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터디 논의 내용만 정리하다보니 정작 책에서 읽은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고 다시 찾아 읽으려해도 접근성이 떨어져 책의 각 단원별로 중간과 마지막에 정리된 요약과 개념을 번역해서 올려둔다. Notion 링크로 공유하니 논의 내용보다 책 내용이 궁금한 사람은 해당 문서만 보면 되겠다.

이번 단원 정리 link: https://www.notion.so/realjoonha/Chap-8-Contemporary-Feminist-Theories-Summary-Concepts-30393650b3d84916905104631ad32a4c

지난 스터디를 마무리하고 다음 일정을 잡으면서 책 8단원 주제를 살펴봤을 때 내 마음은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2년 전 <대학원생 권리강화 방안 연구>를 수행하면서 뿌리깊게 자리잡은 권력구조와 그 파급효과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데, 막상 대학 혹은 학계 안에서의 사례연구나 이론이 많지 않아 다른 분야를 살펴보니 페미니즘이야말로 정말 오랫동안, 또 광범위하게 젠더 간 권력 관계와 그로 인한 차별과 억압을 연구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특히 관심이 깊어졌다. 하지만 나름 관심을 갖고 이런 저런 글을 찾아 읽었다고 하더라도 기사나 칼럼, 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연구논문이 주를 이뤘고 부끄럽게도 이론을 공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기대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스터디원 중 나만 남성이라는 점은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책을 읽다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나오거나 내 의견에 반하는 내용이 나왔을 떄, 그것을 전처럼 천진난만하게 잘 모르겠으니 설명을 부탁하거나 의문을 표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또 반대로 내가 남성이기 때문에 같이 스터디하는 분들이 내 눈치를 보고 솔직하지 못하는 건 아닐지 걱정했다. 피차 조심스러워하는 것은 나쁠 게 없지만, 나도 여성들과 페미니즘에 대해 깊게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고, 다른 분들도 비슷할텐데 이 기회에 보다 다양한 관점으로 논의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했다. 다행히도 결과적으로 나도 용기를 내서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했고, 물론 막상 속마음을 들춰보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다른 분들도 그런 것 같다.

다른 단원은 책의 주 저자인 George Ritzer와 Jefferey Stepnisky가 썼지만, 이 단원만 Patricia Madoo Lengermann, Gillian Niebrugge라는 객원 필진이 썼는데, 찾아보니 두 사람은 <<The Women Founders: Sociology and Social Theory, 1830-1930>>이라는 책을 집필한 바 있다. 이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페미니즘과 젠더학이 사회학에서 주변화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왜 사회학 전체를 검토하고 조망하는 책을 쓰는 저자들조차 이 단원만 떼내어 다른 저자들에게 맡기는가? 물론 내가 이번 스터디에 참여하기 전에 가졌던 마음과 비슷한 마음, '나는 남성이라 잘 모르는데...' 혹은 '내가 이 단원을 쓸 자격이 있나...'와 같은 조심스러움에서 비롯했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렇다면 단원별로 각각 해당 분야 연구자에게 맡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조심스러움과 책의 한 단원을 페미니스트 이론에 할애했다는 점은 분명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알게 모르게 여전히 페미니즘을 '여성'의 영역으로만 남겨두고 있는 저자들의 생각도 엿보였다.

젠더학의 위치와 페미니즘 연구자에 대한 편견은 본문에서도 나오며, 스터디에서도 논의가 되었다. 바로 다른 학문과 연구자가 그들의 실천주의적인 성향을 빌미삼아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이론을 학문분야나 사회학 이론으로 인정하기보다 사회운동으로 보고 페미니즘 연구자 역시 연구자 아닌 활동가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쉽게 그런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젠더학과 페미니즘에만 해당하는 편견은 아니지만,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전공을 바꾸고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연구하게 된 내가 연구와 운동을 병행하는 사람들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 아이러니하다. 학문적 가치가 기존 학계에서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분과 학문에 소속된 연구자들에 의해 결정된다거나 국내에서 제도적으로 젠더학을 전공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는 등 여러 원인이 논의되었지만 뚜렷한 해결책이 보이진 않았다. 다만 스터디원 모두 직업 연구자가 되고자 하는 게 아니더라도 학문을 하려는 이유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에도 다양한 분파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스터디를 통해 정리할 수 있었던 것도 큰 소득이었다. 안티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을 공격할 때 즐겨 노리는 점이 바로 이 다양성이다. 이번 스터디에서 읽은 단원에서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듯 젠더 간 차이에 주목하는 문화적 페미니즘 (cultural feminism)과 본질주의적 페미니즘(essentialist feminism), 젠더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 (liberal feminism), 합리적 선택 페미니즘(rational choice feminism), 젠더 억압 이론을 설명하려는 정신분석적 페미니즘(psychoanalytic feminism)과 래디컬 페미니즘(radical feminism), 더 나아가 구조적 억압 이론으로 확장시키려는 사회주의적 페미니즘(socialist feminism)과 교차성 이론(intersectionality theory)은 공통점만큼이나 차이점도 명확하다. 모두 여성의 경험과 관점에 중점을 두고 여성성을 비롯한 젠더는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명제에는 동의하지만 여성의 범주나 여성성의 근원 등 다양한 곳에서 의견을 달리한다.

사실 이런 다양성은 어떤 학문에서나, 또 어떤 운동에서나 나타나는 특징인데 페미니스트, 더 나아가 여성 전체가 같은 입장을 갖도록 요구하는 것은 과한 일이다. 안티페미니스트들이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며 혐오가 아닌 연대, 페미니스트가 아닌 휴머니스트를 외치는 것이 겉보기엔 합리적일 지 모르겠다. 이 다양한 페미니즘 중 하나의 분파, 또 그 분파에서의 운동은 분명 어디선가 틀리거나 다른 페미니즘과 의견이 갈리는 지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지점이 전혀 없는 학문이나 운동은 사이비 종교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숙명여대 일부 학생이 트랜스젠더 신입생이 입학하지 못하도록 거부 운동을 펼친 것에 비판적이지만 그 떄문에 페미니즘은 틀렸다거나 실패했다고 보지 않는다. 여성의 범주를 두고 페미니즘 사이에 이견이 있다고 이해할 뿐이다. 또한 나는 조직의 여성 비율을 늘려야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여성이 장점을 가지는 돌봄과 배려 문화가 조직에 필요하다고 할 때 그것이 오히려 여성의 역할과 능력에 한계를 노정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당 주장에도 역시 저평가된 여성성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재발견하려는 목적이 있다. 다양한 페미니즘들은 틀리기도 하고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서있는 공유지대를 바라보면 절대로 페미니즘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페미니즘은 옳다.

마지막으로 스터디원 한 분이 말씀하셨던 내용은 내게 큰 숙제를 남겼다. N번방 사건과 같은 심각한 성폭력 및 성착취 이슈에서라도 남성들이 문제의식을 공유해주고 함께 연대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기대 자체를 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 분의 의견을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남자들은 선악이 너무도 분명한 사안에서조차 숨기 바쁜가?

나는 다른 글(<N번방과 새벽의 방문자들>)로 남성으로서 N번방 사건을 접하며 느낀 점을 쓰기도 했고, 스터디에서도 비슷한 내용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남자들이 조용한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우선 N번방 사건과 같은 성폭력과 성착취를 페미니즘과 별개의 사안으로 분리하려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사실 이들은 숨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보통 조주빈을 비롯한 가해자 집단을 비판하는 동시에 페미니스트도 함께 비판하는 특징을 보이며, '우리를 잠재적 범죄자로 몰지 말라'는 구호 아래 뭉친다. 이런 주장이 왜 틀린데다가 의미도 없는지 이미 밝힌 바 있으니 길게 적지는 않겠다.

동성사회성(호모소셜)을 잃는 것, 즉 남성 카르텔에서 벗어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결코 작지 않지만, 내가 이전 글에서도, 또 스터디에서도 이해를 빌었던 것은 그간 남성문화 속에서 살고 또 기여해 온 자신을 버려야 하는 데에서 오는 장벽이다. 한명의 남성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함께 연대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신, 더 나아가 현재의 자신과도 단절이 필요하다. 나는 특히 섣불리 '난 아니야!'라고 외칠 수 없는데 공개적으로 연대하는 것이 마치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순적인 행동은 아닐지 고민을 많이 했다. 같은 남성문화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분명히 잘못이 있는데 그 장벽을 깨거나 뛰어넘지 않은 채 성폭력 및 성착취 가해자 집단을 향해 돌을 던지는 남성들은 앞서 말했듯이 결코 여성과 함께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속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투표한 사람이 그의 탄핵을 외치는 촛불시위에 나가는 것에 비유하고 있을 때, 다른 스터디원분께서 탁월한 비유로 기독교인에게도 진정한 회개가 어렵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페미니스트 및 여성분들께 너무도 미안하지만 그 장벽을 깨거나 넘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는 점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비롯한 적지 않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있고, 연대에도 마음이 열려있으며,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을 수 있지만 반성하고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변화를 꾀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함꼐 싸워나가면 좋겠다.


(이미 거의 2주 가까이 지나긴 했지만) 이번 스터디에서는 다섯 번째 단원 <Contemporary Grand Theories 2>를 다뤘다. 해당 단원은 네오맑시즘으로 묶인 Herbert Marcuse가 대표하는 비판이론과 Henri Lefebvre의 공간사회학을 시작으로 Norbert Elias의 문명화 과정(Civilizing process), Juergen Habermas의 식민지화되는 생활세계 (Colonization of the lifeworld), 그리고 21세기 초반 스터디를 하고 있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Anthony Giddens와 Ulrich Beck의 근대성에 대한 여러 논의(근대성 수레(Juggernaut of modernity),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 위험사회(Risk society))들을 공부했다.

책을 읽을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렇게 한 문단으로 정리하고 나니 도대체 어떻게 한 단원에, 또 한 번의 스터디에 여러 명의 사회학 거장들과 그 논의를 다뤘는지 의아할 정도다. 스터디에서도 나왔던 이야기지만, 그만큼 책이 적지 않은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윗 문단에 쓴 것처럼 학자 이름과 주요 이론이나 논의를 하나씩 짚는 방식이었다면 모두 다른 이야기로 들렸겠지만, 처음 비판이론을 설명할 때도 이들이 왜 Neo-marxian에 해당하는 지에서 출발했고, 그리고 이들이 놓치던 부분을 Elias가 어떻게 보완하려 했으며, 더 나아가 Habermas와 Giddens, Beck이 비판이론 학자들이 가지던 비슷한 문제의식을 어떻게 20세기 후반 이후 지금의 현대사회로 끌고 왔는지 그 맥락이 충분히 살아있었다.

책의 저자(George Ritzer, Jeffrey Stepnisky)는 Marxist가 경제체제, 특히 자본주의 비판에 초점을 맞춘 반면, Neo-Marxist는 그보다 문화산업에 주목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문화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었던 경제를 대체했다'고 보았다. 물론 경제의 중요성을 경시하진 않았지만, Marxist의 경제결정론(문화나 정치 등의 상부구조가 전적으로 경제라는 하부구조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보는 시각)을 거부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를 다르게 이해하면 Neo-Marxist가 보기에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너무도 견고하게 자리잡아 이를 직접 비판한다고 해서 바뀌리라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보다 그것을 유지시키는데 기여하는 문화산업을 비판함으로서 우회 전략을 썼다고 볼 수도 있다.

스터디에 북한학을 전공한 분이 계셔서 그 분이 북한이탈주민들을 만나며 느낀 경제와 문화의 상호연관성이 드러나는 사례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분들에게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살고 있는 우리 - 특히 청년 - 가 느끼는 불안정이나 위기의식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분명히 일상생활에서의 사고방식과 삶을 경험하는 방식을 아우르는 문화가 일정 부분 경제에 의존하긴 하나, 단순한 일방적인 관계라기보다 자기계발이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넘어 미덕이 된 것과 같이 반대로 문화가 경제를 지탱하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즉 Neo-Marxist의 비판이론은 경제결정론 거부를 넘어 경제와 문화의 관계 재설정을 향한 것이다.

비판이론을 두고 대안보다 비판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이 가장 유명하다고 하나, 내게는 단순히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서라기 보다 논의가 결국 자본주의 비판으로 회귀한다는 문제가 커 보였다. 경제결정론을 거부하고 문화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지만 문화가 자리잡게 된 원인과 그 문화를 유지하는 힘, 그리고 그 대안 모두에서 다시 자본주의를 끌고 들어오다보니 경제결정론을 정말 거부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물론 결국 경제체제에 계속 초점을 맞추고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여겼기 때문에 Neo-Marxist인 거겠지만 말이다.

더 나아가 비판이론에서 technocracy를 너무 가볍게 비판하는 것 역시 마음에 걸렸다. 책에 따르면 비판이론은 technocracy에서 의사결정 기준으로 자리잡은 합리성(rationality)에는 이성(reason)이 부재하다며 합리성의 비합리성(irrationality of rationality)을 꼬집었다. 아우슈비츠에서 유대인을 다양한 방법으로 학살한 데에는 그들 나름의 합리성이 작용했지만 결코 이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보면 얼마나 비합리적이었는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거꾸로 '비합리성의 합리성(rationality of irrationality)'이라고도 할 수 있다. 비판이론 연구자들에게는 홀로코스트가 합리성의 탈을 쓴 비합리성의 상징이겠으나, 당시 현장에서 그 끔찍한 아이디어를 낸 독일의 군인은 분명 합리적이라고 여겼을테니 말이다.

상대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맥락에 따라, 더 나아가 그 사람 혹은 조직,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냐에 따라 무엇이 합리적이고 비합리적인지 뿐만 아니라 이성과 비이성 역시도 결정된다. 홀로코스트는 현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너무도 당연히 틀렸다고 판단을 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 무엇이 합리적이고 무엇이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나? 무엇이 이성적이고 무엇이 비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나? 각자 가치관에 따라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는 이슈에 대해 비판이론은 어떤 비판을 할 수 있나? 이 질문들을 통해 결국 비판이론이 같은 가치체계를 공유하는 사람들만의 것은 아닌지, 또 그 가치체계가 흔들리면 비판 역시 무효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명 일상생활에서 자본주의, 이에 더해 자유주의에 기반한 문화산업에서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한 스터디원은 최근 <그것이 알고싶다>가 드러낸 '벗방'의 산업화를 보며 그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예능에 나와서 감정노동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단지 춤과 노래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지만, 결국 돈이 되기 위해서, 또 본인이 좋아하는 일을 계속 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원치 않아도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자극적인 컨텐츠에 자기 자신을 계속 노출하고 또 감정노동을 해야만 한다. 돈으로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발전해서 몸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N번방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누군가를 노예라고까지 부르며 피해자가 원했다는 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할 수 있게 된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사실 대중문화산업 뿐만 아니라 지식산업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학계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학원에 진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하고 싶은 연구'와 '연구비를 주는 연구' 사이에 발생하는 긴장 혹은 갈등을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운이 좋으면 그 둘이 잘 맞아 간극이 발생하지 않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는 그 사이 어딘가에서 연구를 하게 된다. 이를 두고 단순히 연구비 지원 정책을 비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연구비를 지원하는 데에는 이처럼 누구든지 비판이론 연구자가 말하는 '문화산업 (culture industry)'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본인의 욕구는 어느 정도 왜곡 혹은 굴절시켜야만 한다.

한편 나는 이것이 정말 자본주의 때문인가하는 질문을 던졌다. 경제체제가 다르다고 해서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대중문화인의 감정노동이 사라질 지, 또 연구자들이 느끼는 '하고 싶은 연구'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연구' 사이 갈등이 사라질 지 의문이 들었다. 다른 스터디원은 문화산업에 편입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준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경제체제와 무관한 사회화 과정과도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라고 해서 그런 것들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또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선택지가 줄어들 수도 있겠지만, 재화와 서비스가 거래를 통해 소비와 동시에 사라지는 자본주의에서는 생존을 위해 그 결정들을 당장 내려야 하는 상황이 잦지만 사회주의에서는 조금 더 긴 호흡을 두고 생각할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책을 읽고 스터디를 하며 느꼈던 것 중 하나는 앞에서 내가 지적했던 것처럼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너무도 공고히 자리잡았고 또 그 영향력이 결코 작지 않아 거기서 벗어나는 상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다른 스터디원이 북한학을 전공하면서 실제 사회주의의 모습은 어떻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정확히는 살았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생활했는지를 들려줘서 어렴풋이 다른 경제체제를 그려볼 수 있었다. 동시에 경제체제를 바꾸지 않고서는 비판이론 연구자들이 비판한 대상, 문화산업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인지, 정책을 전공하며 배운 'muddling through' 전략이 통할 길은 없는지 계속 고민하게 된다. 당장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닐테니 질문들을 안고 공부를 이어가야겠다.


작년 초 시작했던 사회학 스터디에서 1년만에 고전사회학 책을 끝내고 현대사회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대학원 다니던 때와 비교해보면 읽는 양은 대폭 줄고 주기는 엄청 늘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하고 있다는 게 어딘가! <<Contemporary Sociological Theory and Its Classical Roots: The Basics>>라는 새로운 책과 더불어 스터디원 2명을 영입해서 5명으로 새출발을 한다. 일찍이 원격으로 진행하고 있던 스터디라 5명이 한꺼번에 모일 일은 잘 없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새로 오시는 분들 모두 초면이라서 조금 긴장이 되기도 한다.

(아, 우리가 한 명 추가 모집 중이기 때문에 혹시 이 글을 읽고 스터디에 관심이 생긴 분이 계시다면 댓글로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작년 멤버들과만 진행한 스터디에서는 현대사회학 책 네번째 단원 <Contemporary Grand Theories 1>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당 단원은 파슨스(Talcott Parsons)와 머튼(Robert K. Merton)의 구조기능주의(Structural Functionalism),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의 갈등이론, 그리고 루만(Niklas Luhmann)의 일반체계이론(General Systems Theory)을 다루었는데, 이전 책이 파슨스와 머튼의 주요 저작을 다루는 것으로 끝났기 때문에 앞부분은 복습하듯 읽을 수 있었다. 반면 다렌도르프는 처음 듣는 사람이라서, 또 루만은 하도 많이 들었지만 체계이론을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하며 읽었다. 여기서는 각 이론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기보다 내가 책을 읽으며 가졌던 의문들과 스터디에서 논의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1. 파슨스이 구조의 기능적 요건(functional imperatives)으로 제시한 AGIL scheme은 이해가 가지만, 그것이 어떻게 기능별 조직(society and subsystem)으로 이어지는지는 모호하다. (http://www.kapa21.or.kr/epadic/epadic_view.php?num=883 참고)

    예를 들어, 경제 내지는 생산조직이 사회에서 적응 기능을 담당한다는 식인데, 사실 기업과 같은 경제-생산조직은 적응 기능 말고도 통합, 목표달성, 체제유지 기능을 모두 담당하고 있으며 다른 조직 (혹은 구조)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생긴 의문인데, 논의를 하다보니 구조기능주의의 체계를 확립한 사람답게 파슨스가 현상을 관찰하고 그것에 맞추어 AGIL scheme을 짠 것이 아니라 '기업 등 경제-생산조직은 마땅히 사회에서 적응 기능을 담당해야만 한다 (그래야 사회가 존속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베버가 이념형을 연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파슨스 역시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을 개념화한 것에 다름 아니고, 사회 하부 조직 및 구조는 그 요소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능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AGIL scheme으로 정리했다고 이해해야 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파슨스로부터 20세기 인간 특유의 사회가 특정 기능을 온전히 수행해야만 유지되고 효율적으로 굴러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강박적인 성격이 보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2. 다렌도르프는 구조기능주의가 갈등을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치부하는 데에 맞서 갈등이야말로 사회 변화를 설명하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며 특정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quasi-group이 interest group으로, 또 다시 conflict group으로 진화함으로서 실제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 quasi-group이 형성되는 조건을 1) 구조적으로 결정될 때, 2) 단순히 운에 따라서로 나누어 전자에서 interest group으로 또 conflict group으로 조직화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사회적 내지는 구조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 곧 의료인이 될 스터디원은 quasi-group의 예로 의료인 집단 전체를 들며 이들은 물론 의료에 종사한다는 공통점 및 이해관계를 공유하지만 의료인이 된 이유는 제각각인만큼 꼭 interest group과 conflict group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일단 의사와 간호사, 병원 운영진 등은 의료인 집단 안에서도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질 것이며, 직업이 같더라도 단순히 돈을 보고 의료인이 된 사람과 어떤 사명을 갖고 의료인이 된 사람 역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뜻이다. 설명을 듣고 다렌도르프가 어떤 생각으로 조직을 나누었는지 이해가 어느 정도 갔지만, 여전히 어떻게 갈등이 표면에 드러나고 실제로 사회를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설명이 더 필요해보였다.

  3. 루만은 갈등이론의 구조기능주의 비판을 반영해서 구조기능주의를 체계이론으로 새롭게 치장한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무엇이 달라졌는지 명확하지 않은 듯 하다.

    이에 대해서는 곧 미국으로 떠날 스터디원이 '구조 형성 과정'에 대한 언급 유무만으로도 크게 달라졌다는 점을 들며 의문을 해소시켜주었다. 즉, 구조기능주의는 구조 내지는 시스템의 질서 유지에 분명한 당위를 부여함과 동시에 그것이 영속적이라고 본 반면 체계이론은 진화론적 관점에 가까워서 사회가 어떻게 재생산하고 또 변화하는지 보다 현실적으로 그려냈다는 것이다.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 구조기능주의는 답할 수 없고, 체계이론은 나름 준비된 답변이 있다.

  4. 마지막으로 책이 미국 정부의 '테러와의 전쟁' 정책 기조를 두고 기능적인지 (Is the "War on Terror" Functional?) 묻는 글상자를 두고도 의미있는 대화가 오고갔다. 그것이 꼭 구조기능주의의 유산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는 어떤 현상을 두고 그것의 순기능과 역기능을 따지며 'net balance of functional consequences'를 고민한다. (조금 더 찾아보니 머튼이 처음 사용한 단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좋았냐 나빴냐를 따지는 건데, 의사결정 차원에서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소 불편한 감이 없지 않은 이유는 실제 사회에서 순기능과 역기능은 플러스나 마이너스와 같이 부호가 정해져있지도, 또 숫자처럼 정량화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순기능은 누군가의 역기능이 되곤 하며, 누군가에게는 크게 순기능인 것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작은 순기능이기도 하다.

    순기능과 역기능을 따져서 결국 net balance가 어떻게 되는지 계산하듯 내리는 의사결정은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방향'이 분명하게 있다고 인식하게끔 만들고, 의사결정 자체가 정치적이며 또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게끔 만든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무엇이 순기능이고 무엇이 역기능인지 따질 때부터, 또 얼마나 순기능 혹은 역기능인지 계산할 때부터 이미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배제하거나 포함시키고 또 얕보거나 과장해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다음 단원에서는 네오맑시즘, 문명화와 식민지화, 근대화를 다룬다. 다음주도 의미있는 스터디가 되기를!


저번 첫번째 스터디로 맑스를 읽은 후 뒤르켐(Durkheim)을 읽는 중이다. 원래 어제 밤에 스터디를 했어야 하나 다들 부족하다고 느껴 일주일을 더 갖고 대신 각자 Durkheim과 관련한 최근 논문이나 글을 읽어서 발제문 형식으로 정리해오자고 다짐했다.

내 경우 <The Rules of Sociological Method> (원제: Les Règles de la Méthode Sociologique) 가 가장 인상깊었는데, 읽으면서 문득 대학원에서 한 선배가 라투어가 쓴 책을 소개해 준 것이 떠올랐다.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 theory>라는 책이었는데, 그 선배가 말하기를 라투어가 ANT 주창 후 하도 이상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아 답답해서 몰이해를 타파하고자 '이것이 ANT다!'하고 쓴 책이라고. 라투어가 쓴 다른 책 <We have never been modern>에 빗대어 'There has been no social -'과 비슷한 주장이라고도 들은 것만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이 안날 뿐더러 내가 책을 읽은 것도 아니니 어디가서 이런 말을 퍼뜨리진 마시길.

어쨌든 Durkheim 글을 읽다보니 분명히 Latour가 그를 비판하지 않았을까 싶어 구글링을 해보니 아니나다를까 Latour는 위 <Reassambling the social>이라는 책에서 ANT를 정립하는 데에 이론적으로 기여한 선지자(predecessor)로 Durkheim이 내세운 'social' 개념을 비판한 Gabriel Tarde를 언급했다고 한다.[각주:1] 

더 찾아보면 직접적으로 비판한 문헌도 있겠지만, 그보다 당장 내 눈을 잡아끈 건 라투어 본인 홈페이지에서 찾은 'Durkheim과 Tarde 간 토론 재연회(?)'다. (Link) 사이트에도 설명이 적혀있지만 다시 간략히 정리하자면, 1903년에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지형, 그리고 타 학문과의 관계를 주제로 Durkheim과 Tarde가 토론을 벌인 적이 있는데, 토론이 있었다는 사실만 책을 통해 전해지고 그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랬구나, 둘은 어떤 대화를 주고 받았을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Latour를 포함한 여러 학자가 이 토론을 재연하기로 했고, 2008년 영국 캠브리지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카메라까지 대동하여 (마치 100분 토론처럼!) 토론 재연회(? 아님 재연 토론회?)를 열었다고 한다[각주:2]. 토론회 대본은 전부 Durkheim과 Tarde 가 쓴 저작물에서 가져와 대화가 이어지도록 일부 수정했다고 한다. 프랑스어로 진행되어 전혀 알아들을 수 없지만 1시간이 조금 안되는 영상도 있다. (Video link) 왼편에 라투어의 모습이 보인다. 그나저나 캠브리지에서 했으면 영어로 했을 법도 한데 프랑스어로 했다니 제대로 재연하려고 했나보다...ㅋㅋ

그 내용은 나중에 정리하도록 하고, 이런 토론 재연회를 해보면 공부가 엄청 되긴 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소장 학자들이 이걸 했다고 하니 뭔가 신기하다. 스터디원들에게도 한번 소개하고 해보자고 제안해야겠다. 

  1. https://en.wikipedia.org/wiki/Gabriel_Tarde [본문으로]
  2. 근데 링크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연구를 위해 비공개로 프랑스에서도 토론회를 진행한 듯 하다. [본문으로]

서원에서 만난 영지 누나의 추진력에 힘입어 새해에 고전사회학이론 스터디를 시작하게 되었다. 관심사가 모두 다른 4명이서 온라인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일단 6개월 동안 2~3주 간격으로 교재의 단원 하나씩(주요 thinker 1명씩) 떼기로!

주 교재: Classical Sociological Theory, eds. Craig Jackson Calhoun, Joseph Gerteis, James Moody, Steve Pfaff and Indermohan Virk (Maiden, MA: Blackwell Publishing, 2007). (2nd edition) (사실 3rd edition이 2012년에 나왔지만 구하기가 힘들어 2nd edition으로 진행하기로... 3rd ed. 링크는 https://www.wiley.com/en-us/Classical+Sociological+Theory%2C+3rd+Edition-p-9780470655672)


부 교재: 나는 다른 스터디원과 다르게 정말 사회학 초짜이기 때문에 <현대사회학>(기든스 8판)과 <사회학의 핵심 개념들>을 함께 참고하며 읽을 예정이다. 

개인적 관심사와의 연결: 최근 중고로 구한 <과학사회학의 쟁점들>(김환석 저)을 읽고 있다. 그 외로 예전에 사놓은 <조직사회학>(유홍준 저)과 <신경제사회학>(유홍준·정태인 저)도 참고할 예정. 

그 외 공부를 위한 소스: Coursera에 <Classical Sociological Theory>라는 제목의 강의가 있다. 암스테르담대학의 Bart van Heerikhuizen 교수가 가르치는데, 스터디 첫번째 모임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Week 1 인강을 들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리딩 전후로 해당하는 주차 강의를 듣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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