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가는 비행기에 올라탈 때도, 제주도에 도착할 때도, 심지어 빌린 자전거 페달 위에 첫 발을 딛을 때 조차도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한다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시내에서 제주환상자전거길에 진입하기 위해 5km 가량을 달리면서 생각보다 몸이 무겁고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이후 하루종일 내내 이런저런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해가 지기 전에 예약해 둔 숙소 위치인 중문관광단지까지 갈 수 있을지 가장 크게 우려했고, 마음이 급해져서 시간을 줄여보겠다고 이리저리 환상자전거길이 아닌 다른 도로에 들어갔다 빠져나왔다를 반복하다보니 오히려 길을 헤메곤 했다. 미끄러운 비포장도로와 상대적으로 교통이 복잡했던 시내거리를 지난 걸 생각하면 결국 그냥 자전거길 쭉 탄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여유가 너무 없었고, 가장 기대에 부풀 여행 첫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치에 감탄하기보다 시간과 내 위치를 확인하기 바빴다.

사실 불안감의 시작은 자전거 대여업체였다. 분명 후기에서는 자전거도 좋았다고 하고 설명도 친절하게 해주고 여러 서비스도 부족함없이 받았다고 해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고맙게도 공항에서 픽업해 주긴 했지만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이후 아무 말이 없었고 알바로 보이는 사람은 정말 대충만 설명해주고 빨리 나를 내보내려고만 했다. 워낙 자신이 없어서 일정에 대한 점검과 각종 팁을 듣고도 싶었는데, 그런 것 없이 바로 출발해야만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달아준다고 기재되어 있었던 후미등조차 달아주지 않아 해가 지면 무조건 일주를 멈춰야만 했다. 자전거도 생각보다 낡았고 펑크가 났을 때는 아무리 업체에서 추천하는 보험을 들더라도 몇 시간은 멈춰서 기다려야만 하는 듯 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물통 거치대도 부러졌다. 부러져서 날카로워진 거치대를 보며 타이어 펑크 보험을 들었어야했나하고 생각했다. 아직도 걱정된다 남은 이틀 동안 잘 버텨주었으면...

급하게 달리고 달려서 산방산까지 첫 날 찍어야 하는 인증센터는 어떻게 다 찍긴 했다. 하지만 산방산 인증센터 도착하니 이미 해질녘이었다. 숙소 위치인 중문관광단지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었기 때문에 한 2시간은 걸리는 상황. 지금 생각해보면 빨리 결정내렸어야 했는데 숙소 예약 금액이 아까워서 그랬는지 1) 자전거가 들어가는 대형택시를 불러서 숙소까지 이동할 지, 2) 숙소 버리고 그냥 산방산 근처에서 남는 방 있는 곳으로 들어갈 지, 3) 자전거도 중간 반납하고 택시타고 이동해서 아예 새롭게 남은 일정을 계획할 지 고민했다. 지칠 대로 지쳐서 3번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

하지만 길바닥에 앉아 찾아보니 1번도 불가능했다. 대형 택시가 있다는 콜택시 업체 몇 군데에 연락했지만 모두 산방산 근처엔 없어서 힘들다고 했다. 결국 근처 게스트하우스를 찾았고. 그 결과 여기 와 있다. 연 지 얼마 안 되어 시설도 나쁘지 않고 주인도 친절하다. 버린 숙소 비용이 아깝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만족.

다소 당황한 상태로 출발하고 또 당황스러운 기분을 안고 오늘을 마무리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역시 타인의 호의를 당연하게 기대하면 안되는 거였다. 아무리 내가 돈을 주고 산 서비스라고 하더라도. 자전거 대여업체도 그렇고, 중문 쪽 숙소 주인도 당황한 내 기준에서는 친절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조언 또는 도움을 요청하는 내 연락에 본인한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묻고 본인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을 뿐...)



마음이 여유롭지 않다보니 바다 풍경에도 빨리 익숙해졌다. 아니, 감흥을 쉽게 잃었다고 해야하나. 급하게나마 찍은 사진들을 보면 참 아름다운데 말이다. 그래도 역시 남들 다 가는 지역만 다니는 게 아니라 해안도로 따라서 관광지가 아닌 곳도 지나다보니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다. 또 역시 몸이 고생하니 (지금 당장 피곤해서 일수도 있지만) 잡생각이나 원래 하던 고민들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에 대한 부채감은 남아있지만... 바로 여행을 와서 그런 지 어제 본 <조커> 여운도 길지 않다. 기생충과 다르게...

아래는 몇몇 관찰 결과.

1. 백년초 밭이 있다. 당연한 건가? 그나저나 옛날에 한창 백년초 열매 맛 무언가가 뜨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엔 찾기 힘든 듯 하다. 기억에 남는건 백년초 열매 맛 젤리가 들어있던 떠먹는 요구르트인데 못 본 지 꽤 됐다. 맛있었는데.

2. 제주도 학교 운동장은 천연잔디다. 관리도 대개 잘 되어 있는 듯 해서 정말 학생들이 쓰는 운동장 맞나 싶기도. 부럽다 부러워.

3. 제주도도 공기가 안 좋으면 별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 아쉬운 이유인데, 오랜만에 다시 보는 바다 풍경이 좋으면서도 시야가 뿌옇다보니 바다와 하늘이 청명하지 않았다. 태풍이 왔다 가서 공기만큼은 좋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다.

4. 풍력발전소 소음이 생각보다 엄청 크지는 않다. 그런데 바람이 세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3~4대에 1대 꼴로 작동을 안하던데 원래 그런걸까?

그리고 첫 자전거일주 경험에서 느낀 점 몇 가지. 

1. 엉덩이 진짜 엄청 아프다. 마찰 때문에 피부가 아픈 건지, 계속 눌려서 근육이 아픈 건지 분간이 안된다. (둘 다 아픈 거다) 아픔에 적응하다보면 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일어날 때 확 아프다. 그래도 계속 앉아 있으면 엉덩이를 계속 압박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자세를 바꾸거나 일어나서 타자.

(두꺼운 안장으로 교체했다는 자전거 대여업체 알바한테 최대한 엉덩이 안 아픈 걸로 해달라고 했는데 알바가 살짝 비웃으며(?) '엉덩이가 안 아플 수는 없어요'라고 했다.)

2. 해가 지평선에 걸리기 시작하면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6시반 즈음 되면 더 가기보다 근처에서 숙소를 물색하는 게 좋을 듯. 후미등도 없으니 더더욱.

3. 생각보다 라이딩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쉼터나 인증센터에서 가끔씩 만나긴 하는데, 무엇보다 나처럼 혼자 다니는 사람은 정말 없다. 

4. 쉬는 게 정말 중요하다. 여유가 없을수록 더더욱. 1시간에 5분 가량 휴식을 2회 정도 가지는 게 좋은 듯 하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그래야 근육경련 오기 직전 상태까지 다다르고서도 다시 풀린다. (제발 내일 아침에 안 아프길)

아래는 오늘 먹은 것들.

아침: 엄마가 싸준 치아바타 샌드위치 + 달걀. 역시 든든했다. 덕분에 힘차게 출발할 수 있었다.

점심: 협재칼국수에서 해물칼국수를 먹었다. 칼국수를 좋아하진 않지만 근처에서 그래도 제주도니깐 먹을만한 음식이 해물이었고, 혼자 빨리 먹고 다시 달려야했기에 먹었다. 해물이 많이 들어있었다는 것 말고는 그저 그랬다. (13000원)

저녁: 올레식당(맞나?)에서 1인 생선구이 정식을 먹었다. 생선 종류가 불명확한데 조금 기름졌던 것을 제외하면 만족했다. 살이 많았고 바싹 구워 가시도 잘 씹혀서 먹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밑반찬도 나쁘지 않게 나왔다. (9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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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한 달 전부터 계획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다녀왔다. 제주도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대학원 선배 2명의 해외 임용 및 유학 송별회 겸 만난 한 교수님께서 부전공 수업 초청강연(?)을 부탁하셨을 때였다. 10월 1일을 말씀하시기에 연차가 많이 남은 김에 3일(개천절), 9일(한글날)을 포함해서 쭉 휴가를 내고서 강의 후에 어딘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의일정이 확정되고 바로 2일에 청주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강의 준비와 더불어 여행 계획을 세웠다. 

대학원에 진학하고서부터는 어디론가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항상 휴양을 떠올렸다. 물론 지역에 따라 해야만 하는 구경은 했지만 주로 먹고 자고 쉬는데 초점을 맞췄다. 예전부터 꿈꿨던 휴양은 숲속에서 별빛보며 잠들고 새소리에 잠을 깨고 햇빛 아래 책을 읽는 (...) 그러면서 동시에 있을 것 다 있고 쾌적한 숙소에서의 하루였다. 하지만 몇 번의 경험 끝에 그런 휴양은 돈도 돈이지만 차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상이 되려 무기력해지자 휴양보다 20대 초반에 했던 여행 경험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어떻게 그랬지 할 정도로 미친듯이 돌아다녔던 기억. 기차로 일주일 안에 우리나라 한바퀴를 돌았던 내일로 여행 (뒤에 들어보니 그 때 같이 갔던 친구는 정말 힘들고 피곤했다고 한다...). 돈 아끼겠다고 러시아 항공에 점심은 항상 샌드위치나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로 때우면서 한달에 15개 도시를 찍고 왔던 유럽 여행. 운전해준 서원 동기 누나와 형의 도움이 컸지만 DC에서 플로리다까지 찍고 올라온 로드 여행 등. 나중에 책 후기를 쓰면 당연히 언급하겠지만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에서 밝힌 여행의 현재성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참고로 휴양은 현재성보다는 과거와 미래로부터의 도피에 가까웠다.

차도 없겠다. 그래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빡세게 매일 달리기만 할 자신은 없고, 지역마다 바다나 명소 구경도 천천히 하고 싶어 4박5일 일정으로 잡았다. 제주도환상자전거길을 대충 5등분하면 50km가 안되니 오전이나 오후를 골라 이동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지역 관광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9월말이 되자 태풍 소식이 들려왔다. 정확히 제주도 가는 비행기를 예약한 2일에 제주도 상륙. 3일은 휴일이라 비행기 표가 없었다. 그렇게 4박5일 일정은 2박3일로 줄어들었다. 국토대장정을 하시던 분들이야 크게 어렵지 않은 코스라고 하지만, 중학교 때 자전거로 지하철 1개역 정도 거리로 통학하거나 대학교 때 가끔 타슈나 친구 자전거 빌려서 어은동이나 궁동 다니던 내게는 좀 과해보였다. 4박5일이면 중간에 다치거나 일이 생겨도 충분히 다른 날에 더 달리면 되는 정도지만, 2박3일이면 해가 떠있는 이상 계속 달리지 않으면 (특히 1, 2일차) 목적지 도착은 요원해보이기 때문이었다. 

고민을 조금 하긴 했지만, 그런데 뭐... 이렇게 된 김에 20대 초반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미친듯이 달려보자. 비행기를 4일 김포 출발 편으로 바꾸고 자전거 대여도 다시 신청했다. 그렇게 아래와 같이 계획을 세우고 혹시 모르니 1일차 숙소만 예약을 해두었다. (취소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1일차: 제주공항 - 중문관광단지

2일차: 중문관광단지 - 성산

3일차: 성산 - 제주공항

찾아 읽은 자전거일주 후기들에서 항상 짐을 어떻게든 적게 들고 가라고 강조했기 때문에 노트북은 사치였다. 옷도 자전거 탈 때 입을 운동복(매일 게스트하우스에서 세탁)과 숙소에서 입을 잠옷만 쌌고, 세면도구와 구급약(수많은 파스)을 챙겼다. 노트북에서 백번 양보해서 전자책 기기를 챙기긴 했지만, 숙소에 도착하면 저녁 먹고 씻고 기록하고 자기 바빴기 때문에 책은 거의 못 읽었다. 대신 매일 기록을 열심히 하긴 했다. 

인터넷에 워낙 도움이 되는 글이 많아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갈 생각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나 계획중인 사람이 있다면 2박3일은 피하라고 딱 한마디만 하겠다. (나머지는 구글링 하면 다른 좋은 글 많으니 그 글들 읽길 바란다.) 2박3일이 불가능한건 아니고 또 본인 라이딩용 자전거가 따로 있을 정도로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여유가 아예 없지도 않겠지만 나와 같은 초보라면 좀 많이 빡세다. 

눈 앞에 펼치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아 잠깐 내려서 사진을 찍을까'와 동시에 '지금 내렸다가 제 시간에 도착 못하면 어쩌지'라는 갈등을 경험하기 싫다면 최소 3박4일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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