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산에서 즉석으로 잡은 숙소치고 잠자리가 나쁘지 않았다. 가족운영 게스트하우스인데 밤에 갑자기 셋이서 (아버지-어머니-아들) 야식으로 짜파게티를 끓여먹어서 냄새가 엄청 났던 것 빼고 다 좋았다. 2층 침대에서 자는데 1층에서 잔 아저씨가 코를 골아서 귀마개를 꼈다. 가져오길 잘했다. 덕분에 잘 잤다. 11시에 자서 7시에 일어났으니 딱 8시간 잤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자마자 만마니 않은 오르막길들이 나타났다. 조금 힘들다 싶으면 바로바로 내려서 끌고 걸었는데 그러길 잘했다. 점심 이후부터는 오른쪽 무릎이 살살 아파와서 힘을 주기가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속도를 내기가 힘들어져 더 빨리 지치곤 했다. 오르막길만큼 내리막길도 있었지만 자전거도로 상태가 좋지 않고 차도 혹은 보도와도 구분이 불명확해 속도를 내기가 힘들었다. 자전거 '라이딩'이라고 할만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자전거족의 애환을 십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제주환상자전거길이 잘 되어 있다고 한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상대적으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정말 별로였다. 만든 사람이 자전거를 타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도로가 꽤 잘 닦여있다고 해서 일부러 MTB가 아닌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빌렸는데, MTB 고를 걸 하고 후회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이라 중간중간에 자갈이나 흙이 쏟아져있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냥 도로 자체가 울퉁불퉁해서 자전거가 많이 흔들리고 (특히 속도가 날수록) 덜컹거렸다. 그 때 마다 엉덩이엔 불이 났다. 

더불어 자전거도로나 자전거가 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도 많이 부족했다. 자전거도로가 갓길 위치에 딱 차 한 대 너비로 나있다보니 차가 주차하기 딱 좋게 생겼고, 실제로 2~30분 마다 한번씩은 꼭 주차된 차 때문에 도로가 막혀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문제였던 건 자전거도로가 계속 차도와 함께 있다가 보도와 합쳐지다가를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이었다. 차는 차대로, 걷는 사람은 걷는 사람대로, 자전거는 자전거대로 위험해지기 십상이었다. 심지어 일부 구간에서는 자전거도로 위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 사람이 버스에 타려면 자전거를 막아서야만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어제 일기를 쓰면서 이제는 숙소 예약한 것도 없으니 여유를 가지겠다고 다짐했다. 중간에 멈춰서 풍경도 둘러보고 군것질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원시 부족의 옥수수밭에서 열리는 성인식[각주:1] 마냥 편의점이나 카페가 드문드문 있어 갈까말까하면서 지나친 이후엔 꽤나 오랫동안 또 달려야 다른 편의점이나 카페를 만날 수 있었다. 프랜차이즈 카페나 편의점 보다 동네 카페를 가고픈 마음이 있어서 거르면서 달렸더니 생각보다 휴식과 군것질을 많이 하지 못했다. 점심 포함해서 한 5번 정도 쉰 듯. 물론 중간에 사진 찍는다고 몇 번 더 내리기도 했지만.

자전거 대여 업체에서 준 지도에 추천이라고 표기된 곳들은 추천경로답게 경치가 정말 좋았다. 어제 해질녘에 망연자실한 상태로 본 산방산을 아침에 다시 보니 꽤나 아름다웠고, 나중에 언급할 성산일몰봉 다음으로 표선 해변이 매우 인상깊었다. 부속섬이 없는 지역에서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수평선을 보며 달리다보니 엉덩이 아픈 것만 빼면 붕 뜬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과장을 조금 하자면 태평양을 한 눈에 담은 듯 했다. 보말과 이름이 비슷했던 마을과 남원도 좋았다. 해변이 현무암으로 이뤄지지만 않았더라면 (물론 서핑을 해 본 적 없지만) 서핑하는 사람들이 그려질 정도로 파도도 멋있게 치고 있었다. 자전거만 아니었더라면 뛰어들어 파도를 탔을 수도... 

어제 네이버 지도가 자전거 경로를 안내할 때는 내비게이션 기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길을 헤매면서 어플 신뢰도가 떨어져 오픈라이더라는 어플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배터리가 빨리 닳아 계속 간당간당한 상태로 달려야만 했다. 일부 구간에서는 어차피 쭉 직진만 하면 되니 아예 다 끄고 달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도 사진을 마음껏 찍지 못했다. 그래도 잘한 점을 꼽자면 막판에 숙소 예약하겠다고 배터리를 많이 아껴둬서 성산에서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적당히 여유부리고 부지런히 달리다보니 원래 계획대로 딱 해질녘에 성산에 도착했다. 처음엔 성산일출봉이 잘 보이는 공터에서 노을빛에 반사된 일출봉도 꽤나 멋있어 사진을 찍기 바빴다. 그러다 문득 노을은 어떨까 싶어 서쪽을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감장이 벅차올랐다. 과장 하나도 없이 내가 이걸 보려고 이틀 내내 달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다가 정신차리고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었다. 여태 한번도 뒤로 돌아가서 사진을 찍은 적은 없었는데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 마음에 드는 구도를 찾아 다시 뒤로 힘껏 달리기도 했다. 내가 꿈꿔왔던 일몰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을 '우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제 숙소를 잡아야했다. 성산이 파티의 도시인줄은 몰랐다. 파티가 없는 게스트하우스를 찾기가 힘들었다. 여수에서 이미 한 번 경험을 해봐서 왠만하면 파티가 없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어제처럼 평온하게 지내고 싶었다. 덧없고 재미없는 파티를 뭐하러...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파티 없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니 내일 일출을 보기 위해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아저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진보다 훨씬 후지고 세탁비도 별도로 5천원이나 받았지만... 뭐 그러려니 해야지. 다들 일출 보러 내일 일찍 일어나는 듯한데 나도 가야하나 싶다. 무릎이랑 허벅지 아파서 일출봉에 올라가고 싶진 않은데...  

어쨌든 so far so good! 무릎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는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리라 생각한다...

오늘의 관찰

해안가에 관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종종 보이던데 뭘까. 보통 옆에 큰 액화산소 통이 있고 수산회사 표지판과 같이 있는 것을 보아 수산물을 처리하는 공장 같긴 한데... 근데 왜 액화산소인걸까?

오늘의 식사

아침: 토스트와 달걀. 게스트하우스 주인 말마따나 보기보다 먹을만한 정도. 생각보다 많이 먹었는데 많이 먹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빨리 배고파졌을 듯.

점심: 고기국수. 서귀포에서 노부부께서 운영하시는 한 노포에서 고기국수 먹었다. 맛있었다.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고.

저녁: 피쉬앤칩스. 성산에서 뭘 먹을까하다가 널린 해물뚝배기 대신 국내 유일하게 호주 피쉬앤칩스협회에서 인증을 받았다는 피쉬앤칩스 집을 갔다. 진짜 제대로 된 피쉬앤칩스였다. 글쎄, 물론 내 피쉬앤칩스 기억은 너무 오래되긴 했지만 한입에 딱 좋은 고기를 썼다는 사실과 잘 튀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집이었다. 만족 만족 대만족.

  1.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인상깊어 잊지 않고 있다. 옥수수밭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뒤돌아가지 않고 달려나와야 하는데, 손에 가장 큰 옥수수를 갖고 나오는 게 목표라고 들었다. 물론 옥수수를 딸 수 있는 기회 역시 한 번 뿐.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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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가는 비행기에 올라탈 때도, 제주도에 도착할 때도, 심지어 빌린 자전거 페달 위에 첫 발을 딛을 때 조차도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한다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시내에서 제주환상자전거길에 진입하기 위해 5km 가량을 달리면서 생각보다 몸이 무겁고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이후 하루종일 내내 이런저런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해가 지기 전에 예약해 둔 숙소 위치인 중문관광단지까지 갈 수 있을지 가장 크게 우려했고, 마음이 급해져서 시간을 줄여보겠다고 이리저리 환상자전거길이 아닌 다른 도로에 들어갔다 빠져나왔다를 반복하다보니 오히려 길을 헤메곤 했다. 미끄러운 비포장도로와 상대적으로 교통이 복잡했던 시내거리를 지난 걸 생각하면 결국 그냥 자전거길 쭉 탄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여유가 너무 없었고, 가장 기대에 부풀 여행 첫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치에 감탄하기보다 시간과 내 위치를 확인하기 바빴다.

사실 불안감의 시작은 자전거 대여업체였다. 분명 후기에서는 자전거도 좋았다고 하고 설명도 친절하게 해주고 여러 서비스도 부족함없이 받았다고 해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고맙게도 공항에서 픽업해 주긴 했지만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이후 아무 말이 없었고 알바로 보이는 사람은 정말 대충만 설명해주고 빨리 나를 내보내려고만 했다. 워낙 자신이 없어서 일정에 대한 점검과 각종 팁을 듣고도 싶었는데, 그런 것 없이 바로 출발해야만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달아준다고 기재되어 있었던 후미등조차 달아주지 않아 해가 지면 무조건 일주를 멈춰야만 했다. 자전거도 생각보다 낡았고 펑크가 났을 때는 아무리 업체에서 추천하는 보험을 들더라도 몇 시간은 멈춰서 기다려야만 하는 듯 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물통 거치대도 부러졌다. 부러져서 날카로워진 거치대를 보며 타이어 펑크 보험을 들었어야했나하고 생각했다. 아직도 걱정된다 남은 이틀 동안 잘 버텨주었으면...

급하게 달리고 달려서 산방산까지 첫 날 찍어야 하는 인증센터는 어떻게 다 찍긴 했다. 하지만 산방산 인증센터 도착하니 이미 해질녘이었다. 숙소 위치인 중문관광단지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었기 때문에 한 2시간은 걸리는 상황. 지금 생각해보면 빨리 결정내렸어야 했는데 숙소 예약 금액이 아까워서 그랬는지 1) 자전거가 들어가는 대형택시를 불러서 숙소까지 이동할 지, 2) 숙소 버리고 그냥 산방산 근처에서 남는 방 있는 곳으로 들어갈 지, 3) 자전거도 중간 반납하고 택시타고 이동해서 아예 새롭게 남은 일정을 계획할 지 고민했다. 지칠 대로 지쳐서 3번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

하지만 길바닥에 앉아 찾아보니 1번도 불가능했다. 대형 택시가 있다는 콜택시 업체 몇 군데에 연락했지만 모두 산방산 근처엔 없어서 힘들다고 했다. 결국 근처 게스트하우스를 찾았고. 그 결과 여기 와 있다. 연 지 얼마 안 되어 시설도 나쁘지 않고 주인도 친절하다. 버린 숙소 비용이 아깝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만족.

다소 당황한 상태로 출발하고 또 당황스러운 기분을 안고 오늘을 마무리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역시 타인의 호의를 당연하게 기대하면 안되는 거였다. 아무리 내가 돈을 주고 산 서비스라고 하더라도. 자전거 대여업체도 그렇고, 중문 쪽 숙소 주인도 당황한 내 기준에서는 친절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조언 또는 도움을 요청하는 내 연락에 본인한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묻고 본인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을 뿐...)



마음이 여유롭지 않다보니 바다 풍경에도 빨리 익숙해졌다. 아니, 감흥을 쉽게 잃었다고 해야하나. 급하게나마 찍은 사진들을 보면 참 아름다운데 말이다. 그래도 역시 남들 다 가는 지역만 다니는 게 아니라 해안도로 따라서 관광지가 아닌 곳도 지나다보니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다. 또 역시 몸이 고생하니 (지금 당장 피곤해서 일수도 있지만) 잡생각이나 원래 하던 고민들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에 대한 부채감은 남아있지만... 바로 여행을 와서 그런 지 어제 본 <조커> 여운도 길지 않다. 기생충과 다르게...

아래는 몇몇 관찰 결과.

1. 백년초 밭이 있다. 당연한 건가? 그나저나 옛날에 한창 백년초 열매 맛 무언가가 뜨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엔 찾기 힘든 듯 하다. 기억에 남는건 백년초 열매 맛 젤리가 들어있던 떠먹는 요구르트인데 못 본 지 꽤 됐다. 맛있었는데.

2. 제주도 학교 운동장은 천연잔디다. 관리도 대개 잘 되어 있는 듯 해서 정말 학생들이 쓰는 운동장 맞나 싶기도. 부럽다 부러워.

3. 제주도도 공기가 안 좋으면 별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 아쉬운 이유인데, 오랜만에 다시 보는 바다 풍경이 좋으면서도 시야가 뿌옇다보니 바다와 하늘이 청명하지 않았다. 태풍이 왔다 가서 공기만큼은 좋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다.

4. 풍력발전소 소음이 생각보다 엄청 크지는 않다. 그런데 바람이 세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3~4대에 1대 꼴로 작동을 안하던데 원래 그런걸까?

그리고 첫 자전거일주 경험에서 느낀 점 몇 가지. 

1. 엉덩이 진짜 엄청 아프다. 마찰 때문에 피부가 아픈 건지, 계속 눌려서 근육이 아픈 건지 분간이 안된다. (둘 다 아픈 거다) 아픔에 적응하다보면 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일어날 때 확 아프다. 그래도 계속 앉아 있으면 엉덩이를 계속 압박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자세를 바꾸거나 일어나서 타자.

(두꺼운 안장으로 교체했다는 자전거 대여업체 알바한테 최대한 엉덩이 안 아픈 걸로 해달라고 했는데 알바가 살짝 비웃으며(?) '엉덩이가 안 아플 수는 없어요'라고 했다.)

2. 해가 지평선에 걸리기 시작하면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6시반 즈음 되면 더 가기보다 근처에서 숙소를 물색하는 게 좋을 듯. 후미등도 없으니 더더욱.

3. 생각보다 라이딩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쉼터나 인증센터에서 가끔씩 만나긴 하는데, 무엇보다 나처럼 혼자 다니는 사람은 정말 없다. 

4. 쉬는 게 정말 중요하다. 여유가 없을수록 더더욱. 1시간에 5분 가량 휴식을 2회 정도 가지는 게 좋은 듯 하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그래야 근육경련 오기 직전 상태까지 다다르고서도 다시 풀린다. (제발 내일 아침에 안 아프길)

아래는 오늘 먹은 것들.

아침: 엄마가 싸준 치아바타 샌드위치 + 달걀. 역시 든든했다. 덕분에 힘차게 출발할 수 있었다.

점심: 협재칼국수에서 해물칼국수를 먹었다. 칼국수를 좋아하진 않지만 근처에서 그래도 제주도니깐 먹을만한 음식이 해물이었고, 혼자 빨리 먹고 다시 달려야했기에 먹었다. 해물이 많이 들어있었다는 것 말고는 그저 그랬다. (13000원)

저녁: 올레식당(맞나?)에서 1인 생선구이 정식을 먹었다. 생선 종류가 불명확한데 조금 기름졌던 것을 제외하면 만족했다. 살이 많았고 바싹 구워 가시도 잘 씹혀서 먹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밑반찬도 나쁘지 않게 나왔다. (9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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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한 달 전부터 계획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다녀왔다. 제주도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대학원 선배 2명의 해외 임용 및 유학 송별회 겸 만난 한 교수님께서 부전공 수업 초청강연(?)을 부탁하셨을 때였다. 10월 1일을 말씀하시기에 연차가 많이 남은 김에 3일(개천절), 9일(한글날)을 포함해서 쭉 휴가를 내고서 강의 후에 어딘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의일정이 확정되고 바로 2일에 청주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강의 준비와 더불어 여행 계획을 세웠다. 

대학원에 진학하고서부터는 어디론가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항상 휴양을 떠올렸다. 물론 지역에 따라 해야만 하는 구경은 했지만 주로 먹고 자고 쉬는데 초점을 맞췄다. 예전부터 꿈꿨던 휴양은 숲속에서 별빛보며 잠들고 새소리에 잠을 깨고 햇빛 아래 책을 읽는 (...) 그러면서 동시에 있을 것 다 있고 쾌적한 숙소에서의 하루였다. 하지만 몇 번의 경험 끝에 그런 휴양은 돈도 돈이지만 차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상이 되려 무기력해지자 휴양보다 20대 초반에 했던 여행 경험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어떻게 그랬지 할 정도로 미친듯이 돌아다녔던 기억. 기차로 일주일 안에 우리나라 한바퀴를 돌았던 내일로 여행 (뒤에 들어보니 그 때 같이 갔던 친구는 정말 힘들고 피곤했다고 한다...). 돈 아끼겠다고 러시아 항공에 점심은 항상 샌드위치나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로 때우면서 한달에 15개 도시를 찍고 왔던 유럽 여행. 운전해준 서원 동기 누나와 형의 도움이 컸지만 DC에서 플로리다까지 찍고 올라온 로드 여행 등. 나중에 책 후기를 쓰면 당연히 언급하겠지만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에서 밝힌 여행의 현재성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참고로 휴양은 현재성보다는 과거와 미래로부터의 도피에 가까웠다.

차도 없겠다. 그래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빡세게 매일 달리기만 할 자신은 없고, 지역마다 바다나 명소 구경도 천천히 하고 싶어 4박5일 일정으로 잡았다. 제주도환상자전거길을 대충 5등분하면 50km가 안되니 오전이나 오후를 골라 이동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지역 관광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9월말이 되자 태풍 소식이 들려왔다. 정확히 제주도 가는 비행기를 예약한 2일에 제주도 상륙. 3일은 휴일이라 비행기 표가 없었다. 그렇게 4박5일 일정은 2박3일로 줄어들었다. 국토대장정을 하시던 분들이야 크게 어렵지 않은 코스라고 하지만, 중학교 때 자전거로 지하철 1개역 정도 거리로 통학하거나 대학교 때 가끔 타슈나 친구 자전거 빌려서 어은동이나 궁동 다니던 내게는 좀 과해보였다. 4박5일이면 중간에 다치거나 일이 생겨도 충분히 다른 날에 더 달리면 되는 정도지만, 2박3일이면 해가 떠있는 이상 계속 달리지 않으면 (특히 1, 2일차) 목적지 도착은 요원해보이기 때문이었다. 

고민을 조금 하긴 했지만, 그런데 뭐... 이렇게 된 김에 20대 초반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미친듯이 달려보자. 비행기를 4일 김포 출발 편으로 바꾸고 자전거 대여도 다시 신청했다. 그렇게 아래와 같이 계획을 세우고 혹시 모르니 1일차 숙소만 예약을 해두었다. (취소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1일차: 제주공항 - 중문관광단지

2일차: 중문관광단지 - 성산

3일차: 성산 - 제주공항

찾아 읽은 자전거일주 후기들에서 항상 짐을 어떻게든 적게 들고 가라고 강조했기 때문에 노트북은 사치였다. 옷도 자전거 탈 때 입을 운동복(매일 게스트하우스에서 세탁)과 숙소에서 입을 잠옷만 쌌고, 세면도구와 구급약(수많은 파스)을 챙겼다. 노트북에서 백번 양보해서 전자책 기기를 챙기긴 했지만, 숙소에 도착하면 저녁 먹고 씻고 기록하고 자기 바빴기 때문에 책은 거의 못 읽었다. 대신 매일 기록을 열심히 하긴 했다. 

인터넷에 워낙 도움이 되는 글이 많아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갈 생각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나 계획중인 사람이 있다면 2박3일은 피하라고 딱 한마디만 하겠다. (나머지는 구글링 하면 다른 좋은 글 많으니 그 글들 읽길 바란다.) 2박3일이 불가능한건 아니고 또 본인 라이딩용 자전거가 따로 있을 정도로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여유가 아예 없지도 않겠지만 나와 같은 초보라면 좀 많이 빡세다. 

눈 앞에 펼치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아 잠깐 내려서 사진을 찍을까'와 동시에 '지금 내렸다가 제 시간에 도착 못하면 어쩌지'라는 갈등을 경험하기 싫다면 최소 3박4일은 필요하다. 

내 죽음은 갑작스런 죽음뿐이었다. 

갑작스레 심장마비가 오거나, 갑작스레 사고를 당하거나, 갑작스레 살해를 당하거나. 그런 죽음만을 상상해왔다. 늙어 죽는 건 차마 두려워서 생각하지도 않았다. 추할까봐서가 아니다. 두 죽음을 상상한 맥락이 달랐다. 

무서워서 떠오르기도 전에 애써 다른 생각하느라 바빴던 건 철없던 시절 죽음이란 무엇일까, 즐겨보던 만화 데스노트에서 말하듯 무(無)일까. 그렇다면 무(無)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다. 지금 이 순간 너무도 확실히 존재하는 나로서는 없어진다는 게 너무도 까마득해서 두려웠다.

반면 갑작스런 죽음은 내가 숨고 싶을 때, 사라지고 싶을 때, 내일이 오는 게 두려울 때 문득 떠올랐다. 물론 적극적으로 죽고 싶었던 적은 없다. 단지 잠에 들면서 내일 눈이 떠지지 않았으면, 달려오는 저 차가 나를 들이받았으면, 저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 숨기고 있던 무언가로 나를 찌르거나, 내리치거나, 목졸랐으면. 그게 다였다. 그런 갑작스런 죽음이 오히려 편안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때, 나 역시 아무런 대비도 못했을 때, 그 때 죽음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적잖이 했다.

물론 돌이켜보면 주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을 때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이제는 나도 잘 안다. 어떻게든 잘 자려고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내 위로 역시 거진 '일단 잠이라도 잘 자라'는 말이다.

한편 내가 비교적 가까이서 경험한 다른 사람의 죽음은 너무도 느린 죽음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중학생 때 시작한 암 투병을, 그로부터 무려 10년이 지난 후에야 끝내셨다. 모두가 예상한, 심지어 당신 역시 충분히 대비한 죽음이었다. 병원에서의 연명치료가 모두에게 고통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다.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자리를 옮기신 지 며칠만에 돌아가셨다. 

명절 때마다 내려가서 봬었던 할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그렇게도 아끼던 손주들 보고서 반가워 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얼릉 뒤져야 하는디'라고 했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으셨던 건지, 아니면 밤이 되어 어두워질 때마다 죽음이 두려워 생각을 바꾸신 건지, 그 힘겨운 항암 치료와 연명 치료를 그토록 길게도 견뎌내셨다. 그렇게 끝까지 버티다 고통에 못이겨 뻔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책이 넌지시 어리석다고 말하는 그 죽음이었다.

우리 엄마가 맏며느리라는 이유로 병수발을 들었다. 물론 내 일은 아니었기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나중에 듣자하니 최소한 할아버지나 고모들만큼, 아니 그 이상을 고생했던 것 같다. 그동안 엄마가 참 많이 힘들어했다. 할머니는 옛날부터 엄마를 참 싫어했다. 그토록 당신이 원하던 고추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명절 때마다 엄마를 울렸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가끔씩 '그렇구나'하고 마는 관찰자였다.

할머니 장례식 때, 특히 염습과 입관을 지켜볼 때 엄마는 거의 쓰러지다시피하며 울었다. 나는 도대체 이 과정을 왜 모든 가족과 친척이 보는 앞에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엄마가 왜 그렇게 우는 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나는 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되도록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서로에 대한 미움을 거뒀길 바랐다.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지만 꿈에서라도 할머니가 엄마한테 고맙다고 하거나 용서를 구한 건 아닐까. 끝내 그 마지막 순간에 엄마도 할머니를 용서함과 동시에 미워했다는 사실에 용서를 구한 것 아닐까. 두 불완전한 여성의 이별을 불완전 이하의 무책임한 남성은 눈물 없이 관찰하고만 있었다.

모두를 힘들게 한 그 어리석은 죽음을 긴 시간동안 내내 목격하고서도 '저렇게 죽지는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안했다면 당연히 거짓말일테다. 그렇게 책을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말 나는 때가 되었을 때 다른 무언가를 위해 조금 더 이른 죽음을 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겐 정말 그럴 용기가 있나?

당연히도, 지금 내 대답은 '아니오'다. 물론 며칠 혹은 몇 개월, 기적이 일어난다면 몇 년이라는 내 수명 - 물론 그게 고통 속일지라도 - 과 바꿀만한 게 지금으로선 마땅치 않다. 그래서 거꾸로 생각해보았다. 내 수명과 바꿀만한 가치를 찾는 것, 그리고 그 가치를 위해 하루하루 사는 것, 그게 죽기 전까지 해야 할 일 아닐까. 그래야 그 순간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낸 친구 녀석이 결혼했다. 워낙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착하기까지 해서 고등학교 때도 인기가 많았던 친구다. 그래도 같은 반 친구들한테는 연락 돌리라고 한소리 했는데 결국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만 초대한 듯 했다. 때문에 대전에서 있었던 친구 결혼식에 비해 동창회 느낌은 덜했다. 물론 워낙 인기가 많아 굳이 여기저기 알리지 않아도 찾아온 친구들이 많아 보였다. 친구 단체 사진만 세 번으로 나누어 찍었다. 

친구를 떠올리면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대학에 진학한 지 얼마 안되어 친구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다. 장례식에 간 건 처음이라서, 또 친구 마음이 어떨지 가늠하기도 어려워서 한 번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심지어는 눈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한 채 맞절만 하고 돌아섰다. 분향을 위해 줄서서 기다리며 머릿속으로는 고민은 많이 했지만, 막상 너무 수척하고 많이 운 듯한 친구 얼굴을 보니 말문이 막히고 몸이 굳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밤새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 것도 참으로 미안했다. 친한 친구라면 통상 그렇게 한다는 사실도 모를 때였다. 식사만 하고 자리를 떴던 그 때를 후회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입구에서 하객들 맞이하는 친구를 말없이 안아주고는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에 한숨과 함께 '가는구나'하고 말았다. 기쁜 날인데 나는 왜 그랬나. 뒤돌아서 뒤늦게 후회했다. 나중에 인사 차 친구와 신부, 양가 부모님께서 자리를 돌아다닐 때 행복하라고 여러 번 말해주었다. 행복해라. 잘 살아라. 물론 워낙 정신 없었을테니 제대로 들었을지, 기억은 할 지 모르겠다. 아무렴 어떤가. 행복해라. 잘 살아라.

요즘 나는 명상을 한다. 어쩌다 SNS를 통해 접한 기회로 '마보'라는 명상 어플 1개월 이용권을 받아서 쓰고 있다. 올해 초만 했어도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내가 명상을 한다니. 무엇보다 최근에 잠을 잘 못 자서, 그렇다고 매일 술을 마시거나 멜라토닌을 먹는 건 꺼려져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어플을 다운 받았다. 명상 어플이라고 해서 별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주제별로 강사가 녹음한 명상 가이드를 틀 수 있는 어플이었다. 명상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별 거 아니었다. 그냥 호흡과 몸 감각에 집중하며 잡념을 떨치는 연습이었다. 신기하게도 어플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을 잘 자고 있다. 잠자기 전 하는 명상은 10~15분 남짓인데, 끝날 때 쯤 되면 '아, 잠들 수 있겠다' 싶고, 몇 분 후에는 잠에 든다.  

그렇게 매일 잘 때만 활용하던 어플을 결혼식 가는 길에 켜보았다. '나와 모든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는 제목의 명상이 눈에 띄었다. 지하철에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강사를 따라했다.

숨을 들이쉬며,
'내가'.

숨을 내쉬며,
'행복하기를'.

숨을 들이쉬며,
'친구가',

숨을 내쉬며,
'행복하기를'.

숨을 들이쉬며,
'우리가',

숨을 내쉬며,
'행복하기를'.

다섯 번 쯤 반복하고 나니 역에 도착했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엿본다. 예전 미국에 있을 때 같이 있던 사람들이 다들 하길래 잠깐 했었지만, 사진을 올려야만 하는 SNS라서 그런지 경쟁하듯 넘쳐나는 자랑 포스트를 보고 있기가 힘들어 안하고 있었다. 여전히 아예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좀더 자주 엿보다보니 관점이 바뀌었다. '그래 너라도 행복해(보여)서 참 다행이다.' '너는 잘 살고 있구나, 잘 됐다.'

반면 페북은 인스타그램에 비해 어두운 감정이 더 많다. 위로를 구하는 글도 많다. 페북은 이제 내게 뉴스 채널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내보이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역시 처음에는 왜 저럴까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용기라 생각한다. 내겐 그 용기가 없다. 이 블로그 '끄적끄적' 카테고리 글이 늘어만 가는 이유다. 

어쩌다보니 내게 행복은 너무도 아득해져버렸다. 명상을 하면서도 '내가', '행복하기를'을 되뇌일 때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왜 친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 이렇게나 쉬운데, 왜 나 자신한테는 이토록 어려울까.

하지만 명상의 핵심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데에 있다.

'친구가,'

'행복하기를.'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너도,'

'행복하기를.'

'내가,'

'행복하기를.'

회사에서 맡은 업무가 너무 새롭다보니 퇴근하고 무언가 손에 잡기가 힘들다. (물론 핑계다. 그 전에도 그랬다.) 결국 지난주에 다녀온 여행 기행문을 이제서야 마무리한다.

차가 없다보니 2박 3일 내에 여수에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제한이 있었다. 숙소를 이순신광장 근처에 잡았기 때문에 북쪽으로는 첫 날 들른 만성리검은모래해변, 동쪽으로는 오동도, 남쪽으로는 돌산도, 서쪽으로는 여수시청 부근 소호요트마리나 이상으로 가기가 어려웠다.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 소호요트마리나로 향했다. 친구와 여행을 계획하면서 기왕에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통해 해양레저스포츠를 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여수시에서 지원하는 몇 군데에서 무료로 윈드서핑, 카약, 딩기보트 등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전날 강한 비바람 예보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은 해양레저스포츠 예약을 받지 않았는데, 우리가 간 곳은 오면 할 수 있다고 답을 줘서 구두로 예약 후 방문했다. 

다른 건 기구가 많지 않아 탈 수 없었고, 2인승 싯인 카약을 타볼 수 있었다. 딱히 배울 것도 없이 바로 노를 저어 바다로 나아갔다. 파도가 없다시피 해서 출렁이거나 뒤집어지는 재미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힘을 주는대로 속도가 나서 이리저리 항해를 맘껏 할 수 있었다. 예전에 조정 체험을 했었을 때는 힘이 더 들었던 것 같은데 하며 카약에서 내리고 보니 엄지손가락 안쪽에 물집이 잡혀있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와보니 날씨가 부쩍 더워졌다. 버스를 타고 숙소 쪽으로 돌아오며 어느 게장집을 갈까 고민했다. 워낙 게장집이 많아서 거기가 거기일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막상 이번 여행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게장일거라는 생각을 하니 신중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문득 쌍봉동에 살던 사촌누나가 떠올라 누나가 추천할 법한(..) 여진식당이라는 게장집을 가기로 했다. 전날 구백식당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감에 따른 결정이었다. 

지도를 보고 식당을 찾았는데, 이미 줄을 꽤나 섰다. 생각보다 줄이 금방 줄어들어 줄을 서며 감이 나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게장을 맛보는 순간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정말 좋았다고 감탄을 했다. 사실 게장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게장전문점을 간 적은 없고 한정식 집에서 반찬으로 나오면 먹는 정도였다. 매번 게장 매니아는 게장을 왜 좋아할까하는 의문을 가졌다. 그런데 인과관계가 거꾸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장 맛은 전문점에서 맛있는 게장을 먹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여느 TV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크고 통통한 게가 아니라 밥을 못 비벼먹을 정도로 작은 게였지만, 맛이 전혀 비릿하지 않고 식감이 살아있었다. 특히 힘들게 집게발을 깨서 조그마한 살을 건져 먹으면 다른 부위보다 훨씬 밀도있는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서 게장게장하는구나. 매일이나 매주는 아니더라도 매달 먹으면 참으로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한 후 짐을 숙소에 놔두고 오동도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생각보다 버스가 자주 다녀서 (혹은 우리가 운이 좋아서) 대중교통을 잘 이용했다. 오동도 초입 방파제서부터 사람이 정말 많았다. 그래도 7, 8월 휴가철 때보다는 적지 않았을까 싶다. 친구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방파제를 건넜다. 햇빛이 강해 선크림을 바르길 잘했다 여겼다.

오동도는 어릴 적 몇 번 와본적이 있어서 그랬는지 너무 익숙한 장소였다. 입이 떡 벌어지는 절경이기보다 편안하고 잔잔한 풍경이었다. 동네 뒷산을 등산하다 샛길로 빠질 때마다 넓은 바다가 보이기를 반복하는 여정이야말로 기대가 높지 않았던만큼 만족스러운 시간이었다. 친구와 함께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참 많이 찍었다. 잡생각이 사라지고 온전히 여행할 수 있었다. 꽤나 자주 모터보트를 탄 사람들 비명소리가 들려 고요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오후 내내 걷고나니 발목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동백열차는 자리가 꽉차 타지 못했다. 꾸역꾸역 다시 방파제를 걸어나와 케이블카 줄에 섰다. 해질녘에 타라는 글을 꽤 많이 보아 일부러 적당한 시간에 탔는데 초여름이어도 해는 너무 늦게 졌다. 시간대 때문이었는지 케이블카에서 본 여수는 그렇게 예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무섭다며 아래가 유리로 되어있는 케이블카 안 타길 잘했다는 친구를 놀리며 돌산공원에 내렸다.

해가 질 때가 되니 부쩍 날씨가 추워졌다. 친구와 몸을 떨며 전망대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가 하늘이 어두워지자 '여수 밤바다'를 보러 돌산공원 끝자락으로 향했다. 분명 여러 번 왔을텐데 처음 본 것만 같은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등 뒤로 통기타 동호회 공연에서 '여수 밤바다' 노래가 들려왔다. 그렇게 화려하지만은 않은 은은한 조명이 돌산대교와 여수 연안, 장군도를 둘러싸고 있었다. 문득 장범준이 이 경치를 보며 곡을 쓰지는 않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는 게 아닌 바다 옆을 직접 걸으며 쓰지 않았을까. 노래를 부르며 저녁을 먹을 겸 공원 아래로 내려왔다.

여수 밤바다 MV에서 한가인이 쓸쓸히 소주를 마시던 포장마차는 없었다. 시끌벅적 왁자지껄 주황빛 가득한 포장마차들만 많았다. 자리도 없었거니와 음식도 별로일 것 같아 좀더 안쪽에 있는 선어삼치횟집을 찾았다. 유튜브에서 훑어보다 눈에 걸린 집이었는데, 1층에 자리가 없어 다락방처럼 생긴 2층에 친구와 단 둘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소맥과 소주가 꿀떡꿀떡 넘어가는 저녁이었다. 친구는 그렇게 인상깊지는 않았다고 하나, 나는 제대로 된 선어회를 먹은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보통 많이 먹는 광어나 우럭 활어회(특히 전날 게스트하우스에서 먹은 걸 생각해보면)는 쫄깃탱글한 식감 외로는 딱히 특이할 게 없었다면, 훨씬 도톰하게 잘린 삼치 선어회는 그 재료 본연의 맛을 더 음미하기 좋았다. 적당히 기름지고 적당히 비릿하고. 게장처럼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은 아니었지만, 가끔 생각이 날 법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사람 많은 포장마차 거리를 걸었다. 딱새우를 못 먹어서 못내 아쉬워하던 친구는 계속 포장마차도 가자고 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회 배달 앱으로 한 번 먹어본 나는 딱새우 별거 없다고 말리긴 했는데 이제와서 밝히자면 딱새우 맛있다. 그냥 포장마차 분위기가 별로인데다가 왠지 음식 질도 별로일 것 같아 가지 말자고 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거나하게 취한 다른 게스트하우스 손님들이 몇 명 있었다. 파티에서 만난 여자들이랑 2차를 가고 싶었는데 화장실 간 사이에 자기들끼리 가버렸다며 신경질을 냈다. 못내 아쉬워하더니 술을 더 마시러 나간다. 중간에 잠에서 깨기 싫어 귀마개를 하고 잤다. 다행히 푹 잤다.

첫번째 날과 두번째 날 부지런히 돌아다녀서 마지막 날은 딱히 할 게 없었다. 전날보다 더 느지막히 일어나서 좌수영바게뜨버거와 여수당바게뜨버거를 둘다 먹어보고 기차를 탔다. 혹시 글을 읽고 여수 가시는 분들이 있다면 좌수영바게뜨버거를 드시라. 여수당에서는 쑥 아이스크림만 먹고.

종종 이렇게 여행을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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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 게시판 글만 늘어가는구나...

몇 없는 친한 친구와 여수를 다녀왔다. 

훈련소에 있으면서 친한 친구와 여행을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졌다. 맞다. 나는 수다쟁이다. 가끔씩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하지만 그게 정말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을 '내 이야기'라면 아무 곳에서나 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애매하게 친분이 있는 사람보다 초면에 하기가 더 쉽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친한 친구가 편하다. 거꾸로 친한 친구 이야기도 궁금하기도 하니까.

그렇게 수다를 떨며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다. 우선 여행을 가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장소는 다소 익숙한 여수로 결정했지만, 그래도 여행지로서 여수를 가보니 색달랐다. 흔히 말하는 휴양지 풍경이었는데, 그 익숙함 때문에 가기가 꺼려지기도 하고, 다시 찾고 싶기도 한 분위기를 다시 맛볼 수 있었다.

금요일에 휴가를 내고 아침 기차를 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른 아침 일정은 엄마의 잔소리로 시작한다. 별다른 일정이 없어도 꼭 내가 일어나기 전에 아침을 차려주시고는 내가 나가기 전까지 길찾기 앱을 보며 얼른 나가라고 등을 떠민다. 그 속에서도 여유롭게 엄마 잔소리를 더 듣고 나가야 딱 5~10분 전에 약속장소에 도착한다. 그 날도 다름없이 그렇게 친구를 만나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오랜만에 꽤나 오랫동안 타는 기차라서 (해봐야 3~4시간이긴 하지만) 여유롭게 책 읽고 음악 듣고 친구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경기도를 벗어나기 전에 둘 다 곯아떨어져 잤다.

사실 첫 날은 태풍급 비바람이 예보된 날이었다. 그래서 먹을 거나 먹으러 다니자고 했는데 도착해보니 적당히 흐린 날씨였다. 우리는 만성리 검은모래해변에서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해변은 해변이었고, 모래는 검었다. 친구 말마따나 맑고 탁 트인 바다 모습이 아니라서 약간 아쉬웠다. 하지만 파도소리와 물이 밀려나며 나는 자갈 소리는 신기하고도 편안했다. 가끔씩 빗소리, 파도소리 등 자연에서 가져온 소리를 듣곤 하는데, 이 소리도 목록에 추가하려고 냉큼 영상으로 찍었다. 

수산시장 쪽을 걷다가 '구백식당'에서 서대회와 금풍생이 구이를 먹었다. 서대회는 원래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친구한테도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역시나였다. 서대회와 서대회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원성을 사겠지만, 양념맛으로 먹는 서대회보다는 발라먹기 힘들고 살이 별로 없지만 나름 특유의 맛이 있는 금풍생이 구이가 나았다.

점심을 먹고 한 사우나에 딸린 옥상카페를 갔다. 식당과 마찬가지로 계획에 없던 일이었는데, 생각보다 경치가 무척 좋았다. 커피도 비싸지 않은데 양은 많아서 사진 수십장을 찍는 내내 홀짝일 수 있었다. 정면에 돌산대교, 오른쪽에 거북선대교가 보이는 경치는 검색해도 잘 나오지 않는 장소치고 꽤나 아름다웠다. 친구가 사진에 욕심이 많아서 20대 초반으로 되돌아간 듯 각종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어댔다.

또 정처없이 걷다보니 벽화마을을 걷고 있었다. 가기 전에는 도시마다 있는 벽화마을을 뭣하러 가나하는 생각이었는데, 딱히 할 것도 없어 1004m를 걸었다. 벽화마을을 중심으로 '인스타 예쁜 카페'라고 부를 법한 카페들이 최근 여럿 문을 연 듯 했다. 대충 둘러보고 숙소에 들어와서 쉬었다.

오후 8시부터 게스트하우스 파티가 있어 일부러 저녁을 먹지 않았다. 회와 족발을 준다고 해서 약간 기대를 했는데, 음식은 일단 큰 실망을 안겼다. 둘다 어디선가 배달해서 그 자리에 몇 시간동안 놓여있었던 맛이랄까. 싸구려 뷔페에서 먹을 법한 메뉴였다. 파티에 크게 기대를 한 건 아니었고, 비가 온다 해서 저녁에 할 것도 없겠거니 신청했는데 역시나였다. 다들 술을 엄청 마셔대더니, 결국 몇몇은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고 말았다. 그래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약간 설렜는데, 얼마 안 가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방에 일찍 들어와서 책 읽다가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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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지 5일 남짓 되었는데도 자꾸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 한 번 털고 가려고 한다.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끝까지 지켜보며 했던 생각, 함께 본 친구와 대화를 나누며 걸었던 거리에서 했던 생각, 술냄새가 진동하는 심야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했던 생각들이 일부러 찾아보지 않아도 접할 수 밖에 없는 지인들이 남긴 해석과 리뷰 때문에 흐릿해질까 싶어 더더욱 글로 써야겠다.

친구가 기우(최우식 분)에게 수석을 선물해주는 씬에서 처음 나왔던가. 기우가 '이거 상징적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굉장히 이질감을 느꼈다. 대사가 뭔가 어색했다. 그리고 얼마 안가 연교네 집에서 기우가 또다시 '상징적'이라는 표현을 쓰고, 이후로도 상징적이라고 감탄사를 내뱉는 것을 보고 감독이 그 이질감과 어색함을 의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에서 연출은 곧 상징이다. 인물, 장소, 사건부터 소품, 대사, 구도, 색감, 소리 등. 모든 것은 무언가를 상징하며, 그렇기에 감독의 의도에 맞게 연출되어야 한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좋은 영화에서는 그렇다. 한 영화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 또 봉준호 감독이 '영화를 보고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 역시 영화 그 자체가 상징의 집합체고 그 상징이 가지는 의미는 무한히 확장하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것들이 너무 많고 또 상징의 방향이 일정치 않아 그 의미가 불분명할 때 영화는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다. 반대로 누가봐도 무엇의 상징인지 뻔하고 심지어 그 의미를 구구절절 설명하려 드는 영화는 단순하다 못해 망한 영화다.

때문에 나는 영화의 주인공이 어떤 대상을 두고 '상징적이다'라는 대사를 하는 걸 상상하기 어려웠다. 앞서 말했듯 망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너무도 당연한 금기였다. 기우가 상징적이라고 한 대상들은 모두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관객 역시 상징적이라고 생각할만한 연출이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기우를 통해 보기좋게 그 금기를 역이용한다. 기우가 왜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맞춰보라는 듯 말이다.

이 영화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영화 속 몇몇 장면이나 줄거리, 흔히 리뷰에서 언급하는 계급으로 나뉜 현실 사회가 떠올라서가 아니다. 기우가 가진 사고방식이 나와 너무 비슷해서, 내가 너무 기우와 같이 생각하고 살아와서, 기우 모습 속에 나 자신이 보였기 때문이다.

기우가 상징적이라고 표현했던 대상들은 기우로 하여금 계획을 세우고 또 다른 계획을 계속해서 붙여나가도록 만든다. 다시 말해 그 상징적인 것들은 곧 기우가 세우는 계획의 원천이다. '우와, 이거 굉장히 상징적이다!'고 감탄할 때 기우는 마치 계시를 받은 신도와도 같다. 그 상징은 계획을 세워도 되겠다는 파란불임과 동시에 어떻게 세워야 할지도 알려주는 표지판인 것이다.

그렇게 기우와 기정은 상징적인 것들을 만날 때마다 확장해나간 계획 속을 살아가고, 어느새 기택과 충숙까지 함께 계획에 합류한다. 계획이 틀어지기 직전 가족이 가진 술자리에서 기우가 가지고 있던 계획을 기억하는가? 모두가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기우만큼은 진지하게 본인의 계획을 말하고 있었다. 폭우, 그리고 문광과 함께 상황은 계획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가족은 다시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고 기택이 말한다. 아빠에게 다 계획이 있으니 없던 일로 하자고. 뒤에도 그가 직접 말하지만 거짓말이다. 무계획이야말로 그가 여태 인생을 버텨 온 방식이다. 하지만 기택의 고백이자 충고를 듣는 순간에도 기우는 수석을 꼭 껴안고 있다. 그렇다. 그는 여전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는 수석이 여전히 상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상징이 바뀌었을 뿐이다.

아마도 기우는 수석으로 시작한 본인의 계획을 수석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듯 하다. 하지만 다시 그 계획은 무너진다. 오히려 그 수석은 자신의 머리를 들이받는다. 그렇게 기우가 정신을 차리나 싶지만... 마지막 씬에 나오듯 전혀 아니다. 이제는 집착으로까지 느껴지는 그는 또 다른 계획을 세운다.

결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지. 나처럼. 어쩌다 마주한 상징적인 대상들에 끝없이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힘입어 계획을 세우고 그 의미와 계획 속에 살아가는 너와 나는 그런 인간인거야. 상징적인 것들에 부여한 의미를 바꾸고 계획을 틀지언정 무계획으로 살지는 못하는 우리. 마치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곳곳에 감독의 의도 아래 연출된 것들로 가득찬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나는 이게 나쁠 것 없다고 생각한다. 답답하기는 하지만. 

다시 천천히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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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주인공 기우는 누가봐도 감독이 의도한 연출에 '상징적이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감탄하듯 내뱉는다. 영화에서 금기시할 법도 한 그 대사를 집에 돌아오는 길에 끝없이 되뇌었다.

영화를 취미 이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내 일상에서 마주치는 장소와 시간, 물건과 사람에 상징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찍을 때도 그 상징적인 것들에 엄청 집착했으니, 내 삶을 여러 편의 영화라고 여기고 있다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치만 오늘만큼이나 상징적인 것들로 가득찬 하루가 있을까 싶다.

기껏해야 열심히 뛰는 게 전부인,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발목이 아파 절뚝일 수 밖에 없어 매번 고민하는 축구.

한창 석사 1년차 때 관심을 가지고 팠던, 지금의 관심사로 오기까지의 길 초입에 있었던 과학기술인력정책과 대학 R&D, 그래 내가 저걸 고민했었지, 연구했었지 싶었던 한 박사님의 발표. 

어쩌다보니 내 인생의 큰 전환점 그 시기에 위치한 서원 시절을 떠올리게 만든 원생 한 명의 결혼식. 직접 보거나 듣지는 못했지만 굉장히 전통적인 결혼식과 퀴어 축제의 분위기 속 정상적인 남녀 결합을 축복하면서 동시에 무지개 색깔로 7행시를 지었다는 목사의 주례.

퀴어 축제 행진과 나란히, 하지만 보도로 걷다가 결국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 거리를 가로질렀던 시간.

보고싶었던 사람과 보고싶었던 영화와 이런 대화를 나눈 게 언제였던가 싶었던 산책.

고민 끝에 택시 대신 탄, 술냄새로 가득 찬 채로 그 산책 길을 거꾸로 다시 즈려밟으며 먼 길을 돌아온 심야버스.

이렇게 연출로 가득 찬 하루가 또 있었나. 

감상이 과한 듯 하니 자면서 영화 한 편을 끝내야겠다. 

언제부터였을까. '돈'은 내 머리 속에서 점점 차지하는 영역을 확장해갔다. 대학원생 떄만 하더라도 돈은 먹고 살 정도만 있으면 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조건에 해당했다. 돈은 됐으니 일 대신 내가 하고픈 연구를 할 시간이 주어지길 바랐다. 물론 원하는 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일이 쌓였고, 돈도 쌓였다. 물론 지금 세보면 어차피 다 푼돈이지만, 모아놓고보니 그렇게 적은 돈도 아니다. 이번에 계약한 원룸 전세자금 중 대출금을 제외한 20%를 부모님께 손 안 벌리고 마련했다. 

입사 직후까지도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돈은 상관없으니 직무나 빨리 바꿔줬으면 좋겠다는 바람 뿐이었다. 이러려고 취직한 게 아니다. 데이터 사이언티스트가 되어야 한다. 데이터 사이언스를 업으로 삼아 나중에 그것이 사회 곳곳에 자리 잡았을 때 그 사회를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 회사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으로 계속해서 어필했다. 난 팀을 옮기고 말 것이다. 그거면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헷갈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시작은 대학원 직속 선배 두 명이 글로벌 박사 펠로우십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였던 것 같다. 그들은 하루종일 본인이 하고픈 연구를 하고도 연 2천만원을 받는다. 자의든 타의든 연구과제 몇 개를 더 하고 추가로 돈을 더 받겠지. 그럼 하루 절반을 자괴감을 느껴가며 일하다가 퇴근 후 저녁을 먹고서야 공부를 시작하는 내가 받는 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사실이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상장하면 연봉을 크게 올려주겠다는 회사의 말에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그래, 돈이라도 더 줘야지.' 회사는 작년 말 상장에 성공했다. 막상 상장을 하고 연봉 통보 시점이 다가오니 걱정도 들었다. '별로 안 올려주면 어떻게 하지?' 어차피 나는 전문연구요원이라 최소 올해 말까지는 회사에 붙잡혀 있을 수 밖에 없다. '어쩌겠어. 때 되면 이직해야지.' 더불어 이상한 고민도 머리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더 많이 받아야 하는거지?' 

나는 그토록 싫어하는 직무에서 최고 인사고과를 받았다. 예상한 일이었다. 연봉이 적어서 회사가 내 석사학위를 경력으로 쳐준 것인지 안 쳐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신입 치고 회사와 직무에 빠르게 적응했다. 새로운 환경임에도 빠르게 지쳤다. 분명 예상했지만 아이러니한 상황. 그래도 연봉을 올릴 구실을 찾았으니 다행으로 여겼다. 하지만 여전히 질문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나는 얼마나 더 받아야 하나?'

내가 날 모르겠으니 눈에 보이는 건 나 아닌 다른 사람이다. 학벌 덕분에 주변 사람 연봉은 높기만 하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기술자다. 나는 기술이 없다. 그래도 그렇지, 너가 나 2명만큼 일을 한다고? 뒤를 돌아보면 더 아이러니하다. (물론 군대를 다녀와야 했겠지만) 석사를 안하고 학부만 졸업하고 취직했어도 역시 지금의 두 배를 벌었다. 나는 한번도 그를 부러워한 적 없었다. 지금도 후회하진 않는다. 그냥 기분이 이상하다.

그리고 이번주에 나는 연봉 통보를 받았다. 대충 마음에 두고 있던 범위가 있었는데, 그 최소값에 살짝 못 미치는 수준. 회사는 비율로 따지면 꽤 많이 오른 숫자임을 강조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갑자기 머리 속이 아득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왔다. 나는 얼마를 바랐던 건가. 그 금액을 바랐던 이유는 뭔가. 지금 드는 기분은 실망감인가. 이 돈은 대체 무슨 의미인가.

퇴근 후 스터디카페에서도 고민이 이어졌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임의로 정한 그 범위의 최소값은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금액조차 맞춰주지 않은 회사가 너무도 괘씸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회사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달라고. 많이도 아니고, 조금만. 그렇게 그 범위의 최소값은 내 자존심이 되었다.

메일을 쓰면서 내 몸값에 근거를 대기가 너무도 힘들다는 것을 처절하게 느꼈다. 구글을 통해 찾은 자료는 실적을 정량화해서 준비해 가라고 한다.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조언이다. 영업직이면 모를까. 물론 흡사 자원 조달처 역할을 하긴 했지만 팀으로 같이 한 일에 내가 그 중 몇 퍼센트를 기여했다고 어떻게 주장할까? 이에 더해 회사가 먼저 통보한 연봉이 어떻게 책정된지도 모르고, 심지어 전문연이라 Plan B도 없다. 쓸 말이 없었다. 꾸역꾸역 이유를 만들어서 조금만 더 달라고 썼다. 

그래도 나는 돈만 보는 사람은 아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연봉을 못 올려준다면 자기계발비 지원을 해달라고 덧붙였다. 바뀔 직무 역량 향상에만 쓰겠노라 약속했다. 

그 다음날 나는 내게 연봉을 통보했던 부문장과 대면했다. '그래서 얼마를 더 달라는 건가?' 우물쭈물. 메일에 썼던 대로, 그 조금이요. '얼마 안 되네?' 그리고 연봉은 오르지 않았다. 메일에 덧붙였던 자기계발비 사용 허락만 받았다. 지금 그 조금 올리느니 나중에 인사 고과를 잘 받아서 크게 한 번에 올려라. 어차피 월급 받아서 돈 벌기 힘들다. 회사 주식을 사라. 회사에서 성장해서 나중에 창업을 하는 건 어떻느냐. 회사가 정말 필요로 하는 인재에 대해서는 수시로 연봉 계약을 다시 체결할테고, 사이닝 보너스를 줄거다. ……

그 얼마 안되는 돈을 못 올려서, 회사가 올려주지 않아서, 내 자존심이 상했다. 아, 내 몸값이 이거구나. 나는 x원짜리 인간. 이 x원 모은다고 뭘 할 수 있나. 역시 주식이나 해야하나. 그래서 주변 회사 동료들이 시간 날 때마다 정보를 주고 받는 거였나. 아니 이직을 준비해야 하나. 어디로? 얼마를 보고?

고백하건대 앞서 토하듯이 쓴 글이 최근 내 머리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이다. 나도 이런 잡념에 빠져있는 내가 한심하다. 잡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떨쳐내지 못해 더 한심하다. 회사가 그 조금을 올려줬더라면 고민이 사라졌을까? 모르겠다. 1년이 채 안되어 돈이 내 머리 속 영역을 가득채웠다는 사실이 소름끼치도록 놀랍다. 

어서 이 늪과 다를 바 없는 곳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이 구토물을 변기물과 함께 치워버려야 한다. 

그 x원짜리 인간은 내가 아니다. 

내 몸값을 매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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