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박사과정 전준하입니다. 사실 제 지도교수님께서 오늘 제 지정토론 대상인 과학기술인의 인권분과에 집필위원으로 계시는데, 원래도 허심탄회하게 생각을 주고받는 관계이기도 하고, 또 오늘 자리에 계시지 않기도 하니 어느 때보다 솔직한 토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서 세 분과는 한림원에서 제게 요청했던 토론 주제인 과학이 인권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내지는 과학이 인권침해에 쓰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안에 알맞은 발표를 해주셨습니다. 한편, 네번째 분과인 과학기술인의 인권은 어떻게 보면 혼자 주제가 조금 달라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홍성욱 교수님께서도 왜 젊은 과학기술인인가?”라는 질문으로 발표를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오픈포럼에 맞추어 질문을 좀더 명확히 하자면 왜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인가?”가 될 텐데, 이 주제가 단순히 요즘 언론을 통해 워낙 회자되는 이슈라는 이유로 본 프로젝트에 포함된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과학이 인권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에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을 물어야 할까요? 제 대답은 이렇습니다. 인권향상에 기여하는 과학의 출발점은 바로 그 과학을 하는 과학기술인의 인권이 존중받고 보호받는 환경일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인권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습니다만, 인권을 존중받은 경험과 보호받는 환경이 그 사람의 인권의식 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결론을 내린 선행연구가 다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과학이 인권향상에 기여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에 앞서 과학기술인의 인권은 꼭 검토해야만 하는 조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발표를 통해 보셨듯 젊은 과학기술인이 몸담고 있는 연구환경은 인권친화적이지 않습니다. 발표자료에서도 언급이 된 바 있는 올해 한국연구재단에서 발표한 <청년과학자의 연구 및 학업 관련 애로요인 분석> 보고서는 청년과학자의 불편한 연구실 문화 유형을 열정페이형’, ‘워라밸파괴형’, ‘무관심/방임형’, ‘교수재량 남용(불통/독재)’, ‘인격무시/강압형’, ‘연구윤리 위반형’, ‘과도한 잡무 요구형등으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2300여명 중 10%를 넘는 청년과학자가 이 중 하나 이상의 유형과 관련한 애로사항을 호소했고, 각 유형별 응답자 수는 전체 대비 앞의 네 유형에서 2% 정도, 뒤의 세 유형에서 1% 정도라고 합니다.

물론 인권을 논하는 이 자리에 계시는 훌륭한 교수 및 연구책임자 분들께서는 그러지 않겠지만, 제 관찰 결과, 오늘 발표자료나 제가 언급한 것과 같은 젊은 과학기술인이 처한 인권환경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와 그 사례들을 두고 일부 대학본부나 교수들이 일관되게 보인 반응이 있습니다. 바로난 아니야내지는 내 주변에 그런 경우 못 봤다고 하는 부류와 극소수 사례로 일반화하지 말라고 항변하는 부류입니다. 개인적으로 전자의 경우 남궁석 교수님께서 BRIC에 쓰신 칼럼 제목과 칼럼서 다룬 사례만으로도 별 의미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 반응이라는 것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라는 칼럼인데, 글은 직접 물어본 결과에 따르면 나오지 말아야 할 오줌 성분이 분명 수영장 물에서 검출이 된다는 사례를 들고 있습니다.

한편 인권침해를 당한 젊은 과학기술인이 많지 않은데 이러한 일부 소수 사례를 일반화하지 말라는 반응은 보다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교수에 의한 대학원생의 인권침해 사례가 많이 알려져서인지 일부 교수들은 더 나아가 교수 전체를 잠재적 가해자 내지는 범죄자 취급하지 말라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과학기술인의 인권 증진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현실을 소수 인권침해 사례와 다수 문제없는 나머지로 구분하여 그 소수만을 문제 삼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다양한 인권침해 유형이 상존하고 같은 유형 안에서도 사람마다 느끼고 의식하는 바가 다른 현실을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 현실은 최악의 인권환경부터 (아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있는) 최고의 인권환경까지 하나의 연속적인 스펙트럼 위에 그려진 분포도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는 이 분포도를 어떻게 좋은 쪽으로 계속해서 이동시킬 것인가에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저는 홍성욱 교수님께서 발표하신 내용 문제의식과 개선 방향 및 제언 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에 대해 최근 부쩍 늘어난 관심이 현황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이에 기반한 보다 실효성 있는 정책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몇가지 보완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로, 교수님께서는 왜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인가?’라는 질문에 대학원생 인구 증가에 따른 신진 연구인력 공급 과잉을 지적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셨는데, 물론 구조적인 수요-공급 불균형 상태에 놓인 고급과학기술인력시장 역시 빼 놓아선 안되는 요인이겠으나 다른 요인들에 대한 분석도 추가해야 한다고 봅니다. 당장 제 머릿속에 두가지 요인이 더 떠오릅니다. 하나는 연구책임자는 과제를 수주해와 연구비를 조달하고 연구실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되고 그 아래에 있는 젊은 과학기술인들은 그 과제를 수행하는데 급급해하고 가르침을 받기보다 관리되고 있는 연구실의 현실입니다. 오늘날의 교수는 중소기업 사장과 다를 바 없다라는 말을 적잖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연구실에 팽배하고 있는 어떻게든 더 많은 논문과 특허를 내야한다는 성과주의입니다. [JJ1]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에 대한 배경을 분석할 때 이러한 연구시스템의 문제, 물론 이것들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만, 또 이로 인한 연구실 내 문화적인 요인도 함께 그 범위에 넣어야 보다 정확한 현실 인식과 보다 구조적인 개선 방향 및 제언을 도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오늘 발표 뿐만 아니라 많은 젊은 과학기술인 내지는 대학원생의 인권현황에 대한 분석은 누가 봐도 문제인실태조사 결과와 몇몇 눈에 띄는 사례들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선방향과 제언으로 사실 모두가 아는 당연한 내용을 되풀이하곤 합니다. “정당한 정신적/물질적 보상과 인정,” “연구지원의 실질적 확대,” “연구안전 확보,” “인권거버넌스 고도화등처럼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의미가 없다는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제 이보다 한발짝 더 나아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젊은 과학기술인이 가지는 역할과 기능, 그들이 기성 과학기술인(교수 등 연구책임자 급의 시니어 과학기술인)과 맺는 관계와 그 관계에서의 상대적 지위를 살펴봄으로서 그들의 인권과 권리가 침해당하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젊은 과학기술인과 그들의 인권 및 권리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하자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미 다른 곳에서 글을 통해 이 이론화를 시도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는 짧게 결론만 말하자면, 첫째, 오늘날 젊은 과학기술인 내지는 대학원생은 대학과 학문 및 연구생태계가 유지되고 지속되도록 기능하는 메인테이너(maintainer)’라는 것, 둘째, 이들에게 있어 연구책임자 내지는 교수는 곧 의무통과점(obligatory passage point)’라는 것입니다. 특히 저는 후자가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 개선이 요원한 이유 중 하나로 보고 있는데, 이 분석에 따르면 현재 연구책임자 및 교수에게 집중적으로 제도화된 권력을 분산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야 보다 근본적으로 젊은 과학기술인의 인권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과학기술인이라는 범주를 보다 세분화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발표한 자료 중 경제권 항목에서 연구재단의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같은 청년과학자 사이에서도 높은 수준의 소득 불평등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속 대학, 학과 내지는 전공, 연차 등에 따른 차이를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득을 예로 들었지만 연구환경과 문화도 그런 요소에 따라 모두 다를 것입니다. 이들을 모두 젊은 과학기술인으로 묶어 공통점을 찾는 것도 하나의 숙제겠지만, 차차 이들간의 차이점을 분석하는 방향으로 연구를 확장해가야 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제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쓰기 힘들었던 과학뒤켠 기고글이다. ('글쓰기가 두렵다' 포스팅 참고)

원문은 여기에 전부 옮겨오기보다 과학뒤켠 홍보 차원으로 과학뒤켠 블로그에서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링크: https://behindsciences.kaist.ac.kr/2018/10/07/%EB%8C%80%ED%95%99%EC%9B%90%EC%97%90-%EC%83%81%EC%8B%9D%EC%9D%84-%EB%AC%BB%EB%8B%A4/)

과학뒤켠 매 호는 PDF 파일로도 볼 수 있다. 이 글은 파일에서 꽤 뒤쪽에 있고, (링크: https://stp.kaist.ac.kr/0608/view/id/1033) 여기에는 파일이 커서 전체를 첨부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 부분만 잘라서 첨부했다. 

아래에는 개인적으로 가장 쓰기 고통스러웠지만 써놓고 보니 고민했던 것들이 풀리는 기분이라 후련했던 "교수니까 괴수다"라는 소제목을 붙인 부분에서 일부만 인용하겠다. 

차후 과학뒤켠에 실은 내용은 논문이든 책의 한 단원이든 좀더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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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 인권침해 문제는 ‘극소수 괴수’만의 문제일 뿐 ‘대다수 교수’는 문제없다는 사고방식과 태도는 분명 논파할 필요가 있다. ...(중략)... 하지만 괴수와 교수를 나눠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문제를 일으킨 교수를 괴수라는 다른 유형의 사람으로 구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치부한 채 괴수가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과 교수니까 괴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중략)...
교수는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괴수이기도 아니기도 하다. 괴수라는 유형의 사람이 따로 있어 그가 인권 침해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교수도 인권 침해를 할 수 있으며 그 순간 바로 괴수가 되는 것이다. 이는 교수가 아니고서는 괴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논문지도를 모텔에서 해주겠다거나, 훈계라면서 폭언이나 폭행을 일삼거나, 인건비를 횡령하거나 연구저작물을 가져가고, 이를 지적하거나 고발한 대학원생에게 학계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교수에 의한 대학원생 인권 침해 사건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유형은 모두 그가 교수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었던 짓이다. 운 나쁘게 괴수임이 드러나도 대부분 교수로 구성된 징계위원회로부터 휴가에 가까운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받고서 다시 교단에 설 수 있는 것 역시 그가 괴수이기 이전에 교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교수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그가 교수라서 그럴 수 있었다는 생각을 갖고 ‘괴수가 된 교수’를 이해해야한다. ...(중략)... 교수가 어떻게 괴수로 변하는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할 경우 우리는 교수가 대학에서, 특히 대학원생과의 관계에서 어떤 입장과 위치에 서게 되는지, 어떤 요소들이 교수라는 자리를 구성하고 그 중 어떤 것이 괴수를 만드는 데에 기여하는지를 분석할 수 있다. 즉, 괴수를 개인이 아닌 사회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는 제도적 해법을 도출하기 위한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교수는 어떻게 괴수가 되는가?

...(후략: 여기까지 읽을 정도로 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원문을 읽으시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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