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보기
학계에 발을 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봤을 이화여대 오욱환 교수님의 글에서 영감을 얻어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에 4번에 걸쳐 대학원에 막 입학한 사람들을 위한 글을 썼습니다.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는 긴 준비 끝에 드디어 지난 4월 발송을 시작한 이메일 뉴스레터로,
연구를 연구하는 '어쩌다 연구자'가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격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에서 그동안 발송된 뉴스레터를 살펴보고 구독해주시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 구독 Link: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75558
어쩌다 연구자 뉴스레터 아카이빙 페이지: https://page.stibee.com/archives/75558

대학원생의 처지를 비관하는 여러 짤을 보고서 비웃고도 대학원에 입학하신 여러분께.

대학원을 다니다보면 언젠가 한번쯤은 꼭 읽게 되는 글들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화여대 오욱환 교수님의 <학문을 직업으로 삼으려는 젊은 학자들을 위하여>인데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학자로서 가져야 할 소명의식과 함께 실용적인 조언이 담긴 글입니다.

우리 모두가 학문에 뜻이 있어 대학원에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다들 공부를 좀 더 해보겠다는 마음은 있으시죠. (최소한 지원서에는 그렇게 쓰셨잖아요) 그렇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학원 생활을 해야 하나 싶어 윗 글을 읽다 보면... 지레 겁을 먹고 내가 대학원에 오는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하게 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ㅠㅠ)

대학원을 졸업하고서도 학문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 여전히 모르겠다 싶은 제 경험을 바탕삼아 훨씬 가볍고 덜 무서운 조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욱환 교수님의 글과 마찬가지로 20개 조언을 담고 있어 똑같이 20개를 순서대로 적었으니 함께 읽어보시면 더 좋을거라 생각합니다.

  1. 일단 코스웍에 집중해서 공부하다보면, '졸업은 할 수 있다'고 확신하십시오.(왜냐하면 제가 그러지 않아서 방황했거든요)

    대학원 첫 학기에는 학과마다 정해진 전공필수 과목을 수강하기 마련입니다. 해당 과목이 분명 여러분의 관심사와 다를 수 있고, 또 당장 연구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면 코스웍에 집중하는 것만큼이나 안전한 길이 없습니다. 코스웍을 통해 여러분이 다니는 학과가 서있는 곳을 파악할 수 있고, 코스웍에서 읽는 논문을 교수님들이 내는 (이라고 쓰고 대학원생이 쓰는 이라고 읽는) 논문과 연결짓다보면 연구주제를 어떻게 선정하는지에 대한 감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어느 시점부터 변화가 없는 실라버스도 있지만 왠만한 전공필수 과목 실라버스는 해당 분야의 고전과 트렌드를 모두 담기 마련입니다. 졸업 직전까지도 어떤 연구를 해야하는지 헤메는 분들을 많이 보곤 하는데, 코스웍을 열심히 해놓으면 그 안에서 어거지로라도 주제를 만들어서 졸업할 수 있습니다. 나쁘지 않은 학점은 덤이겠죠.


  2. 누가봐도 너무 대단한 학자나 선후배, 동기를 멀리 하십시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집니다. 누구는 대학원생일 때 논문을 몇 편 썼다더라, 누구는 탑 대학에서 유학하고 벌써 임용이 되었다더라 등의 소문을 그러려니하고 넘기고 따라하려 하지 마세요. 성공한 사람에게는 운이 많이 따른 것이고, 내게도 그 운이 따르리란 법은 없습니다. 또한 특정 사람의 성공을 당신의 성공과 동일시 하다보면 오히려 자신의 길과 스타일을 잃게 됩니다. 그보다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제각각 다른 길을 다양하게 걷고 있는지 파악하세요. 누구는 기계처럼 논문을 쓰고, 누구는 졸업논문만 쓴 채 회사로 취직했고, 또 누구는 볼 때 마다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맞고 틀린걸까요? 누구는 성공했고 누구는 실패한 걸까요? 학계든 어디든 정도(正道)란 없습니다.

  3. 졸업한 선배들 중 최악의 사례를 정하고, 반면교사 삼아 그보다는 잘하려고 하십시오.

    무탈히, 혹은 어떻게든 졸업한 선배들의 논문을 훑어보세요. 생각보다 대학원은 대단한 졸업논문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떻게든 걸작(마스터피스!)을 쓰고 졸업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졸업논문이 당신의 마지막 역작이 된다면 슬프지 않겠어요? 그건 단지 당신 앞에 놓인 계단 하나일 뿐입니다. 당신이 뜻만 있다면 앞으로도 훨씬 더 좋은 논문이나 책을 쓸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끝내고 완성한 경험이 당신을 다음 더 높은 계단을 넘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겁니다.

  4. 학문의 길을 당장 선택해야한다고 조급해하지 마세요.

    학문의 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학석박을 스트레이트로 따고 강사 뛰거나 외국 포닥 나갔다 들어와서 바로 교수가 되는 신화를 믿지 마세요. 대학원 다니다가 아니다 싶어 다른 길로 갔다가다시 돌아와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더 환영받을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연구들이 창의성과 혁신은 다양성과 서로 다른 생각의 연결에서 발현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도저도 아닌 것처럼 보이던 경험들도 잘 잇다보면 당신만의 길을 가리키고 있을 겁니다.

  5. 읽고 쓰는 일 말고 다른 취미를 찾으세요.

    어차피 24시간 내내 읽고 쓸 수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몸을 쓰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취미 추천합니다만 영화나 드라마 시청, 음악 감상이나 연주 등 뭐든 좋습니다. 글을 읽고 쓰다보면 속이 상하고 피가 말리는데, 이 때 몸과 마음을 챙기지 못하면 더 이상 읽고 쓸 수도, 또 이 일을 즐기지도 못하게 됩니다. 학자도 사람입니다.

  6. 시간은 어찌됐든 언제나 부족합니다.

    힘들때 의지할 수 있고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인간관계를 유지하세요.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하고 행복한 사람이라면 학문을 위한 시간을 줄여서라도 인간관계에 최선을 다하세요. 학문에 투입하는 시간과 다른 업무에 할당하는 시간은 영합(zero sum)관계에 있을지 몰라도, 학문과 사람이 영합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학문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고 그 사람에는 당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7. 학문 외적 업무에 너무 자주 동원된다면, 학문의 길을 걷더라도 그 곳에서는 벗어나는 게 좋습니다.

    물론 학문 외적 업무에서 아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한 연구 업적을 쌓고 새로 임용된 교수님들조차 학문 외적 업무에 시달립니다. 하지만 그 분들은 학문을 직업으로 삼고 있고, 당신은 (최소한 아직은)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괴감이 들 정도로 학문 외적 업무에 동원된다면, 당신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볼모로 누군가 당신을 이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벗어나는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분명 그 정도가 더 심해지기 전에 나오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8. 쓰는 것으로 시작하세요.

    보통 연구과정을 선행연구논문 등 자료를 찾아 읽고 → 연구질문과 가설을 정하고 → 실험을 하거나 설문조사, 인터뷰를 통해 데이터를 수집하고 → 분석하고 → 논문을 쓰는 순서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틀린 건 아니지만 대부분 수없이 많은 자료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다 진도를 못 나가곤 하죠. 그와 반대로 쓰는 것으로 시작하기를 추천합니다. 아는 게 없는데 어떻게 쓰냐고요? 내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써보세요. X에 대해 연구를 한다면 X를 검색하기 전에 내가 X에 대해 알고 모르는 것, 내가 왜 X를 연구하고 싶은지 (혹은 연구해야 하는지) 형식에 신경쓰지 말고 한번 쭉 적어보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무엇을 찾아 읽어야 하는지 보다 명확해질 겁니다.


  9. 모르는 채로 연구부정을 저지르는 것만큼은 피하세요.

    위조나 표절, 연구비 부정사용과 같이 연구윤리 위반임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연구부정행위도 있지만, 생명윤리나 논문 저자 기재 및 순서, 부실학술활동 등 본인도 모른채 연구부정을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학계 안팎에서 자리를 확실히 잡았거나 옛날에 학위를 마친 사람들은 과거 자신의 실수를 바로잡거나 묻고 넘어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을 가능성은 적습니다. 학교나 지도교수가 책임져주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이 고의든 실수든 연구부정으로 인해 당신의 미래가 어두워지는 상황을 방지할 수 있음을 잊지 마세요.

  10. 대학원 생활이 지속가능하도록 돈을 관리하되, 시간과 맞바꿀 때엔 주의하세요.

    공부하기 위해서는 등록금 말고도 들어가는 돈이 적지 않습니다. 시간제(파트타임) 과정이 아니라면 관심있는 분야의 연구과제에 참여해서 공부와 돈벌이를 함께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여건 상 공부와 무관한 아르바이트를 해야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문에 졸업이 늦춰진다면 얻고 잃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원에 들어온 이상 회사를 다니는 친구보다 더 많이 벌 수는 없습니다. 최악은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 채로 시간을 보내는 일입니다.

  11. 수많은 책과 논문을 다 읽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세요.

    오욱환 교수님의 말마따나 책과 논문을 받아들자마자 첫 장을 읽어두는 것이 좋습니다(저는 책 서문과 논문 초록 및 서론을 읽습니다). 책장에 꽂힌 모든 책을, 또는 저장하거나 인쇄한 모든 논문을 읽은 연구자는 결코 없습니다. 그럴 수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노트나 책과 논문 첫 장에 이 책을 왜 샀는지, 혹은 이 논문을 왜 저장하거나 인쇄했는지 적어두십시오. 이렇게 하면 끝이 없는 자료의 홍수 속에서 그나마 정말 필요한 자료를 읽고 그렇지 않은 자료를 쳐낼 수 있습니다.

  12. 학회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으세요.

    한국연구재단에 등록된 국내 학회만 해도 약 4000개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세상엔 정말 다양한 학회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중심 학문/주제인지 알 수 없는 도떼기시장 같은 학회가 있는가 하면, 이토록 협소한 주제로도 사람이 모이는구나 싶은 학회도 있죠. 학회가 중심이 되는 학술대회와 학술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흥미로운 연구나 뜻이 맞는 연구자를 만나기가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기대를 최대한 내려놓고 자신이 진행하는 연구의 진행상황을 점검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하다보면 나름 실망할 일 없이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학회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 지도교수와 선배를 이용해서 본인을 포지셔닝하세요.

    그저 졸업이 목표라면 지도교수 Jr.가 되어 연구주제를 하나 '받아 쓰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졸업을 위한 최고의 전략이죠. 하지만 그 이상을 꿈꾼다면 본인에게 영향을 주는 지도교수와 선배가 보지 않은 영역에 발을 들여 여러분은 무엇이 다른지 답해보세요. 하지만 지도교수의 학문분야나 관심주제와 연관성이 전혀 없는 곳에 서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두 발 중 새끼발가락이라도 지도교수 어깨에 올려놓아야 합니다. 연결점을 찾기가 힘든 지경이라면, 지도교수 논문 중 아무거나 한 편을 어떻게든 인용할 생각으로 자신의 연구와 지도교수의 연구를 이어보세요.

  14. 기한 내에 완성한 습작이 미완의 걸작이나 대작보다 낫습니다.

    연구를 하다보면 유동적이기도 하고 반드시 엄수해야하기도 하는 마감기한을 마주하게 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기한이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작업물에서 부족한 부분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끝없이 기한을 미뤄야하나 고민하거나, 기한을 넘겨서 이런저런 이유를 모두 동원한 사과문과 함께 제출하기도 하죠. 고민하고 사과문을 쓸 시간에 그냥 부족한대로 끝내세요. 그 마지막 순간에 습작이 걸작이나 대작이 될 순 없습니다.

  15. 연구업적 압박에 과몰입하지 말고 지금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세요.

    석사-박사 여부, 전공 분야나 학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이제 막 대학원에 발을 들인 사람에게 연구업적에 대한 압박을 가하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압박이 있더라도 조금 내려놓고, 없다면 스스로 받지 말고 자유를 충분히 활용하세요. 연구보고서와 공저, 번역이 작금의 교수업적평가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므로 그보다 창작에 몰두하는 것도 전략이지만, 그건 이미 자신의 연구분야 내 경험이 충분한 교수에게 해당하는 조언입니다. 연구업적이 될지 안될지 고민하지 않고 뭐든 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며, 그게 바로 지금입니다.

  16. 장강명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써야 하는 사람은 써야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움직인다면 연구자를 해도 좋습니다. 대학원 입학 전후로, 심지어는 졸업 전후로도 내가 앞으로 연구자로서 계속 살고 싶은지 헷갈릴 떄가 있습니다. 그럴 떄는 본인 관심분야나 연구주제에 대해 책을 한 번 써보고 싶은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연구자는 좋든 싫든 다른 무엇보다 쓰는 사람입니다. 쓰는 일이 언제나 행복할 수는 없겠지만, 심각하게 거부감이 들어서는 안됩니다. 또한, 논문이 아닌 책을 쓰기 위해서는 작은 연구질문 한두개가 아니라 보다 광범위에 있으면서도 서로 연결된 여러 연구질문들이 필요합니다. 그것들을 장기간에 걸쳐 한번씩 건드려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면 연구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 하나는 마련된 셈입니다.

  17. 학술지 투고 결과의 기본 설정값은 '게재불가(reject)'입니다. 

    학술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여러분이 원하는 학술지에 투고했다면 잘 알려진 학술지들의 게재수락율(acceptance rate)이 10%를 하회하는만큼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종종 '수정 후 재심사(Major revision)'라는 희망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지지부진한 수정과정을 거치기도 합니다만 기대가 없다면 실망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러분의 연구가 게재될 가치가 없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논문의 학술지 게재 역시 여러모로 운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에 게재가 되든 안되든 여러분의 연구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다 쓴 것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받을 일이기도 합니다. 논문을 완성했다면 논문이 제 자리를 찾을 때까지 여유를 가지고 여기저기 투고하되, 게재 판정 여부에 크게 신경쓰지 말고 다음 연구를 하세요.

  18. 연구 주제나 질문을 찾는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나와있는 연구논문들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선행연구논문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속한 학문분과의 트렌드와 다른 연구자들이 연구를 어떻게 수행했는지를 파악하는 데에는 선행연구논문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연구 주제와 질문을 찾기 위한 여정의 출발점은 논문이 아닌 여러분 근처여야 합니다. 평소 갖고 있던 호기심과 궁금증, 직간접적 경험이나 기사에서 시작해보세요. 그래도 어렵다면 지금 속한 학문분과를 왜 택했는지부터 생각해보세요. 내가 하는 연구는 어떤 방식으로든 나와 연결되어 있어야 지속가능합니다.

  19. 되도록 마감 기한 전 충분한 퇴고 기간을 잡으세요.

    아무리 검토와 퇴고를 거듭해도 오타는 계속해서 나오기 마련이며, 100% 만족할만한 결과물이 나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퇴고를 하지 않는건 맛을 보지 않으면서 요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퇴고할 때는 오욱환 교수님의 말슴처럼 다른 사람의 논문을 심사하듯 읽으세요. 실제로 다른 사람이 읽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글을 다 쓰자마자 다시 읽기보다 다른 일을 하고 오거나, 다음 날에 혹은 한숨 눈을 붙인 후에 퇴고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20. 연구자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학계에 있어서가 아니라 항상 배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슬프게도 주변에서 더 이상 배우지 않는 교수를 찾는 일이 어렵지 않은데요. 우리 모두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기보다 반면교사 삼아 계속해서 배우며 배운 것을 토대로 다른 연구자에게 영감을 주는 연구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에게 적용될 일은 멀었지만 '연구업적'을 계속해서 쌓고 있다고 꼭 계속해서 배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 자신도 구독자 여러분도 본인의 업적이 아닌 연구공동체가 공유하는 지식을 쌓아가는 연구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과학기술정책'의 범위를 명확하게 정의하고 구분짓는 노력만큼이나 바보같은 짓도 없을 것 같다. 나는 학부 입학 후부터 꾸준히 과학기술정책에 관심을 가져왔지만, 뭘 알고 그랬다기 보다 그냥 '과학기술정책'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면 좋아라하고 관심에 두었다. 내 정체성의 일부로 여겼달까.

그렇게 학부 부전공을 하면서 접한 과학기술정책은 결국 같은 대학에 있던 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서 연 수업들이었으니, 대학원에서 의도한 바대로(?) '과학기술정책'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을 공부해야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나는 여전히 학문분야로서의 과학기술정책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름 과학기술정책으로 유명한 해외 대학원 프로그램을 살펴보더라도 대학마다 강세를 띠는 분야가 있을 뿐 다들 여러 학문분야의 집합이다 (아래 0번 항목 참고). 그러니 다른 학문분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과학기술정책 관련 대학원은 특히 랭킹을 염두에 두고 대학원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그러니 아래 내가 대충 작성한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할 수 있는 국내 대학원 리스트는 참고만 하시라.

0. 해외 유명 대학

전통적으로 영국의 두 개 대학(Sussex SPRU, Manchester MIOIR)에 더해 매우 주관적인 평일 수도 있겠으나 미국의 Georgia Tech SPP가 잘 알려져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규모가 엄청 크다는 것이다. 다른 학문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과학기술정책과 같은 넓은 범위의 응용학문에서 대학원 규모가 가져다주는 장점은 굉장히 크다. 큰 제한없이 자유롭게 필요한 공부를 하거나 연구주제나 방법 등을 정할 수 있다는 점과, 대학원 자체가 하나의 허브가 되어 여러 학문적, 직업적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 SPRU(Science Policy Research Unit), University of Sussex 

http://www.sussex.ac.uk/spru/

일단 오래되기도 했고(2016년에 5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열었다), 그만큼 alumni 풀도 넓다. 우리나라에도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요즘 Energy & Sustainability policy에 역점을 두는 것 같다. 세칭 Innovation studies라고 불리는 분야(역시 과학기술정책만큼이나 범위가 불분명하긴 하지만 대충 암묵적으로 정해진..?) 최고 저널인 Research Policy의 뿌리이기도 하다.

- MIOIR(Manchester Institute of Innovation Research), University of Manchester

http://www.research.mbs.ac.uk/innovation

SPRU와 마찬가지로 50년 정도 역사를 자랑하는데, 이전에 있었던 PREST와 CRIC가 합쳐지면서 2007년에 새롭게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 한다. SPRU와 마찬가지로 alumni 풀이 넓고 우리나라에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 애초에 맨체스터 대학이 비즈니스 스쿨로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때문인지 느낌상 SPRU에 비해 좀더 management-ish하다. 

(실제로는 4개 분야로 research theme을 나눠서 설명하고 있다 - 1) INNOVATION MANAGEMENT & COMPETITIVENESS, 2) EMERGING TECHNOLOGIES DYNAMICS & GOVERNANCE, 3) SCIENCE, TECHNOLOGY & INNOVATION, POLICY & ORGANISATIONS (STIP), 4) SYSTEM TRANSITIONS AND SOCIETAL CHALLENGES)

- School of Public Policy, Georgia Tech 

https://spp.gatech.edu/

검색하다보니 이런 quora 질문-답변이 눈에 띄는데(https://www.quora.com/What-are-the-best-and-most-well-regarded-graduate-level-programs-for-science-technology-policy), 사실 이런 거는 정말 미국에 있는 사람들 말고는 알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답변하는 사람 말마따나 미국에는 워낙 학교가 많다보니 과학기술정책을 한다 하더라도 대학별로 강세를 보이는 특화 분야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만 몇 없는 과학기술정책 분야 국제학회가 2년마다 한 대학에 의해 그 대학이 있는 곳에서만 나름 성공적으로 열리고 있다면? 그 대학을 대표 주자라고 불러도 큰 오류가 없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Georgia Tech이며, 학회 이름은 지명을 앞세운 Atlanta Conference다. (http://www.atlconf.org/)

앞서 쓴 두 영국대학과는 다르게 이름에 대놓고 과학기술정책이라고 하지는 않는데, 공대라 그런지 내가 알고 있는 한 faculty 대다수 연구주제가 과학기술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조지아텍 역시 Scheller College of Business가 유명한데, 맨체스터와 달리 SPP가 Business 대학 소속이 아니라서 필요할 때 협력이 이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학생 입장에서도 이건 장점이라 생각.

---------------

이하 국내 대학의 경우 크게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분류가 어떤 우위를 암시한다거나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니 연연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말그대로 해당 대학이 '과학기술정책'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지, 아니면 세부전공으로 과학기술정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는지만 나누었다. 어쩌다보니 후자에 협동과정으로 개설된 대학원 과정이 많이 포함되어 있긴 한데, 이건 사실 당연한 현상 아닌가 싶다. 다른 전통 학문을 하더라도 과학기술정책 전공 못하리라는 법은 없으니깐...(오히려 그게 나을지도...)

1. '과학기술정책' 명시 국내 대학 


- 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일명 'STP') 

https://stp.kaist.ac.kr/

- UST 과학기술경영정책 전공

https://www.ust.ac.kr/policy.do

- 한양대학교 과학기술정책학과

http://hystp.hanyang.ac.kr/


2. 세부전공으로 '과학기술정책' 가능 국내 대학

-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과학사 및 과학철학 전공(일명 '과사철')

http://phps.snu.ac.kr/ver3/

-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https://ss.jbnu.ac.kr/

-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기술경영경제정책대학원(일명 'TEMEP')

http://temep.snu.ac.kr/

- 고려대학교 과학기술학협동과정

https://sts.korea.ac.kr/ (과거 홈페이지: https://sites.google.com/site/stskoreauniv/)

- 부산대학교 과학기술학 협동과정

http://cafe.daum.net/pnusts

- 부경대학교 과학기술정책 협동과정

http://stp.pknu.ac.kr/ko/

- 충남대학교 국가정책대학원 과학기술정책전공

https://gnppcnu.org/new/sub02/sub02_0203n.php


3. 그 외

-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http://itpolicy.seoultech.ac.kr/

BK21 사업이 1999년 시작했으니 올해가 20년째다. 7년 주기로 후속사업(1단계 - 2단계 - 플러스 - FOUR(?))이 이어져 오고 있으니 올해 초쯤 정책연구가 마무리되어야 세부사항을 정리해서 2020~21년 즈음 후속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 정책포럼을 열었다고 한다. (11/27, 고대에서 개최)

보도자료와 발표자료는 아래에서 다운 가능: 

11-27(화)석간보도자료(세계+수준의+연구중심대학+육성과+대학원+교육연구역량+강화를+위한+공론화의+장+열려).hw

(붙임2)+BK21+후속사업+개편+기본방향(안)+발제.pdf

가칭 BK21 FOUR (Fostering Outstanding Universities for Research, 이런거 왜 또 안 나오나 했다...)는 2020년 9월부터 추진될 예정이고 정책연구는 연세대 행정학과 하연섭 교수 주도로 18' 8월~11월에 진행되었다 (하지만 최종보고서가 공개되었을리 없고 이분들도 각종 수정 요구에 아직까지도 보고서 마무리에 여념이 없겠지...) 

덧. 근데 교육부도 연구재단도 BK21 페이지에서도 해당 과제 공고문을 찾을 수가 없음...(찾는 분께서는 댓글로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도자료와 발표자료를 토대로 연구진이 마련했다는 시안의 주요 내용을 요약 정리해보았다. 원래는 내용만 요약정리하려 했는데 코멘트를 달다보니 너무 길어졌다...

- 뿌려주기 식 지원에서 집중지원으로 바꿔 세계 100위 수준 연구중심대학 10개 육성
542개 사업단에서 350개 '교육연구단'으로 축소, 단별 사업비 3배 가량 확대 (5억 to 16억, 전체 사업비 기준으로도 2724억 to 5630억으로 2배 인상)

Comment:

발표자료에서 "저출산, 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 변화에 대비 대학원 재정지원의 집중화 긴요"라고 되어 있는데,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전체 예산 2배를 확보하겠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단' 개수 축소와 아래 대학본부지원금 30% 배정 항목은 BK21을 보다 공식적으로 '대학원재정지원사업'화 하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또한, BK21은 1999년 출범할 때 부터 '선택과 집중'을 표방해왔고, 2단계-PLUS로 이어질 때도 항상 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어쩌다보니 - 개인적으로 지역정치와 학계 내 정치 싸움(?)의 결과라고 보는데 - 과정도 결과도 '선택과 집중'이라기엔 뭔가 애매해진 게 사실이다. BK21 FOUR도 이전 사업의 전철을 따를까? 그건 또 모른다. PLUS까지는 대학원 규모가 계속 성장하는 추세였지만 2016~7년을 기준으로 꺾였고 앞으로는 하락세만 남아있기 때문에(...) 사업 의도와 무관하게 자연스럽게 '선택과 집중'으로 갈 수도 있다. BK21 정책과 함께 '선택과 집중'이 가속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게 더 합당해보이기도 한다. 

- 사업단 별 -> 대학원 전체:

전체 사업비 중 30% 대학본부 지원(간접비는 따로 3.5~5% 배정하는 것처럼도 보이나 불분명), 다만 미참여 학과 지원 금지 제한 있음 (원래 간접비는 5% 이내였음)
학과 전체 참여 유도

Comment:

단별 사업비가 16억이니 30% 대학본부 지원금은 약 5억원 정도로 각종 대학재정지원사업에 비하면 매우 적고 쓰임새도 여러모로 해당 학과 대학원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여태 대학들이 소규모 재정지원사업에도 사활을 걸어온 것을 고려하면 앞서 말했듯이 BK21 역시 '대학원재정지원사업'이 되어 경쟁이 더 심해지지 않을까 싶다. 

뒤에도 나오지만 30%를 대학본부지원금에 배정했으니 이에 대한 평가도 당연히 중요히 여겨질텐데, 이 평가 역시 기존 BK21과는 달리 타 대학재정지원사업과 비슷하게 이뤄질 것이다. 아마 초반에는 대학원 별로 괜찮은 실험적인 시도가 이뤄질 수 있을텐데, 그 중 긍정적인 시도가 잘 살아남으면 이 30% 배정금액이 신의 한수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평가를 위한 평가, 체면치레와 paperwork으로 가득차서 차라리 대학원생 지원금액을 늘리는게 나았을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다.

- 연구실적 -> 인재육성:

'미래인재 양성형'과 '혁신성장 선도형' 구분 지원 
장학금 월 60/100 (석/박) -> 80/150(석/박) 확대, 박사 수료생 월 100 생활비 제공
(원래 '글로벌 인재양성형', '특화 전문인재양성형', '미래기반창의 인재양성형'으로 구분 지원되고 있었음)

Comment:

뭐 '~ 인재양성형'으로 구분하는 거는 단어바꿔치기일 뿐이고...('혁신성장!')

최대금액 변경 내용이 안 나와 있고 또 기존 BK21 사업단 장학금 수혜현황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장학금 최소금액 확대는 언제나 환영이다. 과기특성화대학 소속이 아닌 대학원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실질적으로 줄여주기 위해서는 최대금액 변경도 꼭 필요하다. 

박사 수료생도 원래는 지원대상에서 제외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월 100 보장은 큰 긍정적인 변화로 보인다. 다만 수혜가능기간을 분명히 제한할텐데 그런 세부사항은 나와있지 않다.  

- 형식적 융복합 -> 사회문제해결형

사회문제 해결 교육연구단 별도 육성

Comment:

이것도 뭐 그냥 정부 정책기조에 맞장구 쳐주는 용도라고 생각.

- 그 외 주요 내용
외국인 유학생 비율 40% 초과 금지 (원래 별도 제한 없었음)
대표성과 위주 질적 평가 중시, 대학 차원 대학원혁신 평가 도입
선정권역 전국/지역 구분 없이 단일권역화하는 대신 평가패널 별 2개 이상 지역대학 선정 의무 (다만, 여기서 말하는 평가패널이 2개 사업유형을 의미하는 것인지 다른 것인지 불분명)
참여대학원생 조교/연구원 업무 계약 체결 의무화
행정인력 채용 비목 별도 마련 통한 대학원생 행정업무 부담 경감

Comment:
외국인 유학생 비율 제한을 두었다는 것은 PLUS 사업 때 유학생 비율이 과도하게 높았던 사업단이 존재했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사실 확인이 필요할 듯. 그와 별개로 이런 제한을 둔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국민 세금을 외국인 유학생한테 쓰면 안되지!와 같은 이유면 연구진이 굉장히 오판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지금으로선 별다른 근거가 생각이 안난다...)

질적 평가 중시한다는 것도 매번 나오는 내용이라 얼마나 실효성 있게 지켜질지 모르겠지만 '대표성과 위주'와 '대학 차원 대학원혁신 평가' 두 내용 모두 경험상 '밖에서 보기 좋은 사례'가 높은 점수를 딸 확률이 높아 다소 우려되긴 한다. 그 대표성과라는 것도 결국엔 IF 높은 저널 게재가 아닐지... 대학 차원 대학원혁신도 결국엔 졸업 요건에 IF m 이상 저널 n 편 추가를 통한 연구역량 증대가 아닐지...

단일권역화는 결국 교육부 내부 조율을 통해 바뀌지 않을까 싶은데, 평가패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 않아 뭐라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이 역시 앞서 언급한 대학구조조정 가속화와 함께 갈듯...

마지막 두개는 두팔 벌려 환영이다. 다만 BK21 사업에서 주는 돈은 조교/연구원 업무 대가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저 의무화 범위가 어디까지일지 따져보아야 한다. 대학원혁신 방안에 포함되어야 실효성이 있을 것이다. 또한 행정인력 역시 이미 지금도 위촉연구원 등으로 별도 채용하고 있어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보다는 나아지겠지 싶다.


연말이다. 학생일 때는 연말이 다른 때보다 훨씬 바빠 정신 없었기 때문에 한 해 리뷰를 하지 못했다. 계속 뒤에 할 일이 정해져있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듯 하다. 하지만 딴 짓하는 회사원이 되니 지나간 일 년 동안 한 '딴 짓'에 대해서도, 삶 전반에 대해서도 리뷰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또 할 시간이 났다. 생각해보니 학부생 시절이나 대학원생 시절을 두고 리뷰한 적은 없고 워싱턴 인턴 생활에 대한 리뷰는 한 적 있다. 계획은 시기와 무관하게 정말 수십만번 세웠을 텐데 말이다. 반성하고 고쳐야겠다.

2018년에 나는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가? 그래서 어떻게 살았는가?

노트 여기저기에 짧은 단위로 계획을 세운 적은 많지만 긴 단위로 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 무의미하다고 여겨서다. 그리고 여태까지는 그 판단이 옳았다. 긴 단위로 계획을 세우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물론 여전히 어리고 앞으로도 어릴 예정이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디에 내 자신이 뛰어들고 싶은지 확신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그 질문에 확답은 못하겠다. 하지만 큰맘 먹고 대학을 나오면서 최소한 3년동안 어떤 방향으로 삶을 살아야 할지는 마음 속에 정해놓았다. 일종의 기준이 생긴 셈이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대학을 나와야겠다고 결심한 2017년 말에는 내가 기억하는 한 처음으로 다이어리를 구매했고, 다이어리 맨 뒷장에 전문연구요원 3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 전에 잠깐 왜 대학원에서 학업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전문연구요원을 굳이 나와서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기록을 해야겠다. 기록을 하지 않았더니 구체적인 정황이 기억나질 않아 한참을 생각하고 당시 적었던 다이어리를 꺼내봐야했다. 

일단, 스트레스가 극심했고 그것이 계속 이어질까 두려웠다. 일종의 터닝 포인트를 억지로라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감정변화가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고, 안으로도 잘 조절하는 편이다. 소위 말하는 '멘붕' 상태도 별로 겪어본 적 없는데, 이 사실을 내가 깨닫기 전에 주변 친구들이 알려줬다. 부럽다면서. 어쨌든 끝까지 겉으로 티가 많이 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2017년 말에 졸업논문과 교육부 '대학원생 권리강화 방안연구' 용역 과제(이하 교육부 과제)가 겹치면서 스트레스가 심해졌다. 그 외로도 작고 큰 일들을 놓지 못하는 상태였다. 대학원 총학생회 활동도 하고 있었고, (생각해보면 오히려 쉬어가는 시간이 되었지만) 조선업 도시에 대한 모험연구도 진행하고 있었고, 석사학생 대표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내 자신에게 기대를 크게 걸었던 졸업논문과 교육부 과제 모두 잘 안 풀리고 용두사미가 되어가는 것 같아 가장 힘들었다. 자살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차에 치이거나 과로로 쓰러져서 죽으면 다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런데 대학원에 남아 전문연구요원을 하기 위해서는 그 긴장감을 100%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쥔 채로 학업을 지속해야 했다. 1년 안에 수료 조건을 만족하도록 수업을 다 들어야 했고, 퀄 시험도 한개 쯤은 준비를 끝내야했다. 여러모로 심신이 망가진 상태에서 그럴 자신이 없었다. 또 박사 이후를 고려해서 계속해서 실적-은 곧 논문-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스트레스가 단순히 바빠서만 생긴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쉼이 필요했다면 조금은 위험부담이 있지만 그래도 박사 진학 후 조금 여유롭게 지낼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보다 큰 위험부담인 휴학도 선택할 수 있었다. 과감하게 대학을 나오기로 결정한 것은 무엇보다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 공부를 계속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급한 '조건'은 나 자신과 환경 모두에 해당한다. 물론 그 때는 나 자신보다 환경 탓을 하기 바빴다. 하지만 분명 그 때도 내 머릿속에 계속해서 나는 박사과정을 밟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위에 썼듯 심신이 건강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석사 2년동안 대략 내 관심분야와 큰 단위의 연구주제를 찾을 수 있었던 반면 계속해서 내 '기초'에 대한 의심이 계속됐다. 여러모로 사회학이 내 관심분야 및 연구주제의 뿌리라는 인식을 했지만 사회학과 학부생보다도 못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나다. 내가 다닌 대학원 특성상 나와 같이 공대 출신이 많았지만 다들 남다른 지식 기반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내게 큰 압박으로 다가왔다. 학부 때남들이 그토록 꾸준하게 책읽고 그 때 기준으로 '딴 공부'할 때 나는 뭐했나. 전공(신소재공학) 책마저도 멀리하고 족보 같은 문제 풀이로 학점만 챙겨먹던 시절을 크게 후회하며, 지금이라도 기초를 쌓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더불어 지금 학과와 지도교수님 아래에서 그런 '기초'를 쌓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일단 같은 학과에 사회학자가 없었고, 열리는 수업 역시 매우 부족해보였다. 내 관심사와 먼 수업들과 어쩔 수 없이 그 수업들을 기반으로 퀄 시험을 쳐야 한다는 사실이 - 많은 선배들도 답답해했지만 - 내게 더 크게 다가왔다. 어찌저찌 내 관심사에 연결짓는다고 해도 그걸 누가 제대로 평가해 줄 것인가? 이미 졸업논문을 작성하면서 지도교수님께도 여러모로 실망한 상태였다. 나는 이 곳에서 내 학문적 토대를 세울 수 있는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대답은 NO였다. 이 곳에서 졸업을 하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사상누각으로 여기며 불안감에 휩싸인 채 살아갈 것만 같았다.[각주:1]

그렇게 나는 역설적이게도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대학을 나왔다. 대학을 나오면서 세운 3년짜리 계획의 핵심 방향 중 하나는 '박사 과정을 밟을 준비'였다. 이 준비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 '나는 정말 박사과정을 밟고 싶은가?'를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대답이 Yes라면, 3년 후에는 구체적이고 자신있는 SOP(Statement of Purpose)를 미리 생각해 둔 대학원에 제출하고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주로 학문적 기본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이 '준비'에는 체력과 영어 실력도 포함된다. 영미권 외 대학원 진학을 결심한 경우 제2외국어까지 말이다. 

3년짜리 계획의 나머지 핵심 방향은 앞서 쓴 것보다 훨씬 고리타분하고 흔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핵심 방향과 여러모로 그 성격이 다르다. 바로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서의 커리어 쌓기'다. 첫번째 방향을 설정할 때는 나름 확신에 차 있었지만 두번째 방향은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흔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나중에 쓰겠지만 세운 계획에 비해 달성 정도와 그 노력도 굉장히 부족했다. 하지만 다시금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을 다잡고 방향을 보다 공고히 하고자 한다. 어쩔 수 없이 3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해야하는 상황에서 - 즉 하루 8시간은 어쨌든 회사 일을 해야 하고 현실적으로 그것이 '박사 과정을 밟을 준비'와는 거리가 먼 상황에서, 또 3년 이후로도 전업 연구자가 아닌 (현실적으로) 투잡 연구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나 자신의 또다른 성장과 발전 방향은 분명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게 왜 데이터 사이언스인가? 지금 회사에서 한시적으로 맡고 있는 프로젝트 기획 및 관리자가 되도 괜찮지 않나?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전적으로 경제적인 이유고(돈 많이 벌고 일자리를 보다 쉽게 구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그래도 그나마 박사과정 준비에 포함시킬 수 있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부연할 것이 없으니 각설하겠다. 후자에 대해서도 여기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겠다.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라는 직군을 이해함으로써 내 관심분야의 가장 큰 범위 주제인 Sociology of Quantification과 Algorithm Society 연구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는 것 정도 적고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적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관심은 있지만 공부가 부족한 탓에 더 적지도 못하겠고... 

다음 글에서는 본격적으로 Review를 시작해야겠다. Background of Review를 쓰는데 2시간 넘게 걸렸다... 이게 뭔가 싶지만 그래도 필요한 일이라 생각...

  

 

  1. 내가 이 글에서는 철저히 대학원을 나오던 시점에 하던 생각을 적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라. 대학을 나온지, 또 회사 다닌지 2/3년이 지난 지금은 또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아니면 이 생각에 기반이 되는 모든 조건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참 쓰기 힘들었던 과학뒤켠 기고글이다. ('글쓰기가 두렵다' 포스팅 참고)

원문은 여기에 전부 옮겨오기보다 과학뒤켠 홍보 차원으로 과학뒤켠 블로그에서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링크: https://behindsciences.kaist.ac.kr/2018/10/07/%EB%8C%80%ED%95%99%EC%9B%90%EC%97%90-%EC%83%81%EC%8B%9D%EC%9D%84-%EB%AC%BB%EB%8B%A4/)

과학뒤켠 매 호는 PDF 파일로도 볼 수 있다. 이 글은 파일에서 꽤 뒤쪽에 있고, (링크: https://stp.kaist.ac.kr/0608/view/id/1033) 여기에는 파일이 커서 전체를 첨부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 부분만 잘라서 첨부했다. 

아래에는 개인적으로 가장 쓰기 고통스러웠지만 써놓고 보니 고민했던 것들이 풀리는 기분이라 후련했던 "교수니까 괴수다"라는 소제목을 붙인 부분에서 일부만 인용하겠다. 

차후 과학뒤켠에 실은 내용은 논문이든 책의 한 단원이든 좀더 발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

대학원생 인권침해 문제는 ‘극소수 괴수’만의 문제일 뿐 ‘대다수 교수’는 문제없다는 사고방식과 태도는 분명 논파할 필요가 있다. ...(중략)... 하지만 괴수와 교수를 나눠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는 문제를 일으킨 교수를 괴수라는 다른 유형의 사람으로 구분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으로 치부한 채 괴수가 따로 있지 않다는 사실과 교수니까 괴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중략)...
교수는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상대하는 사람에 따라 괴수이기도 아니기도 하다. 괴수라는 유형의 사람이 따로 있어 그가 인권 침해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교수도 인권 침해를 할 수 있으며 그 순간 바로 괴수가 되는 것이다. 이는 교수가 아니고서는 괴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논문지도를 모텔에서 해주겠다거나, 훈계라면서 폭언이나 폭행을 일삼거나, 인건비를 횡령하거나 연구저작물을 가져가고, 이를 지적하거나 고발한 대학원생에게 학계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고 협박하는 등 교수에 의한 대학원생 인권 침해 사건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유형은 모두 그가 교수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었던 짓이다. 운 나쁘게 괴수임이 드러나도 대부분 교수로 구성된 징계위원회로부터 휴가에 가까운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받고서 다시 교단에 설 수 있는 것 역시 그가 괴수이기 이전에 교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교수라는 사람이 그럴 수 있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그가 교수라서 그럴 수 있었다는 생각을 갖고 ‘괴수가 된 교수’를 이해해야한다. ...(중략)... 교수가 어떻게 괴수로 변하는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할 경우 우리는 교수가 대학에서, 특히 대학원생과의 관계에서 어떤 입장과 위치에 서게 되는지, 어떤 요소들이 교수라는 자리를 구성하고 그 중 어떤 것이 괴수를 만드는 데에 기여하는지를 분석할 수 있다. 즉, 괴수를 개인이 아닌 사회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는 제도적 해법을 도출하기 위한 첫 발걸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교수는 어떻게 괴수가 되는가?

...(후략: 여기까지 읽을 정도로 글에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들은 원문을 읽으시는 것으로!)...


KAIST STP(과학기술정책대학원)에 지원할 떄도 썼듯이, KAIST에 진학할 때부터 이공계 위기라거나 연구개발정책 등 이공계와 관련한 사회적 이슈에 나름 관심을 갖고 해결에 힘쓰는 과학자(or 공학자)가 되고 싶었다. 과학기술정책학 부전공을 선택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니깐, 나는 처음부터 이렇게 될 생각이 없었단 말이다!!!

그랬던 내가 방향을 틀어 과학기술정책을 본격적으로, 공식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건....음 그 때부터 계속 할까 말까 할까 말까했던 것 같긴하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확정을 지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게 내가 처음 과학자(공학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정(?)을 할 때도 그랬듯이 조그마한 관성으로부터 시작해서 멈추기 힘든 지점에 다다르면 내 자신이 "내 갈 길은 이거구나"라고 수긍하는 그런 프로세스를 따르는 것 같다. 

그놈의 관성!!

어쨌든! 그렇게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워싱턴에 갈때까지 당장 학부 졸업 후 어떻게 할지 생각을 안했다. 한편으로 그냥 KAIST STP 진학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진짜 생각을 안했다. KAIST STP의 단점 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광화문에 있었을 때는 정신이 없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그래서 워싱턴에 가서 잠깐 내 미래를 생각했을 떄 정말 깜짝 놀랐다. 당장 서원 졸업하면 한 학기가 남고,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귀국하자마자 원서 쓰고 영어 점수 만들고 해야하는 게 아닌가! 내가 왜 이때까지 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나 자신을 많이 원망하면서 고민을 되게 많이 했다. 근데 그 고민은 사실 나와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포스팅을 하려고 한다.

즉, "과학기술정책을 공부하려면 어느 대학원을 가야하나?"

1.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2000년대 초부터 한국과학기술학회 창립, STS 서적 및 논문 발표 등 과학기술정책의 상위 학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STS의 중심인(혹은 이었던) 서울대 과사철이 있다. 21세기 들어 우리나라에 STS를 들여오고 꼭 과학교육에서의 STS가 아니라 그 학문으로서, 교양과 상식으로써 STS가 자리잡도록 한 데에는 과사철이 큰 공헌을 했음에 틀림없다. 대표적으로 홍성욱 교수님이 있고, 과사철 졸업 후 STEPI와 KISTEP에 간 분들도 꽤 있고, 또 STS 대중서적 및 교과서를 집필한 사람들 중 과사철 졸업생이 굉장히 많다.

이것 자체가 하나의 큰 장점인게, 그만큼 동문이 많이 사회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 나름 역사가 깊기 때문에 커리큘럼도 안정되어 있을 것이고, 인지도도 높을 것이다. (이런 평가는 사실 내 주관적인 평가라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다녀본 것도 아니고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도 없어서...)

반면 여전히 협동과정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과 다른 학교에서 비슷한 과정이 신설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는 지적 역시 유효하다. 홍성욱 교수님도 따로 과사철 소속이 아니라 정식으로는 생명과학부 교수라는 사실도 그것 때문이다. 협동과정이 확실히 따로 전임교수들로 구성된 대학원보다 부족한 점이 있다고 들었다. 내가 직접 체험해보진 않았지만 글쎄, 정부 구성에 있어 특정 부서가 '부'로 격상되거나 '처'로 격하되었을 때 이해관계자들이 큰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원리지 않을까.

또한 과사철을 졸업하신 분들이 공부를 했을 때는 우리나라에 관련 학과가 별로 없기도 해서 과사철로 모여든 효과가 있었겠지만 뒤에서 더 설명할 여러 대학원 과정들이 나름 겹치거나 특화된 분야를 다루면서 과사철이 예전만큼은 못하다라고 하기도 한다.

2. 서울대학교 TEMEP(기술경영경제정책과정)

이 과정을 소개받은 건 워싱턴에서 STGlobal이라는 STS 분야 석박사 학생 컨퍼런스에서 만난 KAIST STP 선배를 통해서였다. 그 전에는 듣도보도 못했는데, 막상 그 선배를 통해서 듣고 조금 찾아보니 많이 끌렸더랬지...

과학기술정책을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항상 어느 정도 "기술경영(MOT)"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선 더더욱 말이다. Management=경영이라고 봤을 때, 국가'경영'이라는 말을 써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고, 실제로 쓰기도 하는 것처럼, 정책과 경영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무언가가 있다. 나는 그 다른 무언가를 "공공성"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주로 정책은 Private sector보다 Public-Government Sector에 쓰고, 반대로 경영은 Private Sector(대표적으로 기업)에 쓰기 마련이다. 물론 바꿔서 써도 아주 이상하지는 않지만(국가경영, 기업의 정책-기업정책이라고 하면 국가의 기업에 대한 정책으로 읽히긴 한다.) 말이다. 

어쨌든, 내가 TEMEP에 끌렸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국가의 (특히 우리나라의) "기술혁신정책"은 기업의 "기술혁신경영"과 크게 다르지 않다!(내 사견으로는.....)

보통 정책과 경영의 차이를 공공성이 있느냐 없느냐 혹은 이익 중시 위주 여부로 나눈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술혁신정책 및 경영에 있어서는 둘이 큰 차이가 없다. 국가나 기업이나 기술을 통해 "이익을 뽑아내려는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특정 기술분야, 예를 들어 IoT라던가 무인자동차라던가에 국가가 얼마를 투자하겠다라는 정책을 세우는 건 삼성이나 현대차가 R&D에 투자를 늘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왜 내가 계속 '특히 우리나라는'이라고 붙이냐면,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정책이라는게 역사적으로 이런 종류의 기술혁신정책이 주를 이루고, 더 중요하게 다뤄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기 때문에 TEMEP 졸업 후에 과학기술정책을 다루는 연구원 등에 들어간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한다. 흔히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생각한다"라고 하는 비판이 유효하지만서도 우리나라가 역사적으로 그런 방식의 정책을 통해 나름 성공했기 때문에 쉽게 그 관성을 버리지 못한다. 

물론 나는 그런 거-과학기술을 경제발전의 도구로 삼는 것-에 대해 반감이 있으면서도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정책을 연구할 것이라면, 또 해당 분야에서 일자리를 잡으려면 TEMEP이 가장 무난하지 않을까 하는 현실적인 생각이 있었다. 과사철 만큼이나 역사가 있고, 따라서 인지도가 높고 동문이 많고 하는 장점이 있다. 또한 학위가 행정학, 경제학, 공학 이렇게 세 개 중 하나를 골라서 받을 수 있다는 장점 역시 있다. (물론 나는 군 문제로 공학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그 뜻은 나름 세 가지 분야의 커리큘럼이 짜여있다는 것이다. 과사철에서 경제학이나 행정학을 배울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꽤나 큰 장점이다.

그러나, 우리학교에서 TEMEP으로 진학한 여러 선배들의 말을 종합해봤을 때 TEMEP에 계시는 여러 교수님들이 국가과학기술정책을 연구분야로 삼는 경우가 매우 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할 때 한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지도교수와 그 지도교수의 연구분야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내가 원하는 강의는 잘 골라들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연구를 할 수 있을지 명확하지 않았다.

다녀보지도 않고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보다 TEMEP을 다니고 있으신, 혹은 다닌 적이 있으신 선배의 이메일을 인용하는게 빠르겠다.  

"기대하시는 정책설계, 정책입안, 정책연구가 어떤 느낌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잘 모르고 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클 것 같습니다. 언급한 부분들은 실무적인 느낌이 강하게 나는것 같은데 실제 이곳의 연구는 실무적인 느낌이 크지 않습니다.


대학원간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 논문을 읽어보라고 밖에 말을 할 수가 없을것 같습니다. 각 대학원에서 퍼블리시 된 논문들 (교수 이름으로 검색) 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연구실의 경우, 수요예측연구를 하는데, Bass 1969 논문을 바탕으로 한 기술확산 연구 흐름과 교통분야에서 처음 시작했던 이산선택모형 (discrete choice modelling) 을 통한 수요 예측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수요예측연구는 정책입안시, 혹은 기업의 신제품 출시 시에 정책 방향을 어떻게 설정해야할지에 대한 연구를 합니다만 국내에서 적극적인 실무 적용까지는 아직 흔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학교 내의 또 다른 분야의 경우 정보통신 정책 또는 기술사업화 대한 일반연구 (설문을 통한 SEM 이나 econometrics 의 regression) 를 하는 연구실, 과 클라우드 컴퓨팅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실, 조직관리를 연구하는 연구실, 거시경제 동역학 모델링 연구실 등이 있습니다.

이미 얘기했지만 우리 대학원 내에서도 교수간 연구분야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본인이 어떤 연구에 관심이 있는지 파악하려면 각 연구실에서 퍼블리시 한 논문 들 중 괜찮은 저널에 실린 최근논문을 두편정도 읽어보는 것이 가장 그 연구실의 핵심연구 방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학부생 수준에서는 논문을 어차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기 때문에 최소 인트로나 컨클루전을 읽어보고 내용을 파악해보길 바랍니다.  본인이 향후 박사 이상의 커리어를 선택하려면 해당 분야에서 최소 5년 이상 수학해야 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논문을 읽어보고 진로를 선택하길 바랍니다. 또한 이곳은 면접 때 교수들께서 이 분야가 어떤연구를 하는지에 대한 이해도가 선발에서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관심분야 교수들의 논문을 미리 읽어두는 것이 자소서 작성과 면접준비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미 말했듯이 STP 에서 어떤 연구를 하는지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비교를 배제한 이쪽대학원의 장점을 얘기하자면 종합대학의 대학원이고 융합과정이기 때문에 수업의 폭이 인문학부터 공학 통계까지 넓데는 점이 최대의 장점인것 같습니다. 단점이라면 융합학제이기 때문에 연구방향의 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향후 진로는 장점이자 단점인데, 새로 생긴지 얼마 안 된 분야이기 때문에 교수자리가 생기고 있다는 점, 많이 생기지 않아 이미 포화상태가 되었다는점이 있겠네요. 어쨋든 전통학제보다는 기회가 눈꼽만큼 더 있다는 점은 명확한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미 STEPI 나 KISTEP 으로 진학한 선배들이 너무 많아서 현재는 그쪽에서 우리 대학원 박사를 잘 안뽑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1. 서울대 TEMEP와 카이스트 STP는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

이미 알고 계시는 것 처럼 카이스트 STP academia 양성 쪽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고, 서울대 TEMEP는 산업체, 국방, 국가연구소에서 일을 할 때 학위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학위를 주고, 관련업종으로의 취업을 연결시켜주는 것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2.TEMEP에서는 KISTEP이나 STEPI등으로 취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알룸나이들이 이미 진출해 있고, 급하게 연구 인력이 필요할 때 알룸나이 연락망을 통해 연락이 오며, 사실 연구소에서는 공개채용보다 지인추천 채용을 선호하기 때문에(공개채용 공고를 올려놓고,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려 추천인을 받아 추천인 중에 선발하고, 공개채용으로 들어온 원서는 reject) 훨씬 더 기회가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3.KAIST TEMEP은 문화적 차이가 많습니다.

학문을 공부하는 분위기라기 보다는 networking을 형성하는데 더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면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공부와 연구는 교수님 및 선배들에게 도움을 받을 생각보다는 스스로 할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교과목 운영도 카이스트 STP에서 수업을 들으셨다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는 오래되었지만 커리큘럼의 구성이 체계적이지 않고, 과목과 과목사이의 연관이 크지 않으며, 제 경험으로는 실무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STEPI에서 위촉연구원으로 근무했습니다)

 

 

4. TEMEP에서는 국가연구소와 함께하는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학과 내의 커리큘럼이나 수업, 연구활동이랑은 "상관없이" "별개로", 가끔 여러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연구소에서 파트타임 등으로 연구에 참여할 학생들을 모집합니다.

전준하학생 같은 경우에는 이쪽 프로젝트에 참여하여서 연구 경험을 쌓는다면 바라는 공부가 되겠네요.

이것은 학교 내 커리큘럼과는 상관 없이 networking측면에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KAIST로 돌아온 이유

TEMEP에서는 학과내에서 추진하고 있는 연구분야 외의 분야에 대해 연구해나가기 힘듭니다. 알룸나이 네트워킹이 TEMEP의 최대 장점인데, 이 최대장점을 살릴 수 없는 분야의 연구를 원하면, 커리큘럼도 교수진도 학과제도도 여러가지로 학생이 힘들 수 있는 구조입니다. 제가 연구하고 싶은 분야를 TEMEP에서 연구하기가 힘든 환경적 여건과,저는 카이스트의 자유로운 문화를 좋아하기때문에 카이스트로 돌아왔고,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선배들의 메일을 받고 한편으로는 더 TEMEP에 끌리면서도(결국 일자리를 잡기는 TEMEP이 좋을 것 같다는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한편으로는 KAIST STP의 분위기를 알기에 조금 꺼려지기도 했다. 여전히 KAIST STP를 떨어지면 TEMEP이 좋은 차선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글쎄. 가더라도 석사만 하고(강의 위주로 많이 듣고 배우고) 다른 곳을 알아보지 않을까 싶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한 타임 쉬고, 다음 편에는 KAIST STP와 행정대학원, 여러 대학의 과학기술정책학과(UST, 한양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다들 건승을 기원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