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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셋(WASET) 사태가 비추는 학계의 민낯 (2018. 9, 과총 <과학과기술>)

작년 봄부터 대학원에서 돌아가면서 기고했던 과총에서 발간하는 월간 <과학과기술> '젊은이의 광장' 섹션이 올해 12월을 마지막으로 끝날 듯 하다.

워낙 원고료를 많이 주는 곳이라 아쉽기도 하지만, 대학원 안에서도 쓸 사람 구하느라 급급한 상황이라 (당장 나 역시 대학원을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쓸 사람이 없어 7월호인가에 썼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9월호에 다시 등판한 것...) 차라리 잘 된 것도 같다. 

한창 고민하던 WASET 사태에 대한 글을 썼고, 이는 앞서 다른 포스팅에도 언급했듯 과총에서 개최한 <연구윤리 대토론회 I>에 패널 토론자로 참석하는 계기가 되었다. PDF와 이북 링크는 아래와 같으며, 아래 원문 역시 옮겨놓는다.

PDF 링크: https://www.kofst.or.kr/kofst/PDF_20160211/2018/n031s592/201809_27.pdf

ebook 링크: http://ebook.kofst.or.kr/book/201809/#page=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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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셋(WASET) 사태가 비추는 학계의 민낯

지난 7월 뉴스타파라는 한 국내 탐사보도 전문언론기관이 와셋(WASET, World Academy of Science, Engineering, and Technology)이라는 수상한 학술단체가 개최한 이른바 ‘가짜 학술대회’ 심층취재기사를 공개했다. 기사는 소속을 속인 채 SCIgen이라는 논문처럼 보이는 아무 말을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을 사용해 논문을 제출해도 등록비만 내면 발표할 수 있는 학술대회가 성행하고 있고, 여기에 적지 않은 우리나라 교수와 연구원, 대학원생이 참석한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뉴스타파와 함께 국제 공조 취재팀에 속한 독일 NDR 기자는 엉터리 논문을 발표하고도 우수 발표 상을 받았고, 학술대회에 등록해 놓고도 자리에 나타나지 않은 국내 대학 연구실 사람들도 있었다. 보도가 일으킨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정부는 정부대로 개별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와셋과 같은 곳서 운영하는 ‘가짜 학회’에 참석하거나 ‘가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한 연구자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했고, 뉴스타파를 비롯한 여러 언론사는 후속보도를 계속하고 있다.

대학원생인 나조차도 와셋을 비롯해 BIT Congress 와 같은 수상한 단체의 학술대회와 학술지로부터 초청 이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덕분에 나는 보도 전부터 기사가 문제 삼은 학술대회나 학술지가 개최되고 출판되는 행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해당 학술대회 참석 명목으로 어렵지 않게 연구비 지원을 받아 ‘학빙여’(학회를 빙자한 여행의 줄임말)를 다녀올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학계에 남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면 별 고민 없이 경비를 신청해 다녀올 수도 있었겠지만 연구자로서의 양심 떄문이었는지 보는 눈이 두려워서였는지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런 경험 때문에 내게 ‘와셋 사태’ 그 자체는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는데, 다만 가만히 사태를 곱씹어보면서 마주한 학계의 민낯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가장 먼저 내가 놀랐던 것은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하는 것이 연구실적이 되고 점수가 된다는 사실이다. 일부 학문분야에서는 학술대회가 학술지를 대체하고 있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학술대회 발표를 연구실적 점수로 센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완성된 초고를 제출하여 동료 평가(peer review)를 기반으로 한 심사 이후 수정을 거쳐 게재하는 과정이 공식으로 자리잡은 학술지 논문 출판과 다르게, 학술대회 발표는 그 내용이나 이뤄지는 절차가 굉장히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다. 학술대회에서는 단순한 아이디어나 연구계획부터 이미 학술지에 게재된 연구결과까지 다양한 내용이 발표되며, 학술지처럼 동료 평가를 통해 발표 여부와 방식을 통보하는 학술대회가 있는가 하면 선별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세부 분야별 분류를 통한 시간표만 정리해서 모두 발표시키는 학술대회도 있다. 사실 이 때문에 와셋에서 개최하는 학술대회를 아예 가짜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참석했던 연구자들이 와셋 학술대회는 다학제적이었을 뿐이라며 여타 국내 부실한 학회보다 낫다고 항변한 것은 옹졸하긴 하나 아주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학술대회에 있어 진짜와 가짜, 고급과 저질, 건실과 부실의 경계는 ‘학빙여’와 ‘학겸여(학회를 겸한 여행)의 차이만큼이나 모호하다. 이처럼 형식에서 자유로운 학술대회 발표를 연구실적으로 올리도록 하는 제도는 잘못되었다.

이처럼 분명 제도적 문제도 있으나 다학제적이다 못해 각자 이해 못할, 그래도 무관한 ‘원맨쇼’를 하고 와서는 이를 자랑스럽게 연구실적으로 기재하는 연구자의 행태 역시 문제다. 더 나아가 사실상 동료 평가가 없는 가짜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고 이를 실적에 등록한 연구자가 적지 않다는 점은 훨씬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 물론 연구를 학문적으로 무의미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하거나 가짜 학술지에 논문으로 출판한다고 해서 그 연구가 무의미해지거나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두 현상이 드러내는 진짜 문제는 연구자가 더 이상 학술대회와 학술지의 본질적 의미인 학술 커뮤니케이션보다 발표나 출판을 했다는 사실 자체와 그 횟수에만 의미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연구 내용과 결과를 검토하고 그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분석하고 논의하는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아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점수가 되는 실적과 그 증빙 뿐이다.

‘와셋 사태’ 이후 학계가 보인 반응 역시 참담할 따름이다. 뉴스타파 기사에 가장 발빠르게 반응을 보인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은 성명서를 통해 ‘와셋 사태’는 “연구과제에 대한 허술한 관리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라며 정부에 전반적인 실태조사와 수사, 연구개발관리시스템 점검을 요구했다. 또한 “당장에 내세울 결과만 요구하는 정부의 책임도 크다”며 비리에 연루된 연구자를 단호히 처벌하라면서도 실태파악과 대책 수립을 빌미로 연구자를 옥죄지는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홍종학 전국교수노동조합위원장 역시 교육부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겠다며 와셋과 공모연구자들의 행태를 “(한국)연구재단이 몰랐다고 하는 건 직무유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의 논지는 와셋 학술대회 및 학술지에 10건에 가까운 논문을 발표 내지는 게재한 서울대 김동규 교수가 “학술대회 참가실적을 관리하는 건 한국연구재단이기 때문에 그건 연구재단의 문제"라고 답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연구자들의 반응을 의식한 듯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를 비롯한 3개 과학기술계 한림원은 관련 성명서에 ‘와셋 사태’를 연구윤리 문제로 적으면서도 연구관리제도를 혁신해야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분명 세금으로 조성된 연구비가 정당한 학문 활동이 아닌 무의미한 학술대회 참석 혹은 학빙여에 낭비된 것은 크나큰 문제다. 뉴스타파가 출장 경비의 출처를 추적하고 BK21플러스 사업단과 대학 산학협력단, 연구재단을 취재했듯 연구관리시스템과 이를 운영하는 연구비 관리 및 집행기관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학계의 일원인 연구자가 사태의 책임을 연구관리시스템에 돌리는 것은 어불성설이자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어린 애가 어른에게 남의 잘못을 이르듯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연구관리시스템과 교육부나 연구재단과 같은 유관기관은 연구비를 담당할 뿐 그보다 상위에 있는 전체 연구시스템의 주체는 아니다. 전체 연구시스템이 작동하는 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연구 내용과 활동, 그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전문가인 연구자 집단에 위임되어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동료 교수나 연구원, 대학원생이 와셋과 같은 사이비 단체에 연루되어 있는 것을 언론이 보도할 때까지 몰랐든 모른 척 했든 ‘와셋 사태’는 전적으로 연구자 집단과 그를 구성하는 연구자 개개인, 즉 우리의 문제다. 연구관리시스템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와셋 사태’는 연구시스템의 실패를 의미하며 이는 전적으로 연구자 집단 책임이다.

연구 내용은 뒷전이고 연구활동과 학술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잊은 채 실적 쌓기에 급급한 연구자. 전체 연구시스템 실패에 대한 책임은 방기한 채 연구관리시스템과 유관기관에 책임을 돌리는 연구자. ‘와셋 사태’와 그에 대한 반응 속에서 나는 학문 공동체의 붕괴를 읽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학문 공동체가 붕괴되었거나 부재한 상황에서 연구시스템과 학계가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따라서 ‘와셋 사태’에 놀랄 필요 없다. 이는 단지 우리 학계의 민낯을 비추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다른 누가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