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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강릉 가을방학 2일차 (10월 5일)

아침 6시쯤 일어나 일출을 보고 경포호를 한바퀴 뛰려고 했는데, 어젯밤에 생각보다 일찍 못 자고, 또 아침에 침대가 너무 포근해서 일어나지 못했다. 에어비엔비에 마약침대라며 자기만 했다는 리뷰가 다시금 생각났다.

일어나기로 한 시간보다 3시간이나 늦게 일어나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스트레칭을 한 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 제목은 <자동화 사회>. 두달 전부터 대학원생노조를 통해 알게 된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독서모임('사과나무')에 참여하며 읽고 있는 책이다. 워낙 내 관심분야와 맞닿아 있어 작지 않은 기대를 품고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내가 철학에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저자인 베르나르 스티글러가 글을 어렵게 써서인지, 번역이 안 좋아서인지, 일주일에 한 장을 읽기가 그렇게 힘들었다. (물론 내가 매우 게을러서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모임도 빠지고, 책도 못 읽는 주가 쌓이다보니 마지막 모임만을 남겨두고도 나 혼자 책 절반을 못 읽은 상태에 다다랐다. 때문에 이번 연휴를 틈타 책을 완독하고 모임에서 이야기가 나왔던 서평도 써볼까 했다. 사실 모두 강릉에 와서가 아니라 추석 연휴 때 집에서 하려던 것들이다. 결국 이 두꺼운 책을 강릉까지 들고 온 건 추석 연휴 때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금 내 게으름이 놀라울 뿐이다.

흐름을 탔을 때 일주일에 한 장 씩 꾸준히 읽었다면 모르겠지만, 어렵다보니 너무 읽기가 싫어져서 조금 문턱을 낮추고자 스티글러가 독자들이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가정하는 시몽동의 철학을 공부하고 읽기로 했다. 마침 리디북스에 찾아보니 <질베르 시몽동>이 있어 다운받아 읽기 시작했다. 워낙 오랫동안 시몽동을 연구하고 적지 않은 논문과 책을 쓴 저자가 정리한 책이라서 그런지 매우 친절했고, 또 그동안 감이 전혀 오지 않았던 개념을 익힐 수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해변 가까이에 숙소를 잡고 나니 주변엔 온통 횟집과 카페 뿐이어서 혼자 밥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나마 수제버거 집이 몇 개 있었는데, 어제 매우 실망스러웠던 폴앤메리버거를 제외하고는 문을 닫아 무난해보이는 떡갈비 집에 들어갔다. 부부 둘이서만 운영하는 집 치고는 꽤 규모가 큰 식당이었다. 대학가 햄버그 스테이크 집처럼 알루미늄 접시에 깔끔하게 나와서 나름 만족하며 먹을 수 있었다.

식사를 다하고 나와보니 바람이 좀 불긴 해도 날씨가 참 좋았다. 해변 뒤쪽으로 나있는 산책로를 좀 걷기로 한다. 예전에 왔을 때도 바닷가만 떡하니 있지 않고 뒤쪽으로 소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진 산책로가 있어서 참 좋았던 기억이 난다. 분명 의도적으로 만든 산책로인 듯 하여 만든 사람을 칭찬하며 걸었다. 중간에는 세인트존스호텔에서 놓은 듯한 사진 찍기 좋은 조각들도 많았다. 계단, 말, 액자 등. 바다가 보이는 그네도 있어 타볼까 하다 커플이 한창 사진을 찍고 있어 가까이 가보지도 못했다. 군에서 설치한듯한 엄호물과 군시설도 군데군데 있었다.

끝이 없어 보이는 산책로 사이로 바다 쪽으로 난 샛길이 있길래 걸어나왔다. 주차장에서 가까운 강문해변에서 거리가 좀 있는 곳이라 사람이 한 두명 말고는 없었다. 바다를 보며, 파도소리를 들으며 돌아오기로 한다.

예전에 기사로 보았던 해안침식 흔적이 군데군데 보였다. 우리가 흔히 아는 바닷가처럼 모래사장이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작은 절벽 형태를 보이곤 했다. 정확히 왜 그러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쨌든 좋지 않은 징조임은 분명했다.

파도는 굉장히 불규칙적으로, 또 단순히 땅과의 경계에 수직방향으로 들어왔다 나갔다하는 것이 아닌 사선 방향으로 쳤다. 발만 조금 담글 생각으로 아슬아슬하게 걷다보니 파도가 세게 칠 때는 허벅지까지 물이 올라왔다. 소리가 참 시원해서 주워담겠다고 폰을 꺼내 영상으로 여러 번 담았다.

원래는 바로 카페에 들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려 했는데 바지가 생각보다 많이 젖어 숙소에 들러 옷을 갈아입기로 한다. 숙소에 가까워지니 사람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나처럼 혼자 걷는 사람은 없었다. 친구나 커플, 아이를 동반한 가족이거나. 참 모순적이게도 일부러 혼자 온 여행이건만 이럴 때는 꼭 옆에 누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숙소에 들어와 바지를 널어놓고 발을 씻었다. 다른 외출복으로 갈아입어야 하는데, 어쩐지 카페에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그냥 숙소에서 일을 볼까 싶어 편한 옷을 입었다. 예전에 사놓고 읽지 못한 <지성사란 무엇인가>를 들고 침대로 향한다. 베개 두개를 벽에다 세워놓고 기대어 앉아 읽기 시작했다.

분명 잠을 충분히 많이 잔 데다가 햇빛도 꽤나 세게 들어와서 졸릴 틈이 없다 생각했는데, 눈이 스르르 감긴다. 책의 서론에 해당하는 첫번째 장만 읽어놓고선 하품을 하고 잠을 청했다.

일어나보니 오후 5시쯤. 얼마 안 있으면 또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다. 근처 가장 기대되는 수제버거 집을 가기로 정해놓고 7시 정도까지 책을 읽기로 한다. 책을 마저 읽고 버거집이 있는 초당 순두부마을로 향했다.

먼 길은 아니었지만 어둡고 걷기 편하기만 한 거리가 아니다보니 조금 긴장한 채로 걸었다. 어딜 가나 수도권이나 광역시가 아니면 뚜벅이가 다니기엔 불편함이 꽤 크다. 지도에서 눈여겨봤던 순두부집과 순두부젤라또 집을 지나고 나니 버거집이 보이긴했는데, 왜 또... 문을 닫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운영시간에는 10시부터 오후 8시라고 적어놨지만 오후 2~3시 즈음이면 패티가 다 팔려 문을 닫는 가게였다.

찾아놓은 다른 수제버거 집을 가기로 한다. 역시나 가는 길이 어둡고 심지어 보도도 없어 자전거 도로로 걸어야만 하기도 했다. 애초에 가게가 걸어오는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었다. 널찍한 주차장 뒤로 나름 최근에 지은 듯한 건물에는 일하는 사람말고 손님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체온이 너무 낮게 나온다며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주인은 이내 높은 게 아니니 명부를 작성하고 주문하라고 일렀다. 단품과 세트 가격 차이가 꽤 되어 단품을 시킬까 하다가, 갑자기 음료가 땡겨 베이컨치즈버거 세트를 주문했다. 얼마 안 있어 나온 버거는 패티보다 베이컨과 버섯 맛이 강했다. 그래도 어제 먹은 것보다는 훨씬 괜찮아서 나름 만족했다. 또다시 집 근처 비비비의 수제버거가 생각났다. 그 곳이 너무 수준급이라 눈이 높아진건지 좀처럼 수제버거집에서 만족하는 법이 없다.

다 먹고 천천히 식당을 나와 다시 숙소로 향했다. 걸어오며 카페를 가볼까 고민하며 책읽기 적당한 분위기의 카페를 검색했다. 아니나 다를까 1순위로 꼽았던 카페는 문을 닫았고, 그냥 숙소 바로 앞에 있는 카페가 무난해보여 차를 한 잔 시켰다. 단편 하나씩 매우 천천히 읽고 있는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 <관내분실>을 읽고, 사회학 스터디에서 공유할 글을 쓰기 위해 Annual Review of Sociology 저널에 실린 Michele Lamont이 쓴 SVE (Sociology of Valuation and Evaluation) 리뷰 논문을 읽었다.

카페 운영시간에 맞추어 10시쯤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내일은 꼭 일출을 보고 경포호를 한바퀴 뛰리라. 근데 챙겨온 반팔 반바지를 입고 뛰기엔 좀 춥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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