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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제주도 자전거일주] 0일차 (출발 전)

나름 한 달 전부터 계획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다녀왔다. 제주도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대학원 선배 2명의 해외 임용 및 유학 송별회 겸 만난 한 교수님께서 부전공 수업 초청강연(?)을 부탁하셨을 때였다. 10월 1일을 말씀하시기에 연차가 많이 남은 김에 3일(개천절), 9일(한글날)을 포함해서 쭉 휴가를 내고서 강의 후에 어딘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의일정이 확정되고 바로 2일에 청주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강의 준비와 더불어 여행 계획을 세웠다. 

대학원에 진학하고서부터는 어디론가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항상 휴양을 떠올렸다. 물론 지역에 따라 해야만 하는 구경은 했지만 주로 먹고 자고 쉬는데 초점을 맞췄다. 예전부터 꿈꿨던 휴양은 숲속에서 별빛보며 잠들고 새소리에 잠을 깨고 햇빛 아래 책을 읽는 (...) 그러면서 동시에 있을 것 다 있고 쾌적한 숙소에서의 하루였다. 하지만 몇 번의 경험 끝에 그런 휴양은 돈도 돈이지만 차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상이 되려 무기력해지자 휴양보다 20대 초반에 했던 여행 경험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어떻게 그랬지 할 정도로 미친듯이 돌아다녔던 기억. 기차로 일주일 안에 우리나라 한바퀴를 돌았던 내일로 여행 (뒤에 들어보니 그 때 같이 갔던 친구는 정말 힘들고 피곤했다고 한다...). 돈 아끼겠다고 러시아 항공에 점심은 항상 샌드위치나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로 때우면서 한달에 15개 도시를 찍고 왔던 유럽 여행. 운전해준 서원 동기 누나와 형의 도움이 컸지만 DC에서 플로리다까지 찍고 올라온 로드 여행 등. 나중에 책 후기를 쓰면 당연히 언급하겠지만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에서 밝힌 여행의 현재성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참고로 휴양은 현재성보다는 과거와 미래로부터의 도피에 가까웠다.

차도 없겠다. 그래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빡세게 매일 달리기만 할 자신은 없고, 지역마다 바다나 명소 구경도 천천히 하고 싶어 4박5일 일정으로 잡았다. 제주도환상자전거길을 대충 5등분하면 50km가 안되니 오전이나 오후를 골라 이동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지역 관광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9월말이 되자 태풍 소식이 들려왔다. 정확히 제주도 가는 비행기를 예약한 2일에 제주도 상륙. 3일은 휴일이라 비행기 표가 없었다. 그렇게 4박5일 일정은 2박3일로 줄어들었다. 국토대장정을 하시던 분들이야 크게 어렵지 않은 코스라고 하지만, 중학교 때 자전거로 지하철 1개역 정도 거리로 통학하거나 대학교 때 가끔 타슈나 친구 자전거 빌려서 어은동이나 궁동 다니던 내게는 좀 과해보였다. 4박5일이면 중간에 다치거나 일이 생겨도 충분히 다른 날에 더 달리면 되는 정도지만, 2박3일이면 해가 떠있는 이상 계속 달리지 않으면 (특히 1, 2일차) 목적지 도착은 요원해보이기 때문이었다. 

고민을 조금 하긴 했지만, 그런데 뭐... 이렇게 된 김에 20대 초반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미친듯이 달려보자. 비행기를 4일 김포 출발 편으로 바꾸고 자전거 대여도 다시 신청했다. 그렇게 아래와 같이 계획을 세우고 혹시 모르니 1일차 숙소만 예약을 해두었다. (취소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1일차: 제주공항 - 중문관광단지

2일차: 중문관광단지 - 성산

3일차: 성산 - 제주공항

찾아 읽은 자전거일주 후기들에서 항상 짐을 어떻게든 적게 들고 가라고 강조했기 때문에 노트북은 사치였다. 옷도 자전거 탈 때 입을 운동복(매일 게스트하우스에서 세탁)과 숙소에서 입을 잠옷만 쌌고, 세면도구와 구급약(수많은 파스)을 챙겼다. 노트북에서 백번 양보해서 전자책 기기를 챙기긴 했지만, 숙소에 도착하면 저녁 먹고 씻고 기록하고 자기 바빴기 때문에 책은 거의 못 읽었다. 대신 매일 기록을 열심히 하긴 했다. 

인터넷에 워낙 도움이 되는 글이 많아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갈 생각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나 계획중인 사람이 있다면 2박3일은 피하라고 딱 한마디만 하겠다. (나머지는 구글링 하면 다른 좋은 글 많으니 그 글들 읽길 바란다.) 2박3일이 불가능한건 아니고 또 본인 라이딩용 자전거가 따로 있을 정도로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여유가 아예 없지도 않겠지만 나와 같은 초보라면 좀 많이 빡세다. 

눈 앞에 펼치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아 잠깐 내려서 사진을 찍을까'와 동시에 '지금 내렸다가 제 시간에 도착 못하면 어쩌지'라는 갈등을 경험하기 싫다면 최소 3박4일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