적지 않은 우리나라 교수와 연구원, 대학원생이 참석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뉴스타파와 함께 국제 공조 취재팀에 속한 독일 NDR 기자는 엉터리 논문을 발표하고도 우수 발표 상을 받았고, 학술대회에 등록해 놓고도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국내 대학 연구실 사람들도 있었다. 보도가 일으킨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정부는 정부대로 개별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와셋과 같은 곳서 운영하는 ‘가짜 학회’에 참석하거나 ‘가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연구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고, 뉴스타파를 비롯한 여러 언론사는 후속보도를 계속하고 있다.

대학원생인 나조차도 와셋을 비롯해 BIT Congress 와 같은 수상한 단체의 학술대회와 학술지로부터 초청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덕분에 나는 보도 전부터 기사가 문제 삼은 학술대회나 학술지가 개최되고 출판되는 행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해당 학술대회 참석 명목으로 어렵지 않게 연구비 지원을 받아 ‘학빙여’(학회를 빙자한 여행의 줄임말)를 다녀올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학계에 남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면 별 고민 없이 경비를 신청해 다녀올 수도 있었겠지만 연구자로서의 양심 떄문이었는지 보는 눈이 두려워서였는지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런 경험 때문에 내게 ‘와셋 사태’ 그 자체는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는데, 다만 가만히 사태를 곱씹어보면서 마주한 학계의 민낯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가장 먼저 내가 놀랐던 것은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것이 연구실적이 되고 점수가 된다는 사실이다. 일부 학문분야에서는 학술대회가 학술지를 대체하고 있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학술대회 발표를 연구실적 점수로 센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완성된 초고를 제출하여 동료 평가(peer review)를 기반으로 한 심사 이후 수정을 거쳐 게재하는 과정이 공식으로 자리잡은 학술지 논문 출판과 다르게, 학술대회 발표는 그 내용이나 이뤄지는 절차가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다. 학술대회에서는 단순한 아이디어나 연구계획부터 이미 학술지에 게재된 연구결과까지 다양한 내용이 발표되며, 학술지처럼 동료 평가를 통해 발표 여부와 방식을 통보하는 학술대회가 있는가 하면 선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세부 분야별 분류를 통한 시간표만 정리해서 모두 발표시키는 학술대회도 있다. 사실 이 때문에 와셋에서 개최하는 학술대회를 아예 가짜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참석했던 연구자들이 와셋 학술대회는 다학제적이었을 뿐이라며 여타 국내 부실한 학회보다 낫다고 항변한 것은 옹졸하긴 하나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학술대회에 있어 진짜와 가짜, 고급과 저질, 건실과 부실의 경계는 ‘학빙여’와 ‘학겸여(학회를 겸한 여행)의 차이만큼이나 모호하다. 이처럼 형식에서 자유로운 학술대회 발표를 연구실적으로 올리도록 하는 제도는 잘못되었다.

이처럼 분명 제도적 문제도 있으나 다학제적이다 못해 각자 이해 못할, 그래도 무관한 ‘원맨쇼’를 하고 와서는 이를 자랑스럽게 연구실적으로 기재하는 연구자의 행태 역시 문제다. 더 나아가 사실상 동료 평가가 없는 가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고 이를 실적에 등록한 연구자가 적지 않다는 점은 훨씬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 물론 연구를 학문적으로 무의미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거나 가짜 학술지에 논문으로 출판한다고 해서 그 연구가 무의미해지거나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두 현상이 드러내는 진짜 문제는 연구자가 더 이상 학술대회와 학술지의 본질적 의미인 학술 커뮤니케이션보다 발표나 출판을 했다는 사실 자체와 그 횟수에만 의미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연구 내용과 결과를 검토하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분석하고 논의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점수가 되는 실적과 그 증빙 뿐이다.

‘와셋 사태’ 이후 학계가 보인 반응 역시 참담할 따름이다. 뉴스타파 기사에 가장 발빠르게 반응을 보인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은 성명서를 통해 ‘와셋 사태’는 “연구과제에 대한 허술한 관리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며 정부에 전반적인 실태조사와 수사, 연구개발관리시스템 점검을 요구했다. 또한 “당장에 내세울 결과만 요구하는 정부의 책임도 크다”며 비리에 연루된 연구자를 단호히 처벌하라면서도 실태파악과 대책 수립을 빌미로 연구자를 옥죄지는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홍종학 전국교수노동조합위원장 역시 교육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겠다며 와셋과 공모연구자들의 행태를 “(한국)연구재단이 몰랐다고 하는 건 직무유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의 논지는 와셋 학술대회 및 학술지에 10건에 가까운 논문을 발표 내지는 게재한 서울대 김동규 교수가 “학술대회 참가실적을 관리하는 건 한국연구재단이기 때문에 그건 연구재단의 문제"라고 답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자들의 반응을 의식한 듯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를 비롯한 3개 과학기술계 한림원은 관련 성명서에 ‘와셋 사태’를 연구윤리 문제로 적으면서도 연구관리제도를 혁신해야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분명 세금으로 조성된 연구비가 정당한 학문 활동이 아닌 무의미한 학술대회 참석 혹은 학빙여에 낭비된 것은 크나큰 문제다. 뉴스타파가 출장 경비의 출처를 추적하고 BK21플러스 사업단과 대학 산학협력단, 연구재단을 취재했듯 연구관리시스템과 이를 운영하는 연구비 관리 및 집행기관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계의 일원인 연구자가 사태의 책임을 연구관리시스템에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자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어린 애가 어른에게 남의 잘못을 이르듯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연구관리시스템과 교육부나 연구재단과 같은 유관기관은 연구비를 담당할 뿐 그보다 상위에 있는 전체 연구시스템의 주체는 아니다. 전체 연구시스템이 작동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연구 내용과 활동, 그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전문가인 연구자 집단에 위임되어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동료 교수나 연구원, 대학원생이 와셋과 같은 사이비 단체에 연루되어 있는 것을 언론이 보도할 때까지 몰랐든 모른 척 했든 ‘와셋 사태’는 전적으로 연구자 집단과 그를 구성하는 연구자 개개인, 즉 우리의 문제다. 연구관리시스템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와셋 사태’는 연구시스템의 실패를 의미하며 이는 전적으로 연구자 집단 책임이다.

연구 내용은 뒷전이고 연구활동과 학술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잊은 채 실적 쌓기에 급급한 연구자. 전체 연구시스템 실패에 대한 책임은 방기한 채 연구관리시스템과 유관기관에 책임을 돌리는 연구자. ‘와셋 사태’와 그에 대한 반응 속에서 나는 학문 공동체의 붕괴를 읽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학문 공동체가 붕괴되었거나 부재한 상황에서 연구시스템과 학계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따라서 ‘와셋 사태’에 놀랄 필요 없다. 이는 단지 우리 학계의 민낯을 비추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다른 누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다.

어쩌다 과총에서 개최한 "연구윤리 '대'토론회"(1회)에 참석해서 몇마디 했다. 
4명의 발제는 나쁘지 않았으나, 패널 토론은 언제나 그렇듯 급하게 각자 자기 할 말만 하고 끝났다.

2회차 때에는 패널이 더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 발표자 포함 16명의 패널을 1시간 남짓 안에 토론을 하라고 하니 제대로 토론이 될 수 있겠는가...

(행사 기사 링크: http://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861748.html)

어쨌든 나는 과총에 계신 분들이 좋아하는 단어인 '젊은' 내지는 '청년'에 해당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기사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학생대표로 참석한 것은 아니다. 토론문에도 언급하겠지만 과총 관계자가 과총에서 발간하는 <과학과기술>지의 '젊은이의 광장'에 실은 기고문을 보고 뒤늦게 연락을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초청한 건 구색맞추기가 아니었나 싶다.

또한 아래 가져온 토론문은 사실 일침에 가까운 발언(자리에 앉아있는 시니어급 연구자들에 대한)이었는데 끝나고 점심시간에 '젊은 친구그 기특하군' 류의 칭찬만 들었다... 높으신 분들부터 제대로 된 반성을 해야할텐데...

그래도 페이를 나쁘지 않게 받았으니 용돈은 감사합니다 과총.

아래는 내가 준비해 갔던 토론문.

---

어떻게 저리도 대단한 분들 사이에 듣도 보도 못한 대학원생이 끼게 되었나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저는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전준하라고 합니다. 과총에서 발간하는 과학과기술지 9월호에 와셋 사태 관련해서 기고를 한 것이 과총 관계자분 눈에 들어 뒤늦게 토론 패널로 초청해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토론회 부제가 ‘연구윤리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조금 괘씸하게 들릴 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나름대로 질문에 답을 하자면 문제는 당연하게도 많이들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고, 왜 많이들 지키지 않느냐하면 왜 지켜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며, 왜 지켜야 하는지 모르냐하면, 윤리란 본디 ‘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있는 것인데, 아무도 ‘연구공동체’의 유지와 존속에 관심이 없고 연구자 개개인은 살아남기에 급급해 자신의 실적 쌓는데에만 관심을 가지니 연구윤리를 지킬 이유를 못 느끼는 것이지요. 그렇게 ‘과학기술인’이라고 지칭할 만한 연구공동체는 서서히 붕괴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연구자 개개인이 문제라고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연구윤리,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지키지 않는 다른 사람’이 문제라고 하는 연구자, ‘규정에 없으니 문제될 것 없다’고 하는 연구자 등과 같이 문제를 타자화하기만 해서는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연구 자율성을 그토록 외치던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연구윤리를 위반한 연구자들을 걸러내지 못한 채 정부 탓, 연구재단 탓, 대학이나 연구원 본부 탓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자율적으로 돌아갈 연구공동체가 없다고 고백하는 꼴이지요.

연구공동체가 없다는 말은 곧 연구자들이 서로 ‘동료 연구자’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연구자가 논문을 표절했는지, 연구 저자에 누군가를 끼워 넣었는지, 연구비를 빼돌렸는지, 이른바 가짜 학회에 다녀오거나 가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했는지 등 연구 윤리 위반 여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한 연구자의 역량과 그가 쓴 논문의 질, 의미와 가치, 성과를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동료 연구자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과학기술계에서는 누군가 연구윤리 위반을 해도 모르거나 모른 척할 따름이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연구엔 평소 별 관심이 없다가 평가 요청이 오면 그제서야 해당 연구자가 논문을 몇 편 썼는지, 게재한 학술지의 인용 지수(Impact Factor)는 몇인지, 피인용수는 몇이고 H-index는 몇이며 타간 연구비는 얼마인지 살펴볼 뿐입니다.

제가 본 토론문을 통해 제안, 아니 부탁드리고자 하는 것은 대단한 아이디어나 거대한 정책이 아닙니다. 오늘 토론회에 참석해주신 연구자분들께서 바쁘더라도 조금만 더 시간을 내어 동료 연구자들에게 동료 연구자가 되어 달라는 것입니다. 옆방 교수님이 최근 해외 학회를 다녀왔는데 조금 미심쩍다 싶다면 넌지시 ‘실수로 모른 채 갔겠지만 그 학회 말이 많더라’고 한마디를 건네고, 맞은 편 방 교수님이 새로 쓴 논문에 대해 뭐든 좋으니 질문 한두개만 던져보십시오. 후배 연구자나 대학원생에게 성과를 재촉하기 전에 그가 쓴 논문 초고를 읽어보고 간단하게나마 평과 함께 조언을 해주십시오. 서로 동료 연구자가 되어주고, 그로써 연구공동체가 형성되면 자연스레 연구윤리도 지켜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

참고로 위 토론문 주제는 최근 BRIC에서 발간한 <유사학회 와셋 사태 인식과 대응방안 의견조사 보고서>를 읽으면서 작성했다. 
설문조사에서 연구자들은 사태의 원인을 주로 양적 연구사업 평가 지표에 대한 문제와 연구자 개인의 학문적 부도덕성으로 보고 있었다. 각각 33~34%. 반면 '학계 내부 무관심, 방관, 건전 견제 상실'을 지적한 사람은 절반도 안되는 14%였다. 책임지고 나서야 할 기관 역시 연구사업 관리기관과 정부 부처가 34%, 24%로 가장 높았고, 연구공동체, 학문공동체의 기초단위라고 할 수 있는 개별학회라고 답한 사람은 8%밖에 안되었다.


실제 행사에서는 보도영상을 다시 보면서, 또 나보다 앞서 교수노조위원장이 '성명서를 발표해서 교육부나 연구재단에 책임을 묻겠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생각이 많아져 좀 다른 소리를 했다. 그래서 아마 내 기억에 꽤나 횡설수설했던 것 같은데, 같은 자리에 계셨던 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어쩌다보니 뉴스타파가 7월 중순 보도한 WASET 등 '가짜학회' (뉴스타파가 사용한 단어. 이후 정부는 '부실학회'라는 단어를 쓰는 것으로 방침을 정한 듯 하다) 이슈에 끼어들어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하게 되었다. 학술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었으니 predatory journal/publisher 주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언젠가 한번 꼭 연구를 해보고는 싶었는데 그 전에 이렇게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줄은 몰랐다. 

그 전까지 같은 주제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생각을 말한적도, 어떤 결과물을 낸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뉴스타파 시민 초청 시사회에 초청된 것은 다름 아닌 인맥 덕분이었다. 전에 이우창 선생님과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이 주제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잠깐 언급했던 것을 선생님께서 기억해주셨고, 이후에 뉴스타파에서 코멘터리를 부탁하기 위해 대학원생노조에 연락했을 때 신정욱 선생님이 적절한 사람을 찾다가 이우창 선생님한테서 나를 추천받아 이어준 것이다. 

그 결과 아래 영상에서 볼 수 있듯 행사에 참석하여 한마디 하게 되었다. 영상 링크(https://youtu.be/uqWfJlxUxEI, 관련 기사는 https://newstapa.org/43821)에 당시 했던 말과 함께 준비했던 발언문을 공유한다. 원래 발언문을 그대로 거의 읽으려고 했으나, 실제 행사에서는 보도영상을 다시 보면서, 또 나보다 앞서 교수노조위원장이 '성명서를 발표해서 교육부나 연구재단에 책임을 묻겠다'는 식의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생각이 많아져 좀 다른 소리를 했다. 그래서 아마 내 기억에 꽤나 횡설수설했던 것 같은데, 같은 자리에 계셨던 분들께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

안녕하세요,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전준하입니다.

우선 언젠가는 한번 꼭 짚고 넘어가야 했을 학계의 문제를 이렇게 공들여 탐사보도를 통해 밝혀주신 뉴스타파 기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의 소개를 통해 발언 기회를 얻었기에 저를 초청해주신 대학원생노조에도 감사말씀 드립니다.

뉴스타파 보도는 주로 학술대회에 초점을 맞췄지만, 저는 '가짜' 학술지도 주제로 포함하여 좀더 포괄적인 문제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가짜 학술대회와 가짜 학술지 문제는 사실 2010년대 초반부터 그 시장이 성장하기 시작해 이제는 연구자라면 누구나 접해봤을 문제로 커졌습니다. 제프리 비알이라는 한 전문사서가 2009년 10개 저널을 가짜로 규정하고 블랙리스트로 만든지 10년도 안되어 리스트에는 1000여개가 넘는 저널이름이 올랐습니다. '발각된' 케이스만 1000여종이니 실제로는 훨씬 더 클 것입니다. 또한, 기사에서 다룬 OMICS라는 업체 하나만 해도 2016년 기준 700개가 넘는 학술지를 발간하여 5만여개의 논문을 실었고, 25개국에서 3000여개의 학술대회를 개최했다고 합니다. 해당 업체는 거꾸로 기존 학술지 업체를 사들일 정도로 커졌습니다.

오히려 학회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가 '학빙여'라고 줄여부르는 '학회를 빙자한 여행'을 다니는 연구자들의 비윤리적 행위 문제와 이들에게 들어가는 (주로 국가 세금으로 지원하는) 연구비 낭비 문제로 사안이 국한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해당 학회를 개최하는 WASET이나 OMICS 같은 업체들은 더 나아가 '가짜' 학술지를 발간하고 있으며, 여기에 검증되지 않은 논문들이 실리는 것까지 하나의 사이클로 본다면 이는 학문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원래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은 동료심사라는 과정을 거쳐 우리 사회의 지식체계를 구성하는 단위로서 그 자체로 어느 정도의 권위와 신뢰를 가지고 있는데, 그 권위와 신뢰를 보장하는 제도를 거치지 않은, 심하게 말하자면 보기 좋게 쓰인 막말이 - 뉴스타파가 SciGen으로 쓴 논문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 지식체계에 마구잡이로 침투해 물을 흐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다뤄야 할 질문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나?'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대학원생 입장에서 이런 가짜 학술지와 가짜 학술대회가 가지는 매력을 분석함으로서 이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한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관련 문제에 대해 연구한 여러 논문들이 가짜 학술지 및 학술대회에 논문을 제출한 저자들 중 다수가 개발도상국 출신의 포닥이나 박사과정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기 때문에 실마리를 찾기 좋은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뉴스타파 보도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지만 대학원생들에게 있어 이런 학술대회 및 학술지는 까다롭지 않으면서 - 즉 발표를 거부당하거나 심하게 비판받지 않으면서 - 해외 학회 내지는 학술지의 경험을 할 수 있고 동시에 이른바 '꽁돈'으로 학빙여를 하거나 개인 연구 성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매력적입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연구평가체계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경우 연구내용보다 연구를 통해 나온 결과물, 즉 해외학회 발표 몇 건, 해외학술지 게재 몇 건 등이 성과의 주요 요소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평가체계 하에서 성과압박이 점점 커지고 있는 환경에 놓인 포닥이나 대학원생에게 이런 학회 및 학술지는 쉽게 졸업하고 쉽게 임용될 수 있는 길로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제도 탓만 할수는 없겠지만 이는 가짜 학술지 및 학술대회 문제가 얼마나 연구생태계 전반과 깊게 상호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또한, 해결방안을 도출하기 위해서 저는 비양심적인 연구자 개개인을 탓하는 정부 및 연구비 관리조직과 반대로 이들과 함께 관 주도의 학술정책을 탓하는 개개인 연구자로 양분된 두 시각 사이에 공백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증빙가능한 연구비 집행과 가시적인 성과를 원하는 정부나 연구재단, 대학 산단과 더 많은 연구비를 따고 더 많은 논문을 내는 데에 급급한 연구자는 가짜 학술지 및 학술대회와 그 곳에 참석하고 논문을 게재하는 연구자처럼 공모 관계에 있고, 그 사이에 학문과 연구생태계는 점점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생산하는 것이 가짜든 진짜든 더 많이 더 빨리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는 '공장'이 되어갈 뿐입니다.

연구를 하는 사람으로서 뉴스타파 보도를 계기삼아 연구자들이 먼저 나서 함께 반성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오늘과 같은 자리를 계속 만들어 논의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뉴스타파와 같은 언론이 계속 감시하고 문제의식을 가진 연구자들이 모여 목소리를 낸다면 '공장'과 다를 바 없는 지금의 연구생태계에서 벗어나 정말 사회에 기여하고 지식을 창출하는 연구생태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