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명절 연휴동안 읽은 다른 책을 리뷰하려다가, 전자책으로 읽고서는 따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한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 잘 쓰는 방법>이 눈에 밟혔다. 졸업논문 쓰면서 아무도 논문 작성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현실에 한숨 쉬며 이런 저런 책을 뒤적거렸더랬다. 그 중 한권인데, 나름 실용적인 팁이 많아서 재밌게 읽었다. 물론 학문 분야나 시대 때문에 적용하기 힘든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꽤나 유용한 책이었다.

1. 졸업 논문이란 무엇이며 어디에 필요한가

(Ph.D. 논문의 의미) 

"자신이 전념하는 학문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학자라는 걸 보여 주어야 한다." (p.25)

"논문을 작성한다는 것은 자신의 개념을 체계화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p.32)


2. 테마의 선택

"분야를 제한할수록 작업은 더욱 잘 이루어지고 더욱 확실하게 진행된다 (...)" (p.44)

"소박할지라도 한계를 확정하고, 그 한계 안에서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p.53)

"연구는 이러한 대상(앞서 켄타우로스 예를 들었지만 모든 연구대상을 의미)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들을 말하거나 또는 이미 언급된 것들을 다른 시각에서 재조명해야 한다." (p.72)

"정치적 관심이 많은 학생이 <18세기의 어느 식물학 저술가의 지시 대명사의 반복 사용>에 대한 논문을 쓴다고 해서, 자신의 정치적 관심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p.80)
-> 보다 실천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 정치사회적 관심을 가진 - 학생일 경우 자신의 경험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소명과 연결된 논문을 작성하고 싶을 수 있겠지만 지식 습득과 자료 조사 방법을 익혀 과학적 연구를 수행하는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와 동떨어져 보이는 주제로 논문을 작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맥락)

(정치적 성격을 가진 논문이 쉽게 피상성의 위험에 빠지는 이유에 대해) "수많은 <미국식> 사회 연구 방법론이 수치 및 통계적 방법을 물신화함으로써, 실제적인 현상의 이해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대량의 연구를 산출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치화된 수많은 젊은이들은 기껏해야 <사회 측정법>에 지나지 않는 그러한 사회학에 대하여 불신의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이데올로기적 껍데기로 둘러싸인 체제에서 단지 기능적인 역할을 할 뿐이라고 비난한다." (p.83)


3. 자료 조사

(재인용은 되도록 피하라) 

"내 연구 대상에 의해 확정된 범위 안에서 출전들은 언제나 직접적인 것이어야 한다(...)" (p.113)

"여러분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단 하나, 마치 원문을 직접 살펴본 것처럼 간접적인 출전에서 인용하는 일이다." (p.115)

"간접적인 출전에 의존할 때(그것을 명백히 밝히면서) 주의할 점은, 하나 이상의 출전에서 확인을 하고, 어떤 인용이나 사실 또는 견해에 대한 언급이 여러 저자에 의해 확인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자료에 의존하는 것을 피한다든지, 아니면 원본에서 확인해야 한다." (p.116)


(징징대지 마라(...))

"어떤 테마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아는 것도 없이 지방의 도서관에 가서 세 번의 오후를 보낸 다음에는, 충분히 명백하고 완벽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p.209)


(문헌을 읽어야 하는가? 어떤 문헌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 본문은 책으로 되어 있으나 모든 참고문헌에 해당하기도. 다만, 에코는 문학 분야 논문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은 유의)

"대개 책에 대한 논문은 두 가지 유형의 책들, 즉 언급의 대상이 되는 책들과 언급에 도움을 주는 책들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연구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들이 있고, 또한 그 텍스트들에 관한 문헌들이 있다. (...) 우리는 원래의 텍스트와 비평적 문헌을 구별해야 한다. (...) 우선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곧바로 아주 일반적인 비평적 텍스트 두세 권을 읽는다. 그런 다음 직접 원래의 저자를 접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이해하도록 한다. 그러고 나서 나머지 비평적 문헌을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새로 얻은 생각들에 비추어 저자를 재검토한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이론적인 충고이다." (p.213-4)


4. 작업 계획과 카드 정리

(어차피 계속해서 다시 쓰게 될 서문에 잠정적인 연구 내용과 결론을 담아 생각을 내 중심선에 고정시켜 이탈을 방지하라는 의미)

"졸업 논문 작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들 중의 하나는 바로 제목, 서문, 그리고 최종적인 차례를 쓰는 일이다 - 말하자면 모든 저자들이 마지막에 하는 일들이다." (p.216)

"테마의 범위에 초점을 맞춘 다음에 거기에서 단 하나의 구체적인 관점만을 다루기로 한다는 의미이다." (p.219)

"서문이란 단지 차례에 대한 분석적인 언급일 뿐이다." (p.221)

"차례와 서문을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여러분은 그것이 여러분의 논문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서문을 쓸 수 없다면, 그것은 어떻게 출발해야 할지 아직 명백한 생각을 갖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 여러분이 어떻게 출발해야 할지 명백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최소한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 <의혹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의혹을 토대로 여러분은, 마치 이미 달성한 연구 작업의 서평을 쓰듯이 서문을 써야 한다. 지나치게 앞으로 나아간다고 두려워하지 말라. 여러분이 뒤로 되돌아갈 시간은 언제나 있다." (p.223)

"(최종 버전에서의) 서문은 신중해야 하고, 또한 논문이 나중에 줄 수 있는 것만을 약속해야 한다. (...) 서문은 또한 무엇이 논문의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인가 확정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p.224)

"(가설적인 차례의 의미) 실험적인 성격의 논문에서는, 몇 가지 증거에서 출발하여 이론을 제기하는 귀납적 계획을 세우고, 반면에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논문에서는, 먼저 이론을 제기한 다음 구체적인 실례들에 대해 가능한 적용을 하는 연역적 계획을 세울 수 있다." (p.225)


(인용 문헌 정리하기)

"여러분은 각 장들의 번호가 잘 매겨진 작업 계획(또는 가설적인 차례, 4.1 참조)을 준비한 다음에, 차례차례 책들을 읽으면서 밑줄을 치고 또 각 장들에 해당하는 약자들을 모서리에 표시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업 계획의 각 장들 옆에다 주어진 책에 해당하는 약자와 페이지 숫자를 기록할 것이고, 그럼으로써 원고를 작성하는 순간에 어떤 인용 또는 생각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알게 된다. (...) (이는) 작업 계획이 이미 결정적으로 작성되어 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p.232-3)

"복사물의 소유는 책 읽기를 방해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발생한다. 그것은 일종의 수집 현기증이며, 정보의 신자본주의다. 복사물에서 자신을 지키도록 하라. 일단 복사를 하자마자 읽고 곧바로 기록하라. 정말로 시간에 쫓기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전의 복사물을 소유하기(말하자면 읽고 기록하기) 이전에는 새로운 것을 복사하지 말라. 어떤 텍스트를 복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내가 많은 것들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마치 내가 그것을 읽은 것처럼 안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p.247)

"참고 문헌 카드는 책을 찾는 데 필요한 것이고, 독서 카드는 최종적인 참고 문헌 목록에 기록하듯이 그 책에 대해 말하고 인용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p.267)

"누구든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줄 수 있다." (p.274)


5. 원고 쓰기

"논문이란 우연하게도 단지 지도 교수 또는 심사 위원만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많은 사람들, 또 그 학문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학자들까지 읽고 참조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 작업이다. (...) 무엇보다도 대상 학문의 규범적이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용어들이 아닌 이상, 사용되는 용어들을 정의해야 한다. (...) 우리 논의의 핵심 범주들로 사용된 모든 용어들을 정의해야 한다. (...) 당신의 논문을 펼쳐 보는 누구든 그와 친숙해지도록 서둘러야 한다." (p.276-8)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모두 쓰라. 다만 최초의 원고를 쓸 때에만. 강한 주장이 여러분의 손을 사로잡았다가 여러분을 테마의 중심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을 나중에야 발견할 것이다. 그렇다면 괄호 안의 부분들, 이탈된 부분들을 없애고, 그것들을 주 또는 부록에 넣도록 하라. 논문은 여러분이 처음에 제기한 하나의 가설을 증명하려는 것이지, 여러분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걸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니다. (...) 외로운 천재 놀이를 하지 마라." (p.286-7)


(어떤 언어로 논문을 쓸 것인가?)

"논문의 언어는 메타언어, 말하자면 다른 언어들에 대해서 말하는 언어이다. 어떤 정신 분석가가 정신병자에 대해 설명할 때 정신병자들처럼 표현할 수는 없다." (p.284) -> 논문은 예술과 다르다는 의미

"(반어가 아닌 절대적으로 지시적인 언어 또는 비유적인 언어를 쓰라) 지시적인 언어라는 말로 필자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사물들이, 그것들의 가장 일반적인 이름, 즉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이름으로 지칭되는 언어이다." (p.287)

"어떤 용어를 처음 도입할 때에는 언제나 그 용어를 정의하라. 만약 그 용어를 정의할 수 없다면 그 용어를 피하도록 하라. 만약 그것이 여러분 논문의 주요 용어 중의 하나인데 정의를 내릴 수 없다면,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하라. 여러분은 논문(또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p.293)


(인용의 열가지 규칙)

"비평적 문헌의 텍스트들은, 그것의 권위와 함께 우리의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확인해 주는 경우에만 인용한다. (...) 실제적으로 인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1) 하나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그것에 대해 해석을 가하는 것, (2) 자신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텍스트를 인용하는 것이다. (...)" (p.298)

"해석적 분석의 대상이 되는 구절들은 상당히 방대하게 인용한다. (...) 비평적 문헌을 인용할 때 그 인용문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또는 여러분이 말하는 것을 권위 있게 확인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p.298-9)


(학문적 자부심)

"입을 열기 전에는 겸손하고 신중하도록 하라. 그러나 일단 입을 열었을 때에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져라. (...) X라는 테마에 대해 논문을 쓴다는 것은, 그 이전에는 누구도 그 테마에 대해 그토록 명료하고 완벽하게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의미이다." (p.350)


6. 최종적인 원고 작성

"첫머리를 시작한다는 것은, 여러 문장으로 구성된 하나의 일관적인 문단이 유기적으로 완결되었으며, 논의의 다른 부분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말을 하면서 어느 순간에 이르러 잠깐 중단하고, <알았는가? 동의하는가? 좋다, 그렇다면 계속하기로 하자>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p.355)


원제는 Writing for Social Scientists (1986). 

나는 논문을 포함해서 어떤 글쓰기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때문에 석사 학위논문을 쓰면서 극심한 불안감에 빠질 수 밖에 없었는데,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중고로 구매한 하워드 베커의 <사회과학자의 글쓰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책을 처음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글쓰기나 방법론에 관한 책을 읽었고, 석사학위논문을 제 때 마칠 수 있었다.

현재 같은 책이 2018년 2월 <학자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을 통해서 하워드 베커라는 사회학자를 알게 되었고, 애초에 시리즈로 기획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학계의 술책>, <사회에 대해 말하기>로 이어지는 사회과학자를 위한 글쓰기 가이드 3부작을 모두 구매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90세의 나이로 그가 새로 낸 책 <Evidence>는 느낌상 이 3부작을 아우르는 저작으로 예상된다. (물론 이 책도 샀다.) 쭉 읽고 리뷰할 생각.

아래에 내게 특히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옮겨본다.


1-1. "만약 당신이 연구 초기부터 - 예를 들어 모든 자료들을 모으기 전부터 -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조만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할 수 있다. 자료없이 초고를 쓰면, 자신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더 명료해지며, 그래서 앞으로 수집해야 할 자료들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글쓰기를 통해서 연구설계 방법을 구체화시킬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먼저 연구를 하고 나서 "연구결과를 쓰라"는 좀더 일반적인 생각과 구별되는 것이다." (p.43)


1-2. "개요는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개요를 가지고 글을 시작하면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개요에 의존하여 시작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적어가면서, 가능한 한 빨리 아이디어를 토해내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 - 당신이 작업해야만 하는 미완의 부분은 당신이 방금 적어놓은 다양한 것들이다 - 을 발견할 것이다." (p.102)


 2-1. "해결 불가능한 것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당신은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당신이 생각하는 해결 방식은 무엇인지를, 왜 덜 완벽한 해결책을 선택했는지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설명할 수 있다...(중략)...연구에서 흥미로운 딜레마를 구체화시키지 않았다면,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제기되지도 않았을 것." (p.107)

2-2.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에 대해 글을 써라.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분석의 초점으로 삼아라...(중략)...당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독자에게 털어놓으려면, 당신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으며, 항상 올바른 방법을 알고 결함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p.111-112)


3-1. "만약 혼자 힘으로 과학적 또는 학문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상과학은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을 씀으로써 이해와 지식을 향상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구와 글에서 이런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는데도, 불가능한 것을 목표로 삼음으로써 스스로 실패를 자초해서는 안 된다." (p.213)

3-2.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인식하고, 지배적
인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요소를 찾아내고, 그 문제에 대한 좀더 중립적이고 과학적인 입장을 찾아 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중략)...진지한 학자라면 동일한 주제를 논의하는 경쟁적인 방식들을 일상적으로 점검해야만 한다. 지금 사용하는 언어로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문헌이 우리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이다...(중략)...문헌을 이용하라. 그러나 문헌이 당신을 이용하게 하지는 말라."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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