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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글 모음

동원된 과학기술을 넘어 (과학과기술, 2017년 5월호 '젊은이의 광장')

2017년 봄학기 초에 (아마도 내 지도교수님의 주선으로) 과총 임원진이 우리 대학원을 방문하여 대학원생들과 대화 시간을 가졌다. 김명자 과총 회장, 이덕환 교수(과총 부회장) 등 여러 명이 왔는데 그 때 우리 대학원생들의 질문 및 의견이 인상깊었는지 해당 회의 이후 <과학과기술>이라는 과총에서 발간하는 월간지에 '젊은이의 광장'이라는 고정칼럼섹션을 만들어 연재할 기회를 제안해주었다. Why not? 바로 대학원 내에서 필진을 모집하여 돌아가며 작성하기로 하였고, 2017년 4월호부터 연재에 돌입했다. 나는 두번째인 2017년 5월호와 열한번째인 2018년 2월에 기고했고, 본 글은 전자에 해당하는 기고글이다. 

글을 쓸 당시에는 한창 탄핵 이후 장미 대선이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장미 대선과 관련한 글을 써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2016년에 <POKAS ON> 잡지에 총선과 관련한 글을 썼으니 괜찮은 후속 글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과학과기술> 해당 과월호가 대선과 관련하여 특집 기획으로 칼럼들을 싣는다고 하기에 급하게 부랴부랴 글 주제를 바꾸어 다시 썼다. 

조금 과격한(?) 글일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의도적으로 거칠게 써보았다. 그런만큼 존댓말을 써서 글을 좀 부드럽게 만들어보려했는데, 과총 분들이 '무섭다'고 표현할 정도였다니 그건 실패한 것 같고... 

그리고 글을 급하게 작성하다보니 아주 심각하고 부끄러운 오류를 저질렀는데,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인쇄본 글 중간 연도 표기를 잘못했다. 아래에 올바른 연도인 1973년으로 바로 잡았다. 

본글은 아래 ebook 링크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http://ebook.kofst.or.kr/book/201705/#page=82


참고로, 본 글 말미에 나오는 <역사비평> 학술지의 '과학대통령 박정희' 비판 논문들은 그새 책이 되어 출판되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과학대통령 박정희 신화를 넘어>로 검색해 보시길. 나는 출판알림 받자마자 구매했는데 아직 못 읽고 있다. 읽는 대로 리뷰를 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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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된 과학기술을 넘어

광장의 외침과 촛불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을 이끌어냈습니다. 무릇 이런 역사적인 일에는 그 의미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뒤따르기 마련입니다. 한 외신은 탄핵을 곧 박정희 신화 및 패러다임의 종식이라는 의견을 전했고, 정치권뿐만 아니라 언론 및 학계에서는 박정희 시대 재평가와 청산 논의가 활발합니다. 혹시 이상한 점을 느끼셨는지요? 탄핵당하고 구속이 된 건 박근혜 전 대통령인데 자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언급됩니다. 박근혜라는 한 사람과 그 정권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이는 과학기술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거의 상식으로 통용되는 ‘박정희는 과학대통령’이라는 명제는 분명 과학기술인들의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와 기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테니 말입니다. 설마 순전히 그가 공대 출신이라는 점만으로 – 이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뜻이었다고 전해집니다만 - 응원한 분은 없겠지요. 본 잡지의 발행처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이하 과총)와 관련한 일화가 있습니다. 2010년에 과총은 <과학대통령 박정희와 리더십>이라는 책 출판 기념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참석해 예정에 없던 축사를 했다는 점 과 주요 과학기술계 지도자 사이 한가운데에 선 채 찍은 기념사진 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합니다.

그렇다면 과학기술계에서 나타나는 박정희 패러다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현재 서울시교육감으로 있는 조희연 전 성공회대 교수의 <동원된 근대화>라는 책은 박정희 정권을 ‘개발동원체제’로 규정합니다. 간단히 말해 국가가 근대화라는 헤게모니를 설정하는 데 성공한 후 사회를 강력히 동원하여 개발을 이룰 수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보통 ‘동원’이라는 단어는 주로 군사용어로 쓰여 강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책에서 ‘동원’은 저자가 차용하고 확장하려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처럼 동원 대상의 동의나 자발성 역시 포괄하고 있습니다.

1973*년 과총이 『과학과 기술』에 발표한 ‘과학 유신의 방안’이라는 사실상의 10월 유신 지지선언을 인용하겠습니다. 과총은 “민족중흥을 계속 영도하실 박정희대통령의 취임을 충심으로 경하”한다면서, “과학기술의 총동원 태세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썼습니다. 박정희 정권을 전체적으로 ‘개발동원체제’라고 해석한다면, 당시 과학기술계는 더하면 더했지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요즘까지도 과학기술계에서 유난히 군사적 메타포를 지닌 용어가 많이 보이는 것이 단지 우연은 아닐 것입니다. 과학기술인들이 앞서서 ‘과학기술 컨트롤타워’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 존재와 기능 강화 등을 요청하면, 정부나 정치권은 이공계 대학을 ‘창조경제 전진기지’로 만들겠다고 응답합니다. 군대는 분열을 용인하지 않지요. 이렇게 동원된 과학기술인들은 통일된 집단이 되기를 요구받습니다. 분명 세대에 따라서, 분야에 따라서, 소속 기관에 따라서 의견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른데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과학기술계가 내는 목소리는 더더욱 피상적이 되고, 내부 의견 차이를 그저 빠르게 봉합하기 위해 민주적인 방식 대신 지시나 관리가 팽배해집니다.

2015년 대전서 열린 세계과학정상회의의 마지막 날, 분명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일동’의 선언문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채택 당일에야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던 웃지 못할 촌극이 있었지요. 여기에도 “국가번영의 원동력은 강력한 리더십에 있음을 주목”한다는 의미심장한 문장이 끼어 들어가 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많은 분이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마지못해 일어나 선언에 동참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4차 산업혁명이던, 창조경제던, 녹색성장이던, 정권에 따라 이어지는 그 의미가 불분명한 캐치프레이즈에 과학기술정책이 휩쓸리는 현상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여전히 과학기술인들은 너무나도 쉽게 동원됩니다.

보다 일상적인 곳에서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이공계 대학원 연구실들은 그 메커니즘이 ‘동원’이라는 단어와 꼭 어울립니다. 대학원생이 연구실의 일원이 되는 순간 그는 국가 및 산학 연구개발과제를 수행하는 학생연구원이 됩니다. 연구실의 관리자라고 할 수 있는 교수는 연구실에 소속된 대학원생들을 말 그대로 먹여 살리기 위해 과제를 따오기 바쁘지요. 더 많은 실적은 더 많은 과제 및 연구비를 요구하고, 더 많은 과제와 연구비는 더 많은 대학원생을 필요로 합니다. 이렇게 커진 연구실들은 박사학위를 가진 졸업생들을 다수 배출하지만, 막상 졸업생들이 갈 곳은 마땅치 않습니다. 잠시 과제를 위해 동원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연구비가 없다, 대학원생이 오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연구실 역시 수두룩합니다. 연구실마다 동원력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어떤 연구실에서나 대학원생들은 그저 동원 대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의무 내지는 전적으로 강제에 의한 동원이 아니라는 점을 제외하면 최저임금도 못 받는 이 나라의 군인과 크게 다르지 않지요.

최근 달라지고 있는 경향이 있다면 국가나 대학이 대학(원)생들을 창업에 동원하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창조경제’를 폐기한 정부는 이제 구체적으로 대학을 창업의 전진기지로 육성하겠다고 합니다. 창업석사과정을 만들고 창업을 위한 각종 재정지원사업과 펀드를 조성하며, 과학기술원 총장 성과계약서에도 ‘창업 활성화’ 항목을 넣는다고 합니다. 당장 대학을 ‘창업사관학교’로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옵니다.

물론 창업이 활성화되면 좋겠지요. 하지만 정부가 창업에 도전하는 학생들에게 법인 설립만을 강조하고 정책 성과 지표인 총투자금액이나 벤처기업 수 등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여러 창업정책이 그저 지금 이 순간의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또 정책사업실적을 위해 청년들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될 뿐입니다. 이런 접근이 질 좋은 창업을 많이 배출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나라 과학기술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논할 때 ‘동원’이라는 개념을 빠뜨린 채 설명하기가 힘듭니다. 이를 곧 과학기술계에서의 ‘박정희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이 패러다임은 여전히 공고해 보입니다만, 여러 정황을 살펴봤을 때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가면 갈수록 많은 과학기술인이 이 동원 체제의 모순성을 경험하고 또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상식이라고 이야기했지만, 학술지 『역사비평』은 최근 “’과학대통령 박정희’라는 신화”라는 제목으로 섹션을 기획하고 논문들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증거에 기반을 둔 연구를 통해 과학기술계에 팽배하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인식 전환을 꾀하는 노력이지요. 대선을 앞둔 다양한 계층 및 분야의 과학기술인들은 직접 과학기술정책을 제안하기 위해 수평적인 타운홀 미팅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몇몇 과학기술인들은 크라우드 소싱을 통해 직접 시민들이 제공한 연구비로 연구를 수행하기도 하며, 동원되기만 할 뿐 목소리는 잊혀 온 대학원생들과 시간강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논의가 한창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자그마한 노력들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본 칼럼 섹션 제목인 ‘젊은이의 광장’은 말 그대로 젊은 사람들, 흔히 말하는 2~30대의 청년들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그보다 50년 가까이 이어져 온 낡은 ‘동원’ 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메커니즘을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 이식하려는 모든 사람이 모이는 공간입니다. 마지못해 동원되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각자 정말 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연구주제, 과학기술에 부여하는 의미, 과학기술을 통해 지키고자 하는 가치 등을 외치고 공유할 때, 과학기술계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