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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연구자/1W1B

백세희. (2018).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1 & 2.

가끔 서점을 들를 때마다 항상 베스트셀러 칸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의 존재는 인지하고 있었다. 곰돌이 푸나 카카오프렌즈 등 각종 캐릭터가 제목에 들어가는 수많은 '심리'라는 분야로 분류되지만 실상 별 의미없는 (물론 당시 내 생각이다) 위로로 가득 찬 책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제목이 워낙 자극적이어서 조금이나마 생긴 흥미조차 참고 들춰보지도 않았다. 내 눈에 비슷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길래 그저 '요즘 사람들이 저런 책을 좋아하나보다'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요즘은 예전이라면 절대 읽지 않았을 심리 책이나 에세이에 손이 간다. 여전히 심리학이라는 학문 전체에 대한 불신이 어느 정도 있는데, 이전에는 불신을 넘어 심리학이나 심리 관련 책, MBTI를 비롯한 여러 검사들을 (SNS에서 장난 반 진심 반으로 하는 것들도 마찬가지로) 의도적으로 피했다. 웃기게도 그런 것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 자체를 '약함'을 드러내는 행위로 보았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청소년 자살률에 대한 기사를 보며 '요즘 애들 정신력이 약해서 걱정'이라고 혀를 끌끌 차실 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된다고 반발해놓고도 막상 나 역시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몸의 fitness에 집착하는 것처럼 마음과 정신 역시 건강하다고, 아니 건강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붙들고 아무 문제 없는 것처럼 나 자신을 속여왔다.

리디셀렉트에서 읽을만한 책이 없나하고 둘러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눈에 들어왔을 때, 의심 가득찬 눈으로 일단 리뷰를 훑어보았다. 흥미롭게도 평가가 정말 극단을 오고갔다. 제목에 속았다, 책 쉽게 쓴다 (책이 주로 정신과 상담 녹취록에 기반하기 때문에),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 덩달아 우울해지기만 한다는 사람들은 전부 별점 1개를 남겼다. 반면 별점 5개를 남긴 적지 않은 독자들은 공감된다, 위로를 얻었다, 치유받는 느낌이었다는 후기를 남겼다. 한 번 나름 큰 마음 먹고 일기장을 독립출판으로 낸 책을 구입했다가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지만, 사실 돈 낼 필요 없이 (갑자기 분위기 리디셀렉트 홍보..) 읽다가 마음에 안 들면 삭제하면 그만이었기에 읽기 시작했다.

에세이라서 술술 읽힐 줄 알았는데 중간중간 턱턱 막히는 부분이 적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별점 5개를 남긴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나 역시 책의 저자만큼이나 꼬일대로 꼬인 사람이라서인지 그런 느낌을 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계속 거부하다가, 책에 등장하는 (혹은 어떤 리뷰에서 말했듯 책을 '하드캐리하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하는 말 몇 마디에 나도 기분부전장애를 앓고 있는 저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인정해야만 했다. 최소한 지금은 말이다. 선생님과 저자가 대화 말미마다 스스럼없이 새로운 종류의 약을 처방하거나 약을 줄이거나 늘릴 때는 흠칫 놀라곤 했지만, 그 외로는 이해나 공감이 전혀 가지 않는다거나 덩달아 우울해진다거나하는 책을 나쁘게 평한 사람들의 말이 와닿진 않았다. 의도적인 노력으로 '그럴 수 있지'라고 넘긴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저자의 고백들과 나 역시도 상담을 받고 싶은 선생님의 반응이 이어졌다.

책을 평하기보다 인상 깊었던 부분 몇 가지를 되짚으며 지금 혹은 앞으로 내가 그런 마음 상태일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 지 생각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의존성향과 불안감

의존성향이 강해 보이네요. 감정의 양 끝은 이어져 있기에 의존성향이 강할수록 의존하고 싶지 않아 하죠. 예를 들어 애인에게 의존할 땐 안정감을 느끼지만 불만이 쌓이고, 애인에게서 벗어나면 자율성을 획득하지만 불안감과 공허감이 쌓여요. 어떻게 보면 일에 의존하고 있는지도 몰라요. 성과를 낼 때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 안도할 수 있으니 의존하지만, 그 만족감 또한 오래가지 않으니 문제가 있죠. 이건 쳇바퀴 안을 달리는 것과 같아요. 우울함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또 노력하고 실패하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주된 정서 자체가 우울함이 된 거죠

불안감이 숨어 있기 때문이에요. 내가 무언가를 이야기했을 때, 자동으로 ‘이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떠나지 않을까?’를 생각하니까 불안한 거죠. 이야기하는 게 좋은 경험일 수는 있어요. 하지만 결과가 한 방향일 수는 없다는 걸 알아야 해요. C라는 행동, D라는 행동이 나올 수 있죠. 반응은 이렇게나 다양하다는 걸 깨닫고 받아들이는 게 필요해요.

서로의 친밀함을 원하면서도 동시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욕구가 공존하는 모순적인 심리 상태를 ‘고슴도치 딜레마’라고 한다 (...) 나는 늘 혼자이고 싶으면서 혼자이기 싫었다. 의존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할 땐 안정감을 느끼지만 불만이 쌓이고, 벗어나면 자율성을 획득하지만 불안감과 공허감이 쌓이는 상태. 매번 상대에게 지독하게 의지하면서도 상대를 함부로 대했다.

사실은 많은 이에게 소중해지고 싶으면서, 넘치게 사랑받고 싶으면서, 타인에게 아주 관심이 많으면서 아닌 척한다.

항상 자유롭게 혼자이고 싶으면서도 또 항상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싶고, 의존하고 싶다. 전혀 다른 마음이 공존하는 것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겠지만, 혼자일 때도 나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함께일 때도 같이 있는 그 사람(들)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건 분명한 문제다. 나 혼자 괴로워하는 거야 내가 감내할 일이지만, 그래도 함께인 사람(들)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데 상대방을 실망시킨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렇게 불안감이 쌓이고, 혼자이든 함께이든 그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현상이 반복된다. 차라리 혼자인 게 낫다는 생각으로 집에 틀어박혀 있지만, 계속 사람을 갈구한다. 그나마 날 절대 떠나지 않을 (물론 이것도 확신해서는 안되겠지만) 오래된 친구들을 만날 떄 가장 자유롭고, 때문에 최근 친구들을 만나며 정말 눈물나도록 감사함을 느끼곤 했다.

처음엔 고슴도치 딜레마의 해결책이 '나 자신이 단단해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혼자를 추구했던 것 같다. 물론 아예 틀린 건 아니지만, 책에서 선생님이 종종 언급하는 이분법적이고 극단적인 접근을 피할 필요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같은 딜레마를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매일 집에 처박혀서 혼자 외로워 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계속 누군가를 만나면서 실상 별로 의미 없는 관계를 계속해서 맺을 필요도 없다.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기본이되 그보다 더 가까워지려 하는 사람도 멀어지려 하는 사람도 결국 나와 비슷한 사람임을 이해하고 그것이 내가 매력적이어서도 내게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자의식 과잉에 빠질 때마다 스스로 되새기곤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다'는 말도 맞지만, 그렇다고 외로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힘들겠지만 더 나아가 내 잘못으로 인해 떠나간 인연 역시 놓아주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할 수는 있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 언제든, 또 누구든 완벽할 수는 없기에 잘못을 저지른 나 역시도 인정하고 지금과 미래에도 잘못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실수는 누구나 한다. 내가 못나서가 아니다. 다만, 잘못을 인정하고 고칠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잘못 역시 용서하고 이해해야 한다.


    엄격한 초자아와 합리화

나: 양가적인 감정의 원인은 뭔가요?

선생님: 죄책감과 비슷해요. ‘목을 조르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는 자동으로 죄책감이 드는 거죠. 화가 났다가도 바로 죄지은 사람이 되어버려요. 일종의 자기 처벌적인 욕구죠. 나 자신에게 너무도 강력한 초자아가 서 있기 때문이에요(실제 내가 쌓아온 것 말고도 여기저기서 더 좋은 걸 차용해서 이상화된 내 모습을 쌓아놓았다는 것).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이상일 뿐, 현실이 아니에요. 그래서 매번 이상화된 기준에 도달하는 걸 실패하면서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는 거죠. 그렇게 엄격한 초자아가 있으면, 나중에는 벌을 받는 게 만족스러워지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사랑받는 것을 의심하고 일부러 상대에게 욕을 먹을 때까지 행동하면서, 상대가 나를 포기하면 오히려 안심하는 상태까지 가게 되는 거죠. 실제 내 모습보다 밖에서 제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외모 때문에 강박감이 나오는 건 아니에요. 이상화된 내 모습이 있기 때문에 외모에 집착하는 거죠. 그 기준의 폭을 좁고 높게 만들어놓은 거예요. ‘50킬로그램 이상이면 실패야!’ 이렇게요. 결국 이것저것 조금씩 시도해보면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어느 정도로 해야 편한지 알아보는 게 중요해요. 내 취향을 알고, 불안감을 낮추는 방법도 알게 된다면 만족감이 생겨요. 누가 어떤 지적을 해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게 되지요.

누굴 만나든 절대적인 선은 없거든요. 불만도 있을 수 있고요. 늘 부분과 전체를 구분했으면 좋겠어요. 하나가 마음에 든다고 이 사람 전체가 다 마음에 들고, 하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전체가 싫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자신은 ‘욕먹는 게 뭐라고’ 하면서 남들이 말하는 나, 남들이 날 바라보는 눈, 내가 마치 그들의 눈이 된 것처럼 계속 자아비판을 하는 거 같아요. 내가 느끼는 감정마저도 끊임없이, 중간에 어떠한 필터링 없이 반사적으로 타인의 눈을 의식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 보면 분명히 나한테 소중하거나 이득인 부분이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영향 때문에 과감하게 포기해버린다는 거죠. 그 상황에서 좀 더 이기적으로, 내 마음대로, 내가 중요한 방향으로 선택해도 돼요.

이기적인 욕구를, 마치 살 빼고 싶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들은 다 정상 체중이라고 해도 내 기준에 따라 더 빼고 싶다는 마음처럼, 내 개인적인 기준과 욕구를 좀 증진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나 상식적인 부분으로 바라보면서 그것과 차이 나는 내 욕구를 마치 잘못된 것처럼 낙인을 찍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해봐야 할 거 같아요.

나: 그냥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나를 받아들이는 게 나을까요? 

선생님: 아뇨,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아야죠. 세희 씨는 늘 내면에 이상화된 기준(완벽한 나)을 만들고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고 해요. 어떻게든 맞춰야 한다는 강박까지 있고요. 날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단점보다 장점을 즐기려는 게 필요해요.

예전부터 '정신승리'하는 사람들을 보고 부러워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곤 한다. 즉 정신승리가 정신건강과 행복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부정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정신승리를 하지 못해서 괴로워함과 동시에 정신승리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을 깔보았다. 하지만 그 자체가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정신승리 아닌가?

몸도 그렇지만 다른 영역에서도 실상 닿지 못할 이상적인 모습을 상정하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검열하고 자책하고 더 심할 때는 정말 내가 그 이상적인 모습인 양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그게 무엇인지 명확하지도 않지만 '성숙함', '어른스러움'이 언제부턴가 추구하는 최고 가치로 자리잡아서 자꾸 그 잣대로 남과 나를 평가하고, 또 가까운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요구한다.

감정을 배제하는 태도가 대표적이다. 감정이 중요한 관계에서 상대방이 아무리 나를 두고 말해도 나는 자꾸 제3자가 되어있다.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답답해하고 나는 나대로 불만이 쌓인다. 감정 없이 '그럴 수 있다', '미안하다', '이해한다' 등의 말을 꺼내며 어른스럽게 대화를 풀어나갔다고 정신승리하지만 실상 상대방의 눈에는 내가 영혼 없이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뻔히 보인다.

나는 그렇게 듣는 척 듣지 않았고, 보는 척 보지 않았다. 이해하는 척 이해하지 않았으며, 공감하는 척 공감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척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상적인 모습, 나 자신이 설정한 엄격한 초자아는 그렇게 이상적이지도 않고 또 현실적이지도 않다. 맨박스와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억압하는 동시에 그 모습에서 벗어나는 타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좁은 틀일 뿐이다. 내가 정신승리라고 칭하던 겉으로는 부러워하면서 속으로는 경멸했던 자연스러운 심리적 방어기제에 합리화라는 다른 이름을 부여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누구나 합리화를 하며 살아간다. 수없이 부딛히는 모순 속에서 합리화하지 않고 살 길은 없다. 상대방도 나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 이것도 저것도 내 모습이다. 이상형에 맞지 않아도 괜찮다. 충분히 합리화할 수 있다. 그 여지를 나 아닌 상대방에게도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