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총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과학과기술> '젊은이의 광장' 섹션에 실은 두번째 글. 

카이스트는 원자력공학과가 있는 몇 안되는 학교 중 하나고, 그중에서도 서울대와 함께 원자력계의 센터로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때문인지 다른 이슈들보다 탈원전 이슈에 대한 논쟁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물론 대부분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였고, SNS를 통해서는 원자력 기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판하는 환경단체나 관계자에 반박하거나 비웃는 글을 많이 봐왔다

물론 나역시 원자력 기술 문외한이다. 독일에 있었을 때 같이 교환학생으로 갔던 형 추천으로 원자력공학개론 수업을 들은 게 다다. 하지만 그래도 원전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원전 역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사회-기술시스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당연히 기술적인 내용, 특히 (한국형) 원전은 안전하다(혹은 후쿠시마와는 다르다)는 수많은 과학적/공학적 연구결과와 증거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그 원전을 운영하는 원자력계, 원전이 위치하는 지역, 크게는 우리나라 전체 사회 역시 원전이라는 사회-기술시스템과 상호작용하는 중요한 요소다. 

기고문은 (당연히도) <과학과기술> 이북 링크(http://ebook.kofst.or.kr/book/201802/#page=88)를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다만 이 글 역시 교열 및 편집을 거치면서 아래 내가 과총에 보냈던 버전과 조금 다를 수 있음(특히 제목이 바뀌었다)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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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문제다

전준하

불안감, 위기감, 공포감.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과총)이 작년말 선정해 발표한 <2017 10대 과학기술뉴스> 중 이슈 부문 뉴스에 대한 평가다. 신고리 56호기 원전 건설 중단 여부를 두고 큰 논란이 일었고, 포항에서는 지난해 경주에 이어 지진이 발생했으며, 계란과 생리대에서 각각 살충제와 발암 물질이 검출되었다. 임기철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원장은 해당 뉴스들을 두고 국민의 불안감과 위기감 쪽에 많이 기울었다현실에 대한 공포감이 이슈에 반영됐다고 해석했다. 남은 이슈 부문 뉴스인 블록체인 가상화폐 열풍 역시 청년층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임기철 원장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김명자 과총 회장은 “밝은 미래를 원하는 국민들의 마음이 10대 뉴스에 반영되었다며 과학기술인에게 더 큰 책임감을 주문했다. 하지만 국민들이 어떤 불안감, 위기감, 공포감을 왜 느꼈는지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원하는 밝은 미래는 요원하기만 할 것이다.

과총이 과학기술이슈 부문 뉴스 중 첫번째로 꼽은 신고리 56호기 원전 건설 중단 논란과 이를 포괄하는 탈원전 논란을 살펴보자. 탈원전 논란에서 불안감, 위기감, 그리고 공포감은 곧 원전 가지는 위험성에 대해 일반 시민들이 느끼는 두렵거나 무서운 감정을 의미한다. 한국갤럽이 작년 7월 수행한 조사에 따르면 원전 위험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의 비율은 26년 전에 비해 줄었으나 여전히 과반(54%)을 차지했으며, 임채영 한국원자력학회 박사 역시 신고리 원전 건설 재개 직후 논란에 대해 그간 원전 안전하다’, ‘안전하지 않다가 핵심 쟁점이었다고 분석했다. 이처럼 우리는 흔히 원전이라는 단어를 주어 자리에 놓고 그 안전성 또는 위험성을 논한다. 원전이라는 기술이 일반 시민들로 하여금 불안감과 위기감, 공포감을 경험하도록 만드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원자력공학자 등 전문가 집단으로 대표되는 친원전 측은 최소한 우리나라 원전만큼은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원전이라는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이관섭 전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이 퇴임하며 직원들에게 원전에 대한 근거 없이 부풀려지고 과장된불안감을 해소하는데 힘써달라고 당부한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더불어 그들은 비전문가인 정부 관계자와 반원전 측 환경단체 등이 원전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이 일반 시민들의 두려움만 증폭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송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공포화위원회가 돼서는 안된다고 지적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탈원전 논란을 단순히 비전문가가 원전이라는 기술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불안감과 공포감에 사로잡혀 부당하게 멈추려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논란을 둘러싼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 역시 매우 단순해 질 수 밖에 없다. 원자력 전문가들이 원전 안전성에 대해 과학적공학적 근거들을 토대로 비전문가 시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하면 될 일이다. 실제로 친원전 측은 공론화위원회가 정부에 신고리 원전 건설을 재개하도록 권고한 결정에 있어 팩트 체크가 유효했다고 평가하면서 앞으로 원자력계가 국민을 더욱 안심시킬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될 탈원전 논란 속에서 이 방법은 얼마나 유효할 것인가?

탈원전 논란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불안감, 위기감, 그리고 공포감이 원전이라는 기술뿐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원전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불안감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불안감은 원전이 하나의 기술이기보다 복잡한 사회-기술시스템에 가깝다는 인식에 기인한다. 이는 원자력 발전을 단순히 여러 과학기술적 요소들의 집합이 아니라, 그 요소들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운영하고 관리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제도까지 포괄하는 체계로 이해한다는 의미다. 공론화위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중단해야 한다고 답한 시민들 중 대부분이 그 이유로 체르노빌,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위험이 상존해서라고 답한 바 있다. (37.7%, 5개 선택지 중 1) 이에 대해 원자력계가 과거 원전사고를 인재(人災)로 정의하고, 원전 기술 자체는 매우 안전하기 때문에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고였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적절한 해명이 될 수 없다. 시민들은 전문가가 보장하는 기술적 안전성 뒤에 수많은 조건들이 달려있다는 것과 그 중 하나만 어긋나더라도 작은 사고에서 큰 재난까지 일어날 수 있음을 이미 잘 알고 있다. 조건들 중 상당수가 사람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때문에 기술적 안전성을 강조하는 전문가 발언은 시민들의 불안감과 공포감을 해소하기 힘들다.   

두번째 불안감은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전문가가 전문가이기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이다. 전문가는 본인 밥그릇이 걸린 문제에 대해 얼마나 진실된 지식을 생산하고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생회는 탈원전 정책이 독단적이고 반지성적이라면서 “(과학기술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당사자이자 전문가 집단인 과학기술계의 의견이 배제되는 데에 유감을 표했지만, 이는 정확히 탈원전 정책을 원자력전문가에게 전적으로 맡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무리 공학도들이 공익을 위한 것이 사익을 위한 것으로 여겨져 정책 결정을 위한 토론과정에서 제외되었다며 분노해도, 여전히 누가 어떻게 전문가 주장이 공익을 위한 것인지 사익을 위한 것인지 판단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남는다. 탈원전 논란에서 원자력전문가가 아닌 환경단체나 탈원전에 찬성하는 원자력전문가가 힘을 얻는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주장이 더 과학적이어서라기보다 명확한 이해관계가 없어 더 객관적이고 중립적일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탈원전 논란 속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해석하기 위한 초점을 원전에서 원전 주위 사람들로 옮기면 우리는 원전은 얼마나 과학기술적으로 안전한가 혹은 위험한가?”라는 질문 대신 원전이라는 사회-기술시스템을 어떻게 문제없이 작동시킬 것인가?”라는 질문과 전문가면서 이해관계자인 원자력전문가의 의견을 어떻게 혹은 얼마나 고려하고 반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원전 주위 사람들에 대한 불안감과 사회-기술시스템 및 전문가-이해관계자의 위치에 대한 질문은 아무리 원전의 기술적 안전성을 보완하고 강조해도 해소하거나 답하기 힘들다. 탈원전 논란이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우리는 그간 주목하지도 대답하지도 못한 두가지 불안감과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과학기술이슈를 두고 시민들이 가지는 불안감, 위기감, 공포감에 대한 편협한 이해는 비단 탈원전 논란에서만 관찰되는 문제가 아니다. 과총은 살충제 계란과 발암물질 생리대 뉴스를 묶어 케미포비아라는 제목을 붙였다. 일반 시민들의 화학물질에 대한 공포감에 초점을 맞춘 명명이다. 하지만 탈원전 논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공포감은 단순히 화학물질을 향한 것이 아니라 유해화학물질을 제대로 관리하는데 실패한 사회-기술시스템과 특정 화학물질을 둘러싼 전문가 집단의 이해관계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과학기술은 시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동시에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어 시민들과 멀어진 것 역시 사실이다. 설명한 두 종류의 불안감과 위기감, 공포감이야말로 이러한 과학기술과 사회가 맺는 관계의 이중성과 모순성을 잘 드러내준다.       

환경운동가로서 흔치 않게 원전을 지지하는 마이클 쉘렌버거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목소리 높여 비판하면서 단숨에 국내 유명인사가 되었다. 원자력공학을 전공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의 주장 역시 다른 원자력전문가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시민들이 원전에 대한 부족하고 잘못된 지식 때문에 공포에 휩싸여 있으니 더 많은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문제는 원전이 아니라 사람이다. 분명 불안감을 느끼는 시민들은 원자력전문가에 비해 관련 지식이 부족할 것이다. 하지만 쉘렌버거가 잘 모르는 사실을 시민들은 알고 있다. 왜 원전을 둘러싼 전문가들이 원자력 마피아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내재하는 위험을 말이다. 시민들이 보기에도, 원전이 문제라기보다 사람이 문제다.


2017년 봄학기 초에 (아마도 내 지도교수님의 주선으로) 과총 임원진이 우리 대학원을 방문하여 대학원생들과 대화 시간을 가졌다. 김명자 과총 회장, 이덕환 교수(과총 부회장) 등 여러 명이 왔는데 그 때 우리 대학원생들의 질문 및 의견이 인상깊었는지 해당 회의 이후 <과학과기술>이라는 과총에서 발간하는 월간지에 '젊은이의 광장'이라는 고정칼럼섹션을 만들어 연재할 기회를 제안해주었다. Why not? 바로 대학원 내에서 필진을 모집하여 돌아가며 작성하기로 하였고, 2017년 4월호부터 연재에 돌입했다. 나는 두번째인 2017년 5월호와 열한번째인 2018년 2월에 기고했고, 본 글은 전자에 해당하는 기고글이다. 

글을 쓸 당시에는 한창 탄핵 이후 장미 대선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장미 대선과 관련한 글을 써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2016년에 <POKAS ON> 잡지에 총선과 관련한 글을 썼으니 괜찮은 후속 글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과학과기술> 해당 과월호가 대선과 관련하여 특집 기획으로 칼럼들을 싣는다고 하기에 급하게 부랴부랴 글 주제를 바꾸어 다시 썼다. 

조금 과격한(?) 글일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의도적으로 거칠게 써보았다. 그런만큼 존댓말을 써서 글을 좀 부드럽게 만들어보려했는데, 과총 분들이 '무섭다'고 표현할 정도였다니 그건 실패한 것 같고... 

그리고 글을 급하게 작성하다보니 아주 심각하고 부끄러운 오류를 저질렀는데,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쇄본 글 중간 연도 표기를 잘못했다. 아래에 올바른 연도인 1973년으로 바로 잡았다. 

본글은 아래 ebook 링크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http://ebook.kofst.or.kr/book/201705/#page=82


참고로, 본 글 말미에 나오는 <역사비평> 학술지의 '과학대통령 박정희' 비판 논문들은 그새 책이 되어 출판되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과학대통령 박정희 신화를 넘어>로 검색해 보시길. 나는 출판알림 받자마자 구매했는데 아직 못 읽고 있다. 읽는 대로 리뷰를 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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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된 과학기술을 넘어

광장의 외침과 촛불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을 이끌어냈습니다. 무릇 이런 역사적인 일에는 그 의미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한 외신은 탄핵을 곧 박정희 신화 및 패러다임의 종식이라는 의견을 전했고, 정치권뿐만 아니라 언론 및 학계에서는 박정희 시대 재평가와 청산 논의가 활발합니다. 혹시 이상한 점을 느끼셨는지요? 탄핵당하고 구속이 된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인데 자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언급됩니다. 박근혜라는 한 사람과 그 정권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이는 과학기술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거의 상식으로 통용되는 ‘박정희는 과학대통령’이라는 명제는 분명 과학기술인들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와 기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테니 말입니다. 설마 순전히 그가 공대 출신이라는 점만으로 – 이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뜻이었다고 전해집니다만 - 응원한 분은 없겠지요. 본 잡지의 발행처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이하 과총)와 관련한 일화가 있습니다. 2010년에 과총은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이라는 책 출판 기념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참석해 예정에 없던 축사를 했다는 점 과 주요 과학기술계 지도자 사이 한가운데에 선 채 찍은 기념사진 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그렇다면 과학기술계에서 나타나는 박정희 패러다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현재 서울시교육감으로 있는 조희연 전 성공회대 교수의 <동원된 근대화>라는 책은 박정희 정권을 ‘개발동원체제’로 규정합니다. 간단히 말해 국가가 근대화라는 헤게모니를 설정하는 데 성공한 후 사회를 강력히 동원하여 개발을 이룰 수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보통 ‘동원’이라는 단어는 주로 군사용어로 쓰여 강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책에서 ‘동원’은 저자가 차용하고 확장하려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처럼 동원 대상의 동의나 자발성 역시 포괄하고 있습니다.

1973*년 과총이 『과학과 기술』에 발표한 ‘과학 유신의 방안’이라는 사실상의 10월 유신 지지선언을 인용하겠습니다. 과총은 “민족중흥을 계속 영도하실 박정희대통령의 취임을 충심으로 경하”한다면서, “과학기술의 총동원 태세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박정희 정권을 전체적으로 ‘개발동원체제’라고 해석한다면, 당시 과학기술계는 더하면 더했지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요즘까지도 과학기술계에서 유난히 군사적 메타포를 지닌 용어가 많이 보이는 것이 단지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과학기술인들이 앞서서 ‘과학기술 컨트롤타워’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 존재와 기능 강화 등을 요청하면, 정부나 정치권은 이공계 대학을 ‘창조경제 전진기지’로 만들겠다고 응답합니다. 군대는 분열을 용인하지 않지요. 이렇게 동원된 과학기술인들은 통일된 집단이 되기를 요구받습니다. 분명 세대에 따라서, 분야에 따라서, 소속 기관에 따라서 의견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른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과학기술계가 내는 목소리는 더더욱 피상적이 되고, 내부 의견 차이를 그저 빠르게 봉합하기 위해 민주적인 방식 대신 지시나 관리가 팽배해집니다.

2015년 대전서 열린 세계과학정상회의의 마지막 날, 분명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일동’의 선언문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채택 당일에야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던 웃지 못할 촌극이 있었지요. 여기에도 “국가번영의 원동력은 강력한 리더십에 있음을 주목”한다는 의미심장한 문장이 끼어 들어가 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많은 분이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마지못해 일어나 선언에 동참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4차 산업혁명이던, 창조경제던, 녹색성장이던, 정권에 따라 이어지는 그 의미가 불분명한 캐치프레이즈에 과학기술정책이 휩쓸리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여전히 과학기술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동원됩니다.

보다 일상적인 곳에서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이공계 대학원 연구실들은 그 메커니즘이 ‘동원’이라는 단어와 꼭 어울립니다. 대학원생이 연구실의 일원이 되는 순간 그는 국가 및 산학 연구개발과제를 수행하는 학생연구원이 됩니다. 연구실의 관리자라고 할 수 있는 교수는 연구실에 소속된 대학원생들을 말 그대로 먹여 살리기 위해 과제를 따오기 바쁘지요. 더 많은 실적은 더 많은 과제 및 연구비를 요구하고, 더 많은 과제와 연구비는 더 많은 대학원생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커진 연구실들은 박사학위를 가진 졸업생들을 다수 배출하지만, 막상 졸업생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습니다. 잠시 과제를 위해 동원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연구비가 없다, 대학원생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연구실 역시 수두룩합니다. 연구실마다 동원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어떤 연구실에서나 대학원생들은 그저 동원 대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의무 내지는 전적으로 강제에 의한 동원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면 최저임금도 못 받는 이 나라의 군인과 크게 다르지 않지요.

최근 달라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면 국가나 대학이 대학(원)생들을 창업에 동원하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창조경제’를 폐기한 정부는 이제 구체적으로 대학을 창업의 전진기지로 육성하겠다고 합니다. 창업석사과정을 만들고 창업을 위한 각종 재정지원사업과 펀드를 조성하며, 과학기술원 총장 성과계약서에도 ‘창업 활성화’ 항목을 넣는다고 합니다. 당장 대학을 ‘창업사관학교’로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옵니다.

물론 창업이 활성화되면 좋겠지요. 하지만 정부가 창업에 도전하는 학생들에게 법인 설립만을 강조하고 정책 성과 지표인 총투자금액이나 벤처기업 수 등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여러 창업정책이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또 정책사업실적을 위해 청년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뿐입니다. 이런 접근이 질 좋은 창업을 많이 배출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 과학기술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논할 때 ‘동원’이라는 개념을 빠뜨린 채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이를 곧 과학기술계에서의 ‘박정희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이 패러다임은 여전히 공고해 보입니다만, 여러 정황을 살펴봤을 때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면 갈수록 많은 과학기술인이 이 동원 체제의 모순성을 경험하고 또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상식이라고 이야기했지만, 학술지 『역사비평』은 최근 “’과학대통령 박정희’라는 신화”라는 제목으로 섹션을 기획하고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증거에 기반을 둔 연구를 통해 과학기술계에 팽배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인식 전환을 꾀하는 노력이지요. 대선을 앞둔 다양한 계층 및 분야의 과학기술인들은 직접 과학기술정책을 제안하기 위해 수평적인 타운홀 미팅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몇몇 과학기술인들은 크라우드 소싱을 통해 직접 시민들이 제공한 연구비로 연구를 수행하기도 하며, 동원되기만 할 뿐 목소리는 잊혀 온 대학원생들과 시간강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논의가 한창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자그마한 노력들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본 칼럼 섹션 제목인 ‘젊은이의 광장’은 말 그대로 젊은 사람들, 흔히 말하는 2~30대의 청년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그보다 5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낡은 ‘동원’ 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메커니즘을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 이식하려는 모든 사람이 모이는 공간입니다. 마지못해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각자 정말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연구주제, 과학기술에 부여하는 의미, 과학기술을 통해 지키고자 하는 가치 등을 외치고 공유할 때, 과학기술계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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