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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연구자/1W1B

N번방과 새벽의 방문자들

저번 단편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리뷰하면서 두 작품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새벽의 방문자들>을 따로 빼내 감상 쓰기를 미룬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여성작가만의 발칙함이 돋보였다고 얼버무렸지만, 사실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불편함과 죄책감이 머리 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에 더해져서 도망치듯 두 손을 키보드에서 거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왠만하면 말을 삼키는 것이 낫다는 생각만 강해져서, 자꾸만 말을 하지 않고 글을 쓰지 않을 이유만 찾게 된다.

성착취, 강간문화, 성차별, 성폭력, 젠더권력, 여성혐오... 이들을 '페미니즘 이슈'라고 통칭하는 것이 차라리 편할 수도 있겠다. 혹자는 N번방 사건과 같은 디지털 성착취 범죄를 페미니즘과 애써 구분하려 들테지만, 그럴 수 없다.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내지는 범죄자로 몰지 말라'는 주장은 틀렸다. N번방에 가입한 사람이 26만명이든, 중복된 사람이 있어서 그보다 적든, 텔레그램이 아닌 다른 통로를 통해서 유포하고 공유했을 사람들 때문에 그보다 많든, 그 수와 상관없이 그들이 남성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반대로 피해자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당했다.

그 이유는 재작년 과학뒤켠에 기고한 글에서 '교수니까 괴수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한 논리와 다르지 않다. 조주빈을 포함한 26만명의 성범죄자들과 같은 남성인 나를 다른 유형의 사람으로 구분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인간 유형으로 치부하면 내 마음이야 편할테지만, 여전히 같은 남성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해당 성범죄에 분명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이 남아있다.

다시 말해, 조주빈이 남성이라는 사실과 조주빈이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우연히 상관관계를 가지는 독립사건이 아니다. 전자는 후자의 필요조건에 해당하며, 피해자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성착취를 당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잠재적 가해자 내지는 범죄자로 몰려서 억울한 남성이 있다면, 불안과 두려움, 공포에 빠진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에게 뭐라 할 것이 아니라, 단지 XY 염색체를 갖고 태어났을 뿐인 남자가 어떻게 남성이 되는지, 더 나아가 어떻게 그들 중에 조주빈과 같은 사람들이 탄생하는지, 반대로 단지 XX 염색체를 갖고 태어났을 뿐인 여자가 어떻게 여성이 되는지, 역시 더 나아가 어째서 자꾸 그들 중에 성착취 피해자가 나오는지를 물어야 한다. 단순히 그 질문들을 던지는 게 아닌 자기 자신에게도 되묻고, 또 다른 사회구성원들과 함께 묻고 답해야만 한다. 내가 이해하는 바가 맞다면, 그게 페미니즘이 답하고자 한 질문이다.

내가 이 주제로 글쓰기를 주저했던 이유는 내가 '나도 다르지 않다'는 깨달았다고 말함과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르다'고 말하는 모순을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 역시 25년 넘게 남성으로 살아왔기에 내 정체성을 구성하는 적지 않은 요소들을 조주빈과 26만명의 N번방 회원들과 공유하며, 따라서 여성혐오, 젠더권력, 성폭력, 성차별, 강간문화, 성착취와 같이 페미니즘에서 제기하는 심각한 문제들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 나는 그들과 나 사이에 경계선을 만들어 구분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순 속에서 남성으로서 나는 어떤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끝없는 고민을 하다보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글을 쓰고 있다.

장류진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를 남성인 지훈 입장에서 쓴 이유를 두고 '자기 자신에게 심취해 있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사람을 주인공으로 쓰기 위해서였다기엔 결국 자신과 '자주지 않는' 지유에게 마음속으로 '씨발년'하고 욕하고서 '난 여기 [후쿠오카에] 왜 온 거지?'라고 자문하는 지훈의 여행은 남성들끼리 모였을 때 한번쯤은 꼭 나오는, 혹은 경쟁하듯 마구 쏟아지는 '무용담'과 놀라우리만치 닮아있다. 글을 읽으며 분명 작가는 어쩌다 남자들 위주로 모여있는 술자리 같은 곳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그러지 않고서는 남성의 생각과 마음을 이토록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남성들 사이에서 그 숱한 무용담은 지유처럼 여성이 욕을 먹거나, 섹스를 쟁취한 남성이 승리자가 되는 두 결말 중 하나로만 끝이 났다면,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끝까지 지훈을 비추며 무용담의 진정한 결말을 보여준다.

냐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기억 속의 여성들을 한 명 씩 불러내서 'XX년'으로 만들거나 성관계에 성공했다며 어깨를 으쓱거릴 때, 그 모습이 피해자를 '노예'라 칭하며 낄낄대던 N번방과 무엇이 크게 다른지. 많은 여성들이 주변에 n번방 회원이 있지는 않을지 두려워한다면, 나는 내 주변 혹은 지인 중에 n번방 회원이 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분명 있을 거라 확신이 들기도 한다. 혹시나 있을 이 글을 읽는 여성분들의 공포를 조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N번방 사건이 N번방 회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가 남성의 언어로 남성의 내면이 얼마나 찌질한지 드러냈다면, <새벽의 방문자들>은 시선의 방향을 바꾸고는 '이래도 남성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인정하지 않을래?'라고 묻는 듯 하다. 두 작품이 실린 책의 해설을 쓴 인아영이 정확히 지적했듯 "시선이 곧 권력이자 정치이기 때문"에, "보는 자와 보이는 자의 위계적인 구조가 전복되면서, 오직 성적인 대상으로 물화되고 교환되는 여성의 신체 대신 새벽에 남몰래 성매매를 하러 온 남성들의 초조한 얼굴이 대상화된다."

작가는 더 나아가 그 얼굴들에 '누군가의 아빠', '회사 옆자리 동료', 또 '전 남자친구'를 그려넣음으로서 단순한 대상화 그 이상의 것을 시도한다. 성매매를 실제로 했든 안했든, 그들은 여성의 몸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어디까지 가 닿을 수 있는걸까. 장류진은 인터뷰에서 <새벽의 방문자들>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나는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다른 세계에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어느 시점에는 나도 돈 주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겠다 싶었다"고. 질문은 여성들에게 이토록 현실적으로 다가가지만, 남성인 나는 그저 그것을 수요와 공급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하고 올건데, 같이 갈래?'라고 물어볼 때, 별 생각 없이 '하고 와. 난 한숨 잘래'라고 답하고서 불편한 마음 하나 없이 잘 수 있었다. 그 순간에 이미 우리는 같은 'N번방'에 들어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N번방 안에서 살고 있다. 나만큼은 N번방 밖에 있다고 자위하고 싶지만, 그리고 자신만큼은 N번방 밖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부럽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렇다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 N번방에서 추방당하는 것이 두려운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창피하게도 오히려 그 수많은 N번방에 의해 차별과 억압 속에서 피해받아 온 여성들에게 짐을 떠넘겼다. 찌질하고 초라한 한남답게 뒤에서만 조용히 지지하고 응원해왔다. 물론 N번방 안에서는 아닌 척 하고 말이다.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될 줄 알았건만, 정리는 커녕 머리와 마음은 더 복잡해져만 간다. 분명한 건 N번방 사건이 조주빈을 비롯한 N번방 회원들과 그 피해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건이 공분을 산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공감하며, 또 함께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남성 중에 나처럼 그 분노가 자기 자신에게도 향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더 공개적으로, 또 전보다 더 자주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응원하기를 제안한다. 그렇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몇 개일 지 모를 N번방 중 한개라도 더 부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