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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에 발을 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봤을 이화여대 오욱환 교수님의 글에서 영감을 얻어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에 4번에 걸쳐 대학원에 막 입학한 사람들을 위한 글을 썼습니다.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는 긴 준비 끝에 드디어 지난 4월 발송을 시작한 이메일 뉴스레터로,
연구를 연구하는 '어쩌다 연구자'가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격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그동안 발송된 뉴스레터를 살펴보고 구독해주시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 구독 Link: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75558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 아카이빙 페이지: https://page.stibee.com/archives/75558

대학원생의 처지를 비관하는 여러 짤을 보고서 비웃고도 대학원에 입학하신 여러분께.

대학원을 다니다보면 언젠가 한번쯤은 꼭 읽게 되는 글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화여대 오욱환 교수님의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인데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학자로서 가져야 할 소명의식과 함께 실용적인 조언이 담긴 글입니다.

우리 모두가 학문에 뜻이 있어 대학원에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들 공부를 좀 더 해보겠다는 마음은 있으시죠. (최소한 지원서에는 그렇게 쓰셨잖아요) 그렇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학원 생활을 해야 하나 싶어 윗 글을 읽다 보면... 지레 겁을 먹고 내가 대학원에 오는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ㅠㅠ)

대학원을 졸업하고서도 학문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 여전히 모르겠다 싶은 제 경험을 바탕삼아 훨씬 가볍고 덜 무서운 조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욱환 교수님의 글과 마찬가지로 20개 조언을 담고 있어 똑같이 20개를 순서대로 적었으니 함께 읽어보시면 더 좋을거라 생각합니다.

  1. 일단 코스웍에 집중해서 공부하다보면, '졸업은 할 수 있다'고 확신하십시오.(왜냐하면 제가 그러지 않아서 방황했거든요)

    대학원 첫 학기에는 학과마다 정해진 전공필수 과목을 수강하기 마련입니다. 해당 과목이 분명 여러분의 관심사와 다를 수 있고, 또 당장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면 코스웍에 집중하는 것만큼이나 안전한 길이 없습니다. 코스웍을 통해 여러분이 다니는 학과가 서있는 곳을 파악할 수 있고, 코스웍에서 읽는 논문을 교수님들이 내는 (이라고 쓰고 대학원생이 쓰는 이라고 읽는) 논문과 연결짓다보면 연구주제를 어떻게 선정하는지에 대한 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어느 시점부터 변화가 없는 실라버스도 있지만 왠만한 전공필수 과목 실라버스는 해당 분야의 고전과 트렌드를 모두 담기 마련입니다. 졸업 직전까지도 어떤 연구를 해야하는지 헤메는 분들을 많이 보곤 하는데, 코스웍을 열심히 해놓으면 그 안에서 어거지로라도 주제를 만들어서 졸업할 수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학점은 덤이겠죠.


  2. 누가봐도 너무 대단한 학자나 선후배, 동기를 멀리 하십시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집니다. 누구는 대학원생일 때 논문을 몇 편 썼다더라, 누구는 탑 대학에서 유학하고 벌써 임용이 되었다더라 등의 소문을 그러려니하고 넘기고 따라하려 하지 마세요. 성공한 사람에게는 운이 많이 따른 것이고, 내게도 그 운이 따르리란 법은 없습니다. 또한 특정 사람의 성공을 당신의 성공과 동일시 하다보면 오히려 자신의 길과 스타일을 잃게 됩니다. 그보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제각각 다른 길을 다양하게 걷고 있는지 파악하세요. 누구는 기계처럼 논문을 쓰고, 누구는 졸업논문만 쓴 채 회사로 취직했고, 또 누구는 볼 때 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맞고 틀린걸까요? 누구는 성공했고 누구는 실패한 걸까요? 학계든 어디든 정도(正道)란 없습니다.

  3. 졸업한 선배들 중 최악의 사례를 정하고, 반면교사 삼아 그보다는 잘하려고 하십시오.

    무탈히, 혹은 어떻게든 졸업한 선배들의 논문을 훑어보세요. 생각보다 대학원은 대단한 졸업논문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떻게든 걸작(마스터피스!)을 쓰고 졸업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졸업논문이 당신의 마지막 역작이 된다면 슬프지 않겠어요? 그건 단지 당신 앞에 놓인 계단 하나일 뿐입니다. 당신이 뜻만 있다면 앞으로도 훨씬 더 좋은 논문이나 책을 쓸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끝내고 완성한 경험이 당신을 다음 더 높은 계단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4. 학문의 길을 당장 선택해야한다고 조급해하지 마세요.

    학문의 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학석박을 스트레이트로 따고 강사 뛰거나 외국 포닥 나갔다 들어와서 바로 교수가 되는 신화를 믿지 마세요. 대학원 다니다가 아니다 싶어 다른 길로 갔다가다시 돌아와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더 환영받을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연구들이 창의성과 혁신은 다양성과 서로 다른 생각의 연결에서 발현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것처럼 보이던 경험들도 잘 잇다보면 당신만의 길을 가리키고 있을 겁니다.

  5. 읽고 쓰는 일 말고 다른 취미를 찾으세요.

    어차피 24시간 내내 읽고 쓸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몸을 쓰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취미 추천합니다만 영화나 드라마 시청, 음악 감상이나 연주 등 뭐든 좋습니다. 글을 읽고 쓰다보면 속이 상하고 피가 말리는데, 이 때 몸과 마음을 챙기지 못하면 더 이상 읽고 쓸 수도, 또 이 일을 즐기지도 못하게 됩니다. 학자도 사람입니다.

  6. 시간은 어찌됐든 언제나 부족합니다.

    힘들때 의지할 수 있고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세요.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한 사람이라면 학문을 위한 시간을 줄여서라도 인간관계에 최선을 다하세요. 학문에 투입하는 시간과 다른 업무에 할당하는 시간은 영합(zero sum)관계에 있을지 몰라도, 학문과 사람이 영합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학문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고 그 사람에는 당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7. 학문 외적 업무에 너무 자주 동원된다면, 학문의 길을 걷더라도 그 곳에서는 벗어나는 게 좋습니다.

    물론 학문 외적 업무에서 아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연구 업적을 쌓고 새로 임용된 교수님들조차 학문 외적 업무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그 분들은 학문을 직업으로 삼고 있고, 당신은 (최소한 아직은)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괴감이 들 정도로 학문 외적 업무에 동원된다면, 당신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볼모로 누군가 당신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벗어나는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분명 그 정도가 더 심해지기 전에 나오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8. 쓰는 것으로 시작하세요.

    보통 연구과정을 선행연구논문 등 자료를 찾아 읽고 → 연구질문과 가설을 정하고 → 실험을 하거나 설문조사, 인터뷰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 분석하고 → 논문을 쓰는 순서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틀린 건 아니지만 대부분 수없이 많은 자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 진도를 못 나가곤 하죠. 그와 반대로 쓰는 것으로 시작하기를 추천합니다.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쓰냐고요? 내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써보세요. X에 대해 연구를 한다면 X를 검색하기 전에 내가 X에 대해 알고 모르는 것, 내가 왜 X를 연구하고 싶은지 (혹은 연구해야 하는지) 형식에 신경쓰지 말고 한번 쭉 적어보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무엇을 찾아 읽어야 하는지 보다 명확해질 겁니다.


  9. 모르는 채로 연구부정을 저지르는 것만큼은 피하세요.

    위조나 표절, 연구비 부정사용과 같이 연구윤리 위반임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연구부정행위도 있지만, 생명윤리나 논문 저자 기재 및 순서, 부실학술활동 등 본인도 모른채 연구부정을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학계 안팎에서 자리를 확실히 잡았거나 옛날에 학위를 마친 사람들은 과거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거나 묻고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학교나 지도교수가 책임져주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고의든 실수든 연구부정으로 인해 당신의 미래가 어두워지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음을 잊지 마세요.

  10. 대학원 생활이 지속가능하도록 돈을 관리하되, 시간과 맞바꿀 때엔 주의하세요.

    공부하기 위해서는 등록금 말고도 들어가는 돈이 적지 않습니다. 시간제(파트타임) 과정이 아니라면 관심있는 분야의 연구과제에 참여해서 공부와 돈벌이를 함께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여건 상 공부와 무관한 아르바이트를 해야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문에 졸업이 늦춰진다면 얻고 잃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온 이상 회사를 다니는 친구보다 더 많이 벌 수는 없습니다. 최악은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 채로 시간을 보내는 일입니다.

  11. 수많은 책과 논문을 다 읽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세요.

    오욱환 교수님의 말마따나 책과 논문을 받아들자마자 첫 장을 읽어두는 것이 좋습니다(저는 책 서문과 논문 초록 및 서론을 읽습니다). 책장에 꽂힌 모든 책을, 또는 저장하거나 인쇄한 모든 논문을 읽은 연구자는 결코 없습니다.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노트나 책과 논문 첫 장에 이 책을 왜 샀는지, 혹은 이 논문을 왜 저장하거나 인쇄했는지 적어두십시오. 이렇게 하면 끝이 없는 자료의 홍수 속에서 그나마 정말 필요한 자료를 읽고 그렇지 않은 자료를 쳐낼 수 있습니다.

  12. 학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세요.

    한국연구재단에 등록된 국내 학회만 해도 약 4000개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세상엔 정말 다양한 학회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중심 학문/주제인지 알 수 없는 도떼기시장 같은 학회가 있는가 하면, 이토록 협소한 주제로도 사람이 모이는구나 싶은 학회도 있죠. 학회가 중심이 되는 학술대회와 학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흥미로운 연구나 뜻이 맞는 연구자를 만나기가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기대를 최대한 내려놓고 자신이 진행하는 연구의 진행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하다보면 나름 실망할 일 없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학회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 지도교수와 선배를 이용해서 본인을 포지셔닝하세요.

    그저 졸업이 목표라면 지도교수 Jr.가 되어 연구주제를 하나 '받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졸업을 위한 최고의 전략이죠. 하지만 그 이상을 꿈꾼다면 본인에게 영향을 주는 지도교수와 선배가 보지 않은 영역에 발을 들여 여러분은 무엇이 다른지 답해보세요. 하지만 지도교수의 학문분야나 관심주제와 연관성이 전혀 없는 곳에 서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두 발 중 새끼발가락이라도 지도교수 어깨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연결점을 찾기가 힘든 지경이라면, 지도교수 논문 중 아무거나 한 편을 어떻게든 인용할 생각으로 자신의 연구와 지도교수의 연구를 이어보세요.

  14. 기한 내에 완성한 습작이 미완의 걸작이나 대작보다 낫습니다.

    연구를 하다보면 유동적이기도 하고 반드시 엄수해야하기도 하는 마감기한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기한이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작업물에서 부족한 부분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끝없이 기한을 미뤄야하나 고민하거나, 기한을 넘겨서 이런저런 이유를 모두 동원한 사과문과 함께 제출하기도 하죠. 고민하고 사과문을 쓸 시간에 그냥 부족한대로 끝내세요. 그 마지막 순간에 습작이 걸작이나 대작이 될 순 없습니다.

  15. 연구업적 압박에 과몰입하지 말고 지금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석사-박사 여부, 전공 분야나 학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제 막 대학원에 발을 들인 사람에게 연구업적에 대한 압박을 가하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압박이 있더라도 조금 내려놓고, 없다면 스스로 받지 말고 자유를 충분히 활용하세요. 연구보고서와 공저, 번역이 작금의 교수업적평가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므로 그보다 창작에 몰두하는 것도 전략이지만, 그건 이미 자신의 연구분야 내 경험이 충분한 교수에게 해당하는 조언입니다. 연구업적이 될지 안될지 고민하지 않고 뭐든 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게 바로 지금입니다.

  16. 장강명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써야 하는 사람은 써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인다면 연구자를 해도 좋습니다. 대학원 입학 전후로, 심지어는 졸업 전후로도 내가 앞으로 연구자로서 계속 살고 싶은지 헷갈릴 떄가 있습니다. 그럴 떄는 본인 관심분야나 연구주제에 대해 책을 한 번 써보고 싶은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연구자는 좋든 싫든 다른 무엇보다 쓰는 사람입니다. 쓰는 일이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심각하게 거부감이 들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논문이 아닌 책을 쓰기 위해서는 작은 연구질문 한두개가 아니라 보다 광범위에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된 여러 연구질문들이 필요합니다. 그것들을 장기간에 걸쳐 한번씩 건드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연구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 하나는 마련된 셈입니다.

  17. 학술지 투고 결과의 기본 설정값은 '게재불가(reject)'입니다. 

    학술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여러분이 원하는 학술지에 투고했다면 잘 알려진 학술지들의 게재수락율(acceptance rate)이 10%를 하회하는만큼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종종 '수정 후 재심사(Major revision)'라는 희망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지지부진한 수정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만 기대가 없다면 실망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러분의 연구가 게재될 가치가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논문의 학술지 게재 역시 여러모로 운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게재가 되든 안되든 여러분의 연구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다 쓴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받을 일이기도 합니다. 논문을 완성했다면 논문이 제 자리를 찾을 때까지 여유를 가지고 여기저기 투고하되, 게재 판정 여부에 크게 신경쓰지 말고 다음 연구를 하세요.

  18. 연구 주제나 질문을 찾는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와있는 연구논문들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행연구논문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속한 학문분과의 트렌드와 다른 연구자들이 연구를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파악하는 데에는 선행연구논문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연구 주제와 질문을 찾기 위한 여정의 출발점은 논문이 아닌 여러분 근처여야 합니다. 평소 갖고 있던 호기심과 궁금증, 직간접적 경험이나 기사에서 시작해보세요. 그래도 어렵다면 지금 속한 학문분과를 왜 택했는지부터 생각해보세요. 내가 하는 연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연결되어 있어야 지속가능합니다.

  19. 되도록 마감 기한 전 충분한 퇴고 기간을 잡으세요.

    아무리 검토와 퇴고를 거듭해도 오타는 계속해서 나오기 마련이며, 100% 만족할만한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퇴고를 하지 않는건 맛을 보지 않으면서 요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퇴고할 때는 오욱환 교수님의 말슴처럼 다른 사람의 논문을 심사하듯 읽으세요. 실제로 다른 사람이 읽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다 쓰자마자 다시 읽기보다 다른 일을 하고 오거나, 다음 날에 혹은 한숨 눈을 붙인 후에 퇴고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20. 연구자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학계에 있어서가 아니라 항상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주변에서 더 이상 배우지 않는 교수를 찾는 일이 어렵지 않은데요.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기보다 반면교사 삼아 계속해서 배우며 배운 것을 토대로 다른 연구자에게 영감을 주는 연구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적용될 일은 멀었지만 '연구업적'을 계속해서 쌓고 있다고 꼭 계속해서 배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 자신도 구독자 여러분도 본인의 업적이 아닌 연구공동체가 공유하는 지식을 쌓아가는 연구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새부턴가 습관처럼 MTS(모바일 주식 거래 어플)와 주가 지수를 챙겨본다. 자기 전과 일어난 후 미국 주가 지수를 확인하고, 출근 후나 점심시간, 오후 3시 즈음에 우리나라 주가 지수와 내가 산 주식들 가격을 확인한다. 괜찮다 싶은 주식에 매수 주문을 넣기도 하고, 적당히 올랐거나 떨어질 것 같은 주식에 매도 주문을 넣기도 한다. 아직 10시에 출근하고 있기 때문에 장 시작 후 출근을 하게 되는데, 뭔가 큰 변화가 보이면 출근길 내내 MTS만 보고 있기도 하다. 퇴근할 때는 주로 투자 관련 유튜브나 기사를 챙겨본다. 운동이나 글쓰기, 영어공부 등 마음만 먹고 습관으로 만드는 데 실패한 것이 수두룩한데, 야속하게도 내 몸과 머리는 두 달이 채 되기도 전에 주식투자를 루틴에 포함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번 주에 처우면담을 다시 했다. 처음 할 때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협상했으면 될 것을, 세 달 내내 신경써서 겨우 자리 한번을 더 만들었다. 다행히 그간 신경써서 노력한 덕분에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지만, 바보같이 2년 전 에 저질렀던 첫 협상 자리에서 거절하지 못한 실수를 되풀이하고 말았다. 사실 처우면담이 끝나고 나오면서도 내가 쓸데없이 낮게 부른 건 아닌지, 확답을 받았어야 했던 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다. 물론 2년 전과 비교하면 회사 측 첫 제안을 거절하고 보다 자신있게 내 주장을 했다는 점에서 나아지긴 했다. 하지만 끝없는 욕심 때문인지 만족스럽기 보다 찜찜하다. 일단 내 손을 벗어났으니 회사 측 답변을 받는대로 대응을 해야겠지.

너무도 빠르게 습관이 된 주식투자와 지난 세 달, 아니 이직 준비 시절까지 포함하면 거의 5개월 남짓 신경 써 온 연봉. 두가지 모두 내가 요즘 얼마나 돈에 집착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이렇게 머리 한 구석에 돈이 자리잡고 있을 때, 반대편 구석에서는 질문 하나가 계속 떠올랐다 가라앉았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돈 한 푼이 아쉬워 이전엔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것들에 연연해 하게 되었나?

그러다 나는 내 안에 피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역설적이게도 피해의식의 씨앗은 회사에서 돈 받고 일하기 시작하면서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애초에 돈을 신경쓰지 않았기에 돈이 되는 전공을 졸업하고서 돈이 되지 않는 전공으로 대학원을 진학했다. 대학원을 다닐 때도 그저 부모님께 손 안 벌리고 이런저런 연구과제로 자급자족할 수 있다는 데에 만족했다. 큰 돈을 벌지는 못하더라도 굶어죽지 않을 정도라면 나쁘지 않겠다며 (혹은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냐며) 공부에 뜻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를 다니기 시작한 순간, 삶의 기준이 바뀌었다. 내 '몸값'은 얼마인지 계속해서 자문했고, 머리는 '나잇값'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사실 기준만 바뀌었지 모든 게 그대로다. 나는 여전히 구질구질한 짠돌이고, 당장 큰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때문에 처음 회사를 알아보러 다닐 때 연봉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워라밸, 정확히 말하면 퇴근 후에 연구할 수 있는 시간과 체력이 충분히 남아있을 지만 생각하고 회사를 골랐다. (물론 애초에 구직 시기나 전공, 전문연구요원 편입가능 여부 등 제약조건이 많아 선택지가 많진 않았다.) 하지만 점차 주경야독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회사는 회사대로 다니고 연구는 연구대로 하는 독립연구자로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둘 모두를 한꺼번에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허황된 자신감으로 시작한 실험결과가 실패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업 연구자의 길을 걷자니 어찌저찌 유학을 가는 데에는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 이후가 그려지질 않았다. 몸값을 고려하면 회사원으로 지내는 것이 너무도 남는 장사였다. 나잇값을 생각하면 둘은 더더욱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돈이 기준이 되자 모든 게 바뀌었다.

'연구를 하고 싶지만 연구로 먹고 살 자신은 없다. 어쩌면 연구가 아니라 공부만 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연구를 직업으로 삼아도 되겠다고 확신할 정도로 굉장히 뛰어나거나 굳이 본인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지 못하니 돈을 벌 수 있을 때 벌어서 한 푼도 벌지 못할 미래를 대비해야겠구나.'

그렇게 피해의식은 커져만 갔고, 명확한 목표나 방향은 잃어버린 채 그저 돈을 벌어야겠다는, 최대한 빨리 더 많이 모아야겠다는 집착만 남았다. 수단일 뿐이었던 '경제적 자유'와 '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가 곧 목적이 되었다. 여러 재테크 책과 영상은 그 피해의식조차 연료삼아 돈을 모으도록, 또 모은 돈을 굴려 돈이 나를 위해 일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학원을 나오며 전문연구요원 기간 동안 모아야겠다고 계획한 목표 저축액이 있었다. 지난 달 월말 정산을 하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내 자산이 생각보다 빨리 그 금액에 도달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언급했듯 대학원에 있었을 때는 돈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큰 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이런저런 근거를 고려해서 세운 목표였기에 터무니없이 적지도 않았다. 분명 그 때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만족했던 만큼의 돈. 제대로 계산된 게 맞는 지 몇 번을 확인하며 목표 금액을 초과달성하면 어떻게 되는 건지 고민했다.

뭐가 어떻게 되기는. 더 모으면 모을수록 좋은거지.

라고 생각한 순간, 이건 끝이 없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내가 필요한 돈. 벌어서 모아야 하는 돈. 거기엔 기준이 없다. 부자는 가구당 월 평균 천만원 넘게 소비하고 부자가 아닌 사람은 약 250만원 정도 쓴다. (하나은행 하나금융경영연구소, 2020) 이미 남들보다 네 배 넘게 더 쓰고 있지만 더 갖고 싶어하는 건 부자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대학원을 다닐 때보다 네 배 넘게 벌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심란하다. 지금보다 네 배를 더 벌어도 마찬가지 아닐까.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의 심리>라는 TED 영상으로 유명한 팀 어반(Tim Urban)이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Life is a Picture, But You Live in a Pixel>이라는 글을 읽었다. 재미있는 그림과 '오늘'을 남자주인공의 여자친구로 의인화하는 재치를 더한 글에서 팀 어반은 묻는다. '왜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또 그것을 현실로 만들면서 동시에 오늘은 만족하지 못하는걸까? (혹은, '오늘'과는 행복하게 지내지 못하는걸까?)'

글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잘 자고, 운동하고, 잘하는 것을 하고, 남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또 그보다 중요한 '감사'를 마음 속에 안고 살라고 조언한다. 너무도 뻔한 결론이지만, 결론에 이르기 전에 댄 길버트(Dan Gilbert)의 TED 영상을 언급하며 설명한 '인생은 그림이지만 우리는 픽셀에 산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큰 그림을 떠올리며 미래를 꿈꾸고, 다른 사람들이야 나를 보며 한발짝 물러서서 내가 그린 그림을 볼 수 있겠지만, 내가 살아가는 하루는 그 그림의 아주 작은 단위인 픽셀 속이라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든, 그토록 바라던 직업을 구하든 우리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똑같이 아침에 피곤해하며 일어나고, 씻고 출근하거나 일하기 시작하고, 배고파지면 밥먹고, 다시 일하다가 또 밥먹고, 취미생활하다가 밤이 되면 폰 조금 보다가 잠에 들 것이다.

돈에 대한 집착과 피해의식을 자각하고 나니, 나는 오히려 내가 어떤 그림을 그려낼 지 충분히 고민해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그림은 뒤로 한 채 남의 그림만 보며 부러워하고 있었으니 그저 남과 비슷하기라도 하면 다행일 그림이 그려지고 있었다. 팀 어반은 그림에만 집착하다 픽셀을 놓치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썼겠지만, 그림조차 염두에 두지 않던 내게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시급하다. 내가 원하는 그림은 신사임당이나 벤자민 프랭클린의 초상화가 아니다. 돈이라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수단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피해의식을 버리고 내 삶의 기준을 다잡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그림을 이룰 픽셀 하루하루도 보다 행복하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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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회사를 다니면서 글을 기고하는 일이 줄었다. 2020년에는 꼭 기고가 아니더라도 글을 더 많이 써야 할텐데...

대학원 졸업할 때즈음부터 계속 써야지 써야지 했던 소재와 주제를 2019년 하반기에 와서야 <철창 속 일차원적 연구자>라는 제목으로 과학뒤켠에 기고했다. 아래 과학뒤켠 공식 블로그에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내 마음에 가장 드는 문단 하나만 인용하자면..

"오늘날의 연구자 자아정체성은 [인정 대신] 성과 지표로 구성된다. 연구자의 이력서에는 연구 주제나 중요성 대신 끝없이 긴 논문 출판 목록이 나열되어 있다. 동시에 학계에선 제대로 된 동료평가 문화가 사라져간다. 굳이 바쁜 시간 내어 다른 연구자가 무엇을 연구했는지, 연구 과정과 결과는 타당한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두 명 남짓한 익명의 평가자가 통과시켰으니 논문으로 출판되었겠지 싶다. SCI와 같은 인용색인에 등재된 학술지면 더더욱 믿을만하다. 연구자들은 평가를 아웃소싱 했고, 그 자리는 인용색인시스템과 성과지표가 채워왔다. 이것 없이 학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즉 학계는 더 높은 성과지표가 인정을 대체한 금융시스템이자 경쟁사회가 된 것이다."

더 읽기: https://behindsciences.kaist.ac.kr/2019/12/23/%EC%B2%A0%EC%B0%BD-%EC%86%8D-%EC%9D%BC%EC%B0%A8%EC%9B%90%EC%A0%81-%EC%97%B0%EA%B5%AC%EC%9E%90/

p.s. 이름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것도 같아 SNS에는 따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만화 일부 사용을 허락해주신 신인철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포닭 블루스 책도 구매해서 너무 재밌게 봤고 이후 연재 중이신 조교수 블루스 역시 너무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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