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간에 참여했기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잡지 <과학뒤켠>에 글을 하나 싣기로 했다.

교육부 연구과제에 대한 글이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 외로는 별다른 제약이 없었고, 나도 언젠가 이 주제로 과학뒤켠에 글을 하나 실어야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냉큼 알겠다고 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오히려 내가 편집진한테 넌지시 때가 되면 글 하나 싣겠다고 말했던 것도 같다. 최근 뭣도 모르고 쓴 두 편의 칼럼이 나름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노트를 정리해가며 천천히 생각을 묵히고 토막 글을 쓰다보면 괜찮은 글이 하나 나오겠지 싶었다.

그리고 오늘 내 글이 실릴 <정책>섹션의 장에게 미완의 글을 보내고야 말았다. 절반도 쓰지 못한 채로. 사실 쓴 부분도 확신이 없다. 사흘 마감 연장을 받아내도 사흘동안 잠을 확 줄여가면서 꾸역꾸역 쓰긴 했지만 도저히 무슨 글이 될지 감이 오질 않는다. 한달이 조금 넘게 쓸 시간이 있었는데, 생각을 묵힌다는 이유로 부분부분 결과적으로 별 쓸모가 없었던 노트만 남기고 글쓰기에 돌입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와서 나는 내가 글쓰기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글쓰기가 두려운 이유는 좋은 글을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원이 아닌 회사를 다니면서 부쩍 읽는 글의 종류가 논문이 아닌 칼럼이나 기사가 많아졌고, 보통 SNS를 통한 추천으로 읽기 때문에 좋은 글을 많이 읽지만 더러 별로 좋지 않은 글도 읽는다. 전자는 배움과 동경의 대상이고 후자는 반면교사로 삼는다. '와 어떻게 이렇게 썼지'라는 생각과 '이렇게 쓰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이 오고간다. 그리고 막상 글쓰기 위해 자리에 앉으면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가득차버린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반성할 것이 수없이 많지만, 글쓰기에 한정지어 해본다면 내가 여태 '써야만 하는 글'만 써왔다는 것이 치명적이다. 돈을 받거나 직업적인 이유로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해졌다. 쓰기로 한 기고문, 정책연구용역보고서, 논문, 수업 RP(Response paper와 research paper) 등 외로는 글을 쓰질 않았다. 이전에 쓴 글(특히 워싱턴 DC에서 썼던 '전인턴 블로그')을 읽으면서 어떻게 별 생각없이 가볍고 쉽게 글을 써왔지 싶을 정도다. 블로그를 연 이유도 가벼운 글이라도 계속해서 써가면서 글쓰기를 생활화하고자 함이었는데, 블로그에 글을 쓸 때도 쉽게 타자에 손이 가질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잘 쓴 글 = 좋은 글 = 남들이 많이 읽고 잘 읽었다고 생각할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글쓰기가 두려워진다. 아마도 초등학생 때부터 계속해서 발달했을 남다른 인정 욕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특히 이번 사태가 일어난 데에 있어 첫번째 문제는 글을 쓰겠다고 할 때 당시 내가 무슨 말을 할지 확신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기고문에서는 대충 글의 목적이 이미 내 머릿속에 한마디로 정리되어 있었다. 최근에 쓴 글을 예로 들면 한국대학신문에서는 제목에 썼듯 교수들의 위드유 운동을 제안하고자 했고, 교수신문에서는 조교라는 제도의 현실이 누더기 대학을 기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세히 묘사하는데에 중점을 뒀다. 그런데 지금 쓰는 글은 처음에는 대학원생 인권문제를 두고 나오는 일부 의견을 반박해야겠다 싶다가도, 이건 또 마치 쉐도우복싱을 하는 것만 같아 막연히 더 큰 이야기를 해야겠다 싶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uniqueness, novelty를 엄청나게 따지고 있었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주장, 새로운 글을 원했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머릿속에 그게 정리되지 않은채로 출발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두번째 문제는 내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전문가가 된 양 자만했다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대학과 학문, 연구와 그에 대한 정책을 연구하는 연구자라고 규정하고 있고, 특히 대학원생 인권 문제에 대해 남들보다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읽었다고 자부한다. 아니 이건 자부심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남들보다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읽었고, 그게 다였다. 그 자료들을 내가 제대로 소화하고 있나? 잘 모르겠다. 연구가 끝났지만 내게 어떤 남다른 인사이트나 아이디어가 있는지 모르겠다. 공개되고 있지 않고 있는 그놈의 보고서도 계속해서 다시 읽으면 부족하기 짝이 없다. 졸업과 취직과 겹쳐서 제대로 집중 못했다고 자위하기엔 내가 너무 시끄럽게 하고 다녔다. 좀 닥칠걸 그랬다.

마지막 문제는 대학원을 나오면서 필연적으로 생긴 문제지만 내가 쓰는 글에 대해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원에서도 아주 외롭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동료 연구자가 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중요한 것 같다. 

아이고. 반성할 것 투성이다. 운동을 하며 TV를 틀었더니 백종원의 골목식당이 나온다. 그는 진짜배기 전문가다. 그와 같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번 한 것 같다. 그가 이른바 '솔루션'을 전해주면서 식당 사장들에게 '기본'을 강조한다. 기본이 안된 내가 당장 백종원이 될 수는 없다. 글쓰기의 기본은 일단 쓰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당장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글쓰기가 두렵다는 생각에 대한 글쓰기를 해본다.  

원제는 Writing for Social Scientists (1986). 

나는 논문을 포함해서 어떤 글쓰기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다. 때문에 석사 학위논문을 쓰면서 극심한 불안감에 빠질 수 밖에 없었는데, 절판되어 구하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중고로 구매한 하워드 베커의 <사회과학자의 글쓰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책을 처음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글쓰기나 방법론에 관한 책을 읽었고, 석사학위논문을 제 때 마칠 수 있었다.

현재 같은 책이 2018년 2월 <학자의 글쓰기>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이 책을 통해서 하워드 베커라는 사회학자를 알게 되었고, 애초에 시리즈로 기획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학계의 술책>, <사회에 대해 말하기>로 이어지는 사회과학자를 위한 글쓰기 가이드 3부작을 모두 구매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8년 90세의 나이로 그가 새로 낸 책 <Evidence>는 느낌상 이 3부작을 아우르는 저작으로 예상된다. (물론 이 책도 샀다.) 쭉 읽고 리뷰할 생각.

아래에 내게 특히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옮겨본다.


1-1. "만약 당신이 연구 초기부터 - 예를 들어 모든 자료들을 모으기 전부터 -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조만간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할 수 있다. 자료없이 초고를 쓰면, 자신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더 명료해지며, 그래서 앞으로 수집해야 할 자료들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즉 글쓰기를 통해서 연구설계 방법을 구체화시킬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먼저 연구를 하고 나서 "연구결과를 쓰라"는 좀더 일반적인 생각과 구별되는 것이다." (p.43)


1-2. "개요는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개요를 가지고 글을 시작하면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개요에 의존하여 시작하는 대신에, 모든 것을 적어가면서, 가능한 한 빨리 아이디어를 토해내는 방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첫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 - 당신이 작업해야만 하는 미완의 부분은 당신이 방금 적어놓은 다양한 것들이다 - 을 발견할 것이다." (p.102)


 2-1. "해결 불가능한 것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그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 당신은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당신이 생각하는 해결 방식은 무엇인지를, 왜 덜 완벽한 해결책을 선택했는지를,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독자에게 설명할 수 있다...(중략)...연구에서 흥미로운 딜레마를 구체화시키지 않았다면, 해결 불가능한 문제가 제기되지도 않았을 것." (p.107)

2-2.
 "해결 불가능해 보이는 문제에 대해 글을 써라. 그리고 그것을 당신의 분석의 초점으로 삼아라...(중략)...당신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독자에게 털어놓으려면, 당신도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으며, 항상 올바른 방법을 알고 결함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p.111-112)


3-1. "만약 혼자 힘으로 과학적 또는 학문적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상과학은 다른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을 씀으로써 이해와 지식을 향상시키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구와 글에서 이런 성과를 이루어낼 수 있는데도, 불가능한 것을 목표로 삼음으로써 스스로 실패를 자초해서는 안 된다." (p.213)

3-2.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인식하고, 지배적
인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적 구성요소를 찾아내고, 그 문제에 대한 좀더 중립적이고 과학적인 입장을 찾아 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중략)...진지한 학자라면 동일한 주제를 논의하는 경쟁적인 방식들을 일상적으로 점검해야만 한다. 지금 사용하는 언어로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문헌이 우리의 머리를 꽉 채우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이다...(중략)...문헌을 이용하라. 그러나 문헌이 당신을 이용하게 하지는 말라." (p.2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