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죽음은 갑작스런 죽음뿐이었다. 

갑작스레 심장마비가 오거나, 갑작스레 사고를 당하거나, 갑작스레 살해를 당하거나. 그런 죽음만을 상상해왔다. 늙어 죽는 건 차마 두려워서 생각하지도 않았다. 추할까봐서가 아니다. 두 죽음을 상상한 맥락이 달랐다. 

무서워서 떠오르기도 전에 애써 다른 생각하느라 바빴던 건 철없던 시절 죽음이란 무엇일까, 즐겨보던 만화 데스노트에서 말하듯 무(無)일까. 그렇다면 무(無)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다. 지금 이 순간 너무도 확실히 존재하는 나로서는 없어진다는 게 너무도 까마득해서 두려웠다.

반면 갑작스런 죽음은 내가 숨고 싶을 때, 사라지고 싶을 때, 내일이 오는 게 두려울 때 문득 떠올랐다. 물론 적극적으로 죽고 싶었던 적은 없다. 단지 잠에 들면서 내일 눈이 떠지지 않았으면, 달려오는 저 차가 나를 들이받았으면, 저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 숨기고 있던 무언가로 나를 찌르거나, 내리치거나, 목졸랐으면. 그게 다였다. 그런 갑작스런 죽음이 오히려 편안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때, 나 역시 아무런 대비도 못했을 때, 그 때 죽음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적잖이 했다.

물론 돌이켜보면 주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을 때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이제는 나도 잘 안다. 어떻게든 잘 자려고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내 위로 역시 거진 '일단 잠이라도 잘 자라'는 말이다.

한편 내가 비교적 가까이서 경험한 다른 사람의 죽음은 너무도 느린 죽음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중학생 때 시작한 암 투병을, 그로부터 무려 10년이 지난 후에야 끝내셨다. 모두가 예상한, 심지어 당신 역시 충분히 대비한 죽음이었다. 병원에서의 연명치료가 모두에게 고통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다.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자리를 옮기신 지 며칠만에 돌아가셨다. 

명절 때마다 내려가서 봬었던 할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그렇게도 아끼던 손주들 보고서 반가워 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얼릉 뒤져야 하는디'라고 했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으셨던 건지, 아니면 밤이 되어 어두워질 때마다 죽음이 두려워 생각을 바꾸신 건지, 그 힘겨운 항암 치료와 연명 치료를 그토록 길게도 견뎌내셨다. 그렇게 끝까지 버티다 고통에 못이겨 뻔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책이 넌지시 어리석다고 말하는 그 죽음이었다.

우리 엄마가 맏며느리라는 이유로 병수발을 들었다. 물론 내 일은 아니었기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나중에 듣자하니 최소한 할아버지나 고모들만큼, 아니 그 이상을 고생했던 것 같다. 그동안 엄마가 참 많이 힘들어했다. 할머니는 옛날부터 엄마를 참 싫어했다. 그토록 당신이 원하던 고추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명절 때마다 엄마를 울렸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가끔씩 '그렇구나'하고 마는 관찰자였다.

할머니 장례식 때, 특히 염습과 입관을 지켜볼 때 엄마는 거의 쓰러지다시피하며 울었다. 나는 도대체 이 과정을 왜 모든 가족과 친척이 보는 앞에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엄마가 왜 그렇게 우는 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나는 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되도록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서로에 대한 미움을 거뒀길 바랐다.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지만 꿈에서라도 할머니가 엄마한테 고맙다고 하거나 용서를 구한 건 아닐까. 끝내 그 마지막 순간에 엄마도 할머니를 용서함과 동시에 미워했다는 사실에 용서를 구한 것 아닐까. 두 불완전한 여성의 이별을 불완전 이하의 무책임한 남성은 눈물 없이 관찰하고만 있었다.

모두를 힘들게 한 그 어리석은 죽음을 긴 시간동안 내내 목격하고서도 '저렇게 죽지는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안했다면 당연히 거짓말일테다. 그렇게 책을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말 나는 때가 되었을 때 다른 무언가를 위해 조금 더 이른 죽음을 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겐 정말 그럴 용기가 있나?

당연히도, 지금 내 대답은 '아니오'다. 물론 며칠 혹은 몇 개월, 기적이 일어난다면 몇 년이라는 내 수명 - 물론 그게 고통 속일지라도 - 과 바꿀만한 게 지금으로선 마땅치 않다. 그래서 거꾸로 생각해보았다. 내 수명과 바꿀만한 가치를 찾는 것, 그리고 그 가치를 위해 하루하루 사는 것, 그게 죽기 전까지 해야 할 일 아닐까. 그래야 그 순간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을 읽게 된 건 다름 아닌 회사 세미나 때문이었다. 올해 초에 이미 회사 대표님이 승진자들한테 선물로 이 책을 나눠준 바 있는데, 대표님이 책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인지 그 이후로 계속해서 이 책 이야기를 하시고 사업에서도 책이 지적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는게 눈에 보였다. 우리 부서에서도 매달 진행하는 책 세미나 때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책을 받고 나서 점심시간마다 틈틈이 읽었더니 한달 정도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을 갖고 있어 나 역시 처음에는 약간의 오해를 했는데, 이 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루지는 않는다. 조금 더 명확히 하자면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가깝다. 물론 여전히 큰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아니면 충분히 오래 살았기 때문에 죽음이 가시권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즉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과 그 가족이 하는 고민이라 한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의학 기술의 발전 덕에 돈과 의지만 있으면 병원에서 치료 혹은 연명수단을 통해 충분히 죽음을 미룰 수 있는 시대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우선 책을 읽으면서 책 원제가 참으로 탁월하다 느꼈다. Being Mortal. 마치 언젠가는 죽음을 정복할 것처럼 현대의학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낼 지 결정해야만 한다. 반면 제목 번역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니, 너무 진부하잖아.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덮고나니 저 질문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툴 가완디라면 (그가 쓴 다른 책들 제목을 살펴보면 모두 한두 단어다) 절대로 부제를 붙이지 않았을테지만, 붙였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말이지 않았을까. 물론 'How to die'는 아니었겠지만. ('How to give a death'가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아툴 가완디는 책의 앞부분에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오늘날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이루고 있는 일종의 패러다임을 설명한다. 

첫째로, 현대 사회에서 삶에서 독립(혹은 자율)은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가족의 범위는 줄어들었고, 부모와 자녀마저도 특정 시기가 되면 당연하게 서로 독립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삶은 도와주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미안한 일이 되었다. 

둘째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 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p.15) 실제로 인간의 수명은 계속해서 연장되고 있다. 맞닥뜨리면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려야했던 수많은 질병 역시 정복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툴 가완디는 이 삶과 죽음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분명히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은 언젠가 분명히 독립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죽음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생명이 자연스럽게 꺼지는 과정이다. 이 두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갑작스레 눈앞에 죽음을 목도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들이 보다 행복하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텐데, 저자가 몸담고 있는 현대의학계를 포함해서 현대 사회 전체는 아직도 이 문제를 직면하고 있지 않다. 단적으로 의학계에서는 질병 정복이 노인 돌봄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로 여겨진다.

책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아툴 가완디는 본격적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해법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노령에 접어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병실을 비우기 위해 시작된"(p.116) 어빙 고프먼이 말했던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 사례로서의 요양원 대신 정말 사람이 중요한 '어시스티드 리빙(assisted living)'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말뿐인 어시스티드 리빙은 그저 노인의 자녀들에게 안심만을 심어주고 노인을 생각하지는 않는 곳과 다를 바 없다. 

저자 역시 어떻게 하면 어시스티드 리빙이 정말 성공할 수 있는지 - 사업 차원으로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의 만족 차원으로나 - 뚜렷한 정답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관심사가 일상적인 기쁨과 가까운 가족과 친구로 바뀐다는 '사회정서적 선택 이론'이나 시설에 동물을 들여놓으며 노인들이 조그마한 충성심(loyalty)을 가질 수 있도록 함으로서 활력을 불어넣은 '에덴 얼터너티브 프로그램' 등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할 뿐이다. 그는 물론 제대로 된 '어시스티드 리빙'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한다.  

아툴 가완디가 책 중반부에서 제도 차원의 해법을 찾고자 했다면 말미에서는 보다 미시적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 노인 혹은 환자와 그 가족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야기 한다. 물론 우리는 죽음이라는 너무나도 무거운 주제 앞에서 그래도 희망을 노래할 수 밖에 없고 아무리 현실적이더라도 부정적인 말은 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생기는 단순히 경제적만은 아닌 낭비와 피해가 심하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싸우는 방식에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것들, 이를테면 가족, 여행,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을 위해 싸우는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을 때 나누는 일련의 대화"인(p.283) Breakpoint discussion이 중요한 이유다. 

저자는 경험많은 의사답게 의료진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학생 시절 읽었던 의료윤리학 논문 주장을 빌려 의사와 환자가 가부장적(paternalistic, 의학적 권위를 가진 의사가 본인이 생각하는 최선의 처방을 제공하는 것)도, 단순히 정보만을 주는(informative, 환자가 알아서 선택할 수 있도록 의사가 여러 선택지와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닌 해석적(interpretive) 관계로 재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석적 관계에서 "의사의 역할은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p.308) 물론 이 해석 과정은 지난하기 마련이고 환자의 욕구 역시 분명하지 않거나 변하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해서는 안되는 관점이기도 하다.

책이 그리는 죽음은 '한편의 이야기를 완결짓는 과정'이다. 그리고 완결에 다다른 사람들에겐 선택지도, 그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할 시간도 많지 않다. 그 과정을 본인의 일로 직접 고민한 사람들은 모두 얼마 안가 스러졌기에 여전히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죽음을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독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그 어렵고, 무섭고, 두려운 고민을 하게 만들 것인가? 단순히 아툴 가완디 본인이 의사라서 책의 상당 부분을 환자 사례로 채운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저자의 아버지가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저자도 어쩔 수 없이 경험하는 갈등은 여러 사례 중 하나일 뿐이지만 읽는 사람에게 가장 와닿을 뿐만 아니라 책이 한 권으로 마무리되는데 큰 기여를 한다. 

죽음에 대한 수많은 글은 다소 뻔하게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심지어 당장 죽을 수도 있다'며 공포를 불러일으킨 후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곤 한다. 아툴 가완디의 책은 달랐다.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글이었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만 한다. 언젠가는 나 역시 떠나야만 한다.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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