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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제주도 자전거일주] 2일차 (산방산-성산)

산방산에서 즉석으로 잡은 숙소치고 잠자리가 나쁘지 않았다. 가족운영 게스트하우스인데 밤에 갑자기 셋이서 (아버지-어머니-아들) 야식으로 짜파게티를 끓여먹어서 냄새가 엄청 났던 것 빼고 다 좋았다. 2층 침대에서 자는데 1층에서 잔 아저씨가 코를 골아서 귀마개를 꼈다. 가져오길 잘했다. 덕분에 잘 잤다. 11시에 자서 7시에 일어났으니 딱 8시간 잤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자마자 만마니 않은 오르막길들이 나타났다. 조금 힘들다 싶으면 바로바로 내려서 끌고 걸었는데 그러길 잘했다. 점심 이후부터는 오른쪽 무릎이 살살 아파와서 힘을 주기가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속도를 내기가 힘들어져 더 빨리 지치곤 했다. 오르막길만큼 내리막길도 있었지만 자전거도로 상태가 좋지 않고 차도 혹은 보도와도 구분이 불명확해 속도를 내기가 힘들었다. 자전거 '라이딩'이라고 할만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자전거족의 애환을 십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제주환상자전거길이 잘 되어 있다고 한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상대적으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정말 별로였다. 만든 사람이 자전거를 타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도로가 꽤 잘 닦여있다고 해서 일부러 MTB가 아닌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빌렸는데, MTB 고를 걸 하고 후회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이라 중간중간에 자갈이나 흙이 쏟아져있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냥 도로 자체가 울퉁불퉁해서 자전거가 많이 흔들리고 (특히 속도가 날수록) 덜컹거렸다. 그 때 마다 엉덩이엔 불이 났다. 

더불어 자전거도로나 자전거가 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도 많이 부족했다. 자전거도로가 갓길 위치에 딱 차 한 대 너비로 나있다보니 차가 주차하기 딱 좋게 생겼고, 실제로 2~30분 마다 한번씩은 꼭 주차된 차 때문에 도로가 막혀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문제였던 건 자전거도로가 계속 차도와 함께 있다가 보도와 합쳐지다가를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이었다. 차는 차대로, 걷는 사람은 걷는 사람대로, 자전거는 자전거대로 위험해지기 십상이었다. 심지어 일부 구간에서는 자전거도로 위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 사람이 버스에 타려면 자전거를 막아서야만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어제 일기를 쓰면서 이제는 숙소 예약한 것도 없으니 여유를 가지겠다고 다짐했다. 중간에 멈춰서 풍경도 둘러보고 군것질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원시 부족의 옥수수밭에서 열리는 성인식[각주:1] 마냥 편의점이나 카페가 드문드문 있어 갈까말까하면서 지나친 이후엔 꽤나 오랫동안 또 달려야 다른 편의점이나 카페를 만날 수 있었다. 프랜차이즈 카페나 편의점 보다 동네 카페를 가고픈 마음이 있어서 거르면서 달렸더니 생각보다 휴식과 군것질을 많이 하지 못했다. 점심 포함해서 한 5번 정도 쉰 듯. 물론 중간에 사진 찍는다고 몇 번 더 내리기도 했지만.

자전거 대여 업체에서 준 지도에 추천이라고 표기된 곳들은 추천경로답게 경치가 정말 좋았다. 어제 해질녘에 망연자실한 상태로 본 산방산을 아침에 다시 보니 꽤나 아름다웠고, 나중에 언급할 성산일몰봉 다음으로 표선 해변이 매우 인상깊었다. 부속섬이 없는 지역에서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수평선을 보며 달리다보니 엉덩이 아픈 것만 빼면 붕 뜬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과장을 조금 하자면 태평양을 한 눈에 담은 듯 했다. 보말과 이름이 비슷했던 마을과 남원도 좋았다. 해변이 현무암으로 이뤄지지만 않았더라면 (물론 서핑을 해 본 적 없지만) 서핑하는 사람들이 그려질 정도로 파도도 멋있게 치고 있었다. 자전거만 아니었더라면 뛰어들어 파도를 탔을 수도... 

어제 네이버 지도가 자전거 경로를 안내할 때는 내비게이션 기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길을 헤매면서 어플 신뢰도가 떨어져 오픈라이더라는 어플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배터리가 빨리 닳아 계속 간당간당한 상태로 달려야만 했다. 일부 구간에서는 어차피 쭉 직진만 하면 되니 아예 다 끄고 달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도 사진을 마음껏 찍지 못했다. 그래도 잘한 점을 꼽자면 막판에 숙소 예약하겠다고 배터리를 많이 아껴둬서 성산에서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적당히 여유부리고 부지런히 달리다보니 원래 계획대로 딱 해질녘에 성산에 도착했다. 처음엔 성산일출봉이 잘 보이는 공터에서 노을빛에 반사된 일출봉도 꽤나 멋있어 사진을 찍기 바빴다. 그러다 문득 노을은 어떨까 싶어 서쪽을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감장이 벅차올랐다. 과장 하나도 없이 내가 이걸 보려고 이틀 내내 달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다가 정신차리고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었다. 여태 한번도 뒤로 돌아가서 사진을 찍은 적은 없었는데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 마음에 드는 구도를 찾아 다시 뒤로 힘껏 달리기도 했다. 내가 꿈꿔왔던 일몰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을 '우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제 숙소를 잡아야했다. 성산이 파티의 도시인줄은 몰랐다. 파티가 없는 게스트하우스를 찾기가 힘들었다. 여수에서 이미 한 번 경험을 해봐서 왠만하면 파티가 없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어제처럼 평온하게 지내고 싶었다. 덧없고 재미없는 파티를 뭐하러...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파티 없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니 내일 일출을 보기 위해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아저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진보다 훨씬 후지고 세탁비도 별도로 5천원이나 받았지만... 뭐 그러려니 해야지. 다들 일출 보러 내일 일찍 일어나는 듯한데 나도 가야하나 싶다. 무릎이랑 허벅지 아파서 일출봉에 올라가고 싶진 않은데...  

어쨌든 so far so good! 무릎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는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리라 생각한다...

오늘의 관찰

해안가에 관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종종 보이던데 뭘까. 보통 옆에 큰 액화산소 통이 있고 수산회사 표지판과 같이 있는 것을 보아 수산물을 처리하는 공장 같긴 한데... 근데 왜 액화산소인걸까?

오늘의 식사

아침: 토스트와 달걀. 게스트하우스 주인 말마따나 보기보다 먹을만한 정도. 생각보다 많이 먹었는데 많이 먹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빨리 배고파졌을 듯.

점심: 고기국수. 서귀포에서 노부부께서 운영하시는 한 노포에서 고기국수 먹었다. 맛있었다.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고.

저녁: 피쉬앤칩스. 성산에서 뭘 먹을까하다가 널린 해물뚝배기 대신 국내 유일하게 호주 피쉬앤칩스협회에서 인증을 받았다는 피쉬앤칩스 집을 갔다. 진짜 제대로 된 피쉬앤칩스였다. 글쎄, 물론 내 피쉬앤칩스 기억은 너무 오래되긴 했지만 한입에 딱 좋은 고기를 썼다는 사실과 잘 튀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집이었다. 만족 만족 대만족.

  1.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인상깊어 잊지 않고 있다. 옥수수밭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뒤돌아가지 않고 달려나와야 하는데, 손에 가장 큰 옥수수를 갖고 나오는 게 목표라고 들었다. 물론 옥수수를 딸 수 있는 기회 역시 한 번 뿐.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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