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Aeon 글(https://aeon.co/ideas/to-boost-your-self-esteem-write-about-chapters-of-your-life)에 따르면 1950년대 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To be adult means among other things to see one’s own life in continuous perspective, both in retrospect and in prospect … to selectively reconstruct his past in such a way that, step for step, it seems to have planned him, or better, he seems to have planned it."

여태까지의 삶을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하나의 연속되는 내러티브로 기술하는 일, 그리고 마미손 마냥, 혹은 기생충의 기우처럼 '계획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재구성하는 일은 보통 자기소개서를 쓸 떄 일어난다. 하지만 사실 우리 삶은 계획하지 않은 일 투성이고, 계획했다 하더라도 사실 그 계획이 기억나지 않을 때도 많다. 기록을 생활화했다면 그런 일이 줄기는 했겠지만, 사실 기록했다 하더라도 그건 과거의 나일 뿐 지금의 내가 아니다.

노트북을 새로 사면서 원래 쓰던 노트북을 정리하고 새로운 노트북으로 옮길 파일들을 훑어보던 중 재작년에 대학원 선후배가 부탁해서 촬영한 영상을 보았다. 이제는 없어졌지만 대학원에서 이런저런 정보를 공유하고 친목을 다지는 시간인 '생생정보톡'에서 튼 셀프 인터뷰였다.

사실 이미 대학원을 나오기 전에 생생정보톡에서 발표를 한 적이 있다.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당시 나는 한참 대학원에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고, 결국 왜 나가기로 했는지를 나 자신과 남들에게 합리화하기 위한 발표였다. 대학원 선배는 그 발표를 '폭탄'이라고 표현하면서 폭탄을 던지고 나간 나를 5개월 만에 소환해서 '그래서 대학원을 떠난 후 삶은 어떤지'를 물었던 것이다.

영상을 찍을 땐 나름 열심히 주경야독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만큼 연구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어 후회도 적지 않았던 때였다. 블로그에도 썼던 것 같지만 대학원과 대학원에 남은 사람들이 내가 나간 이후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 괜히 질투하던 때기도 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은 여러모로 만족스럽지 않았고, 월급마저 적었다. 그 때는 또 그 때 나름대로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살았는데, 다시 돌아보면 또 그 때만큼 열심히 산 적도 없다. 아침에 운동하고 회사 다녀오는 대로 바로 스터디카페 가서 공부하다 새벽에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그 루틴을 잃은지도 1년이 다 되어간다.

영상에서 나는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꼭 결정을 물리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학교에 남아 박사과정을 밟았다면 졸업과 함께 병역복무도 해결될 일이었지만, 4급을 받겠다고 대구까지 내려가고, 어학병, 의경, 의무소방까지 알아볼 정도로 대학원을 나오겠다는 결심에 가득 찬 때가 있었다. 그 때는 그 떄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고, 무얼 선택해도 후회할 거리는 있었을 테다.

나는 사람들이 내게 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항상 곱씹는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사는지, 결정을 후회하는지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래서 끝내 불안하더라도 같이 불안한 게 낫다는 말과 함께 대학원에 있는 사람들끼리 많이 이야기 나누고, 위로하고, 보듬어주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사실 대학원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닌가 싶다.

그 영상을 찍고 얼마 안 가 나는 내가 '무너지고 있다'고 느꼈다. 겨울이 찾아왔고, 일이 힘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퇴근 후 무기력증을 못 이기고 하루에 10시간 넘게 자기를 반복했다. 그런 날이 반복될수록 자책도 심해졌다. '내가 왜 이러지.' 내 자신에게 채찍질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더 무기력해지기만 했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반면 회사에선 좋은 소식이 여럿 들려왔다. 코스닥 상장에 사옥 판교 이전. 기술전략팀이라고 쓰고 연구개발과제 관리라고 읽던 직무 변경 시점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도저히 내 안에서 변화를 만들기가 힘들어서 환경을 바뀌도록 변곡점을 만들려 했다. 훈련소를 어떻게든 3월에 가려고 했던 이유다. 더불어 연봉 인상도 꿈꿨다. 블로그에 썼던 글(<돈>)이 그 때 당시 내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하는 듯 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입사 때는 너무 서둘렀고, 연봉 재협상(이라고 쓰고 통보라고 읽지만) 때엔 과감하지 못했다. 재직기간이 1년 6개월이 안 된 전문연구요원이었기 때문에 대안이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내가 내게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직 전에 회사와 다시 이야기를 나눠봤을 때 다시금 깨달았다. 결국 더 처참하게 무너진 채로 훈련소에 갔다.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훈련소를 가고 싶었다.

훈련소에선 바랐던 대로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지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무기력한 삶을 끝낼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그건 한순간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단순한 자각과 반성만으로는 부족했다. 행동과 회고, 환경과 상호작용이 맞물려야 가능한 변화인데, 뛰어야 하는 길과 내 몸이 그대로인 상태에서 운동화 끈만 고쳐매고 다시 뛰려고 했다. 결국 예상치 못한 변화 하나에 또다시 무너졌다. 되돌아보면 내가 훈련소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분명히 의미있었지만 사실 나는 진정으로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보다 여태 그래왔듯 그저 '계획'을 세우기 바빴다. 주변 사람들의 소중함과 함께 내가 받아왔던, 또 받고 있는 사랑을 느꼈지만 반대로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마음보기' 필요성을 느끼기만 하고 제대로 실천하지는 못했으면서, 이제 충분히 돌아봤으니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깨달음이더라도 소화하기 위해선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그 시간과 노력 없이 다시 계획에만 집중했고, 무엇이 문제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서 해결된 양 기분만 들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의 방향을 내 앞이나 뒤가 아닌 나 자신에게 두기까지 반년 넘게 걸렸던 셈이다. 시선이 밖이 아닌 안을 향하자 그동안 의미있게 생각하지 않았던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주목하게 되었다. 사실 전까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이유는 '사람은 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촉각을 곤두 세우고 알려고 하기보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모습을 생각하고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에만 초점을 맞췄다. 하지만 이제서야 '사람은 변한다'라는 믿음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성이 상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적인 모습으로 변화를 꾀하되 지금 나 자신을 파악하고 점검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어렴풋이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던 내 문제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첫째로, 나는 너무나 감사하게도 사랑받아왔지만 사랑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내가 받아온 사랑 중에서 나는 인정에만 매달렸고, 그 외로는 사랑이라고 자각하지 못했다. 사람마다 사랑의 언어가 다를진대 그 사실을 모른 채 감사할 일에 감사하지 못했다. 인정 역시 중요한 사랑의 언어지만 그것에만 집착하다보니 인정이 가져오는 여러 부작용들에 신경쓰느라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인정욕구는 끝이 없었고, 내 언행에 따라 쌓이거나 깎이는 점수처럼 느껴져서 그 점수의 높낮이를 가늠하고 눈치보느라 불안해했다.

사랑받는 문제는 그 영향이 어쨌든 나 자신에게만 국한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문제는 나 아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혹은 내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 모두 엮여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했다. 사실 여전히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말은 아끼고 더 많이 고민해야겠으나, 관계에서 오는 인정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관계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는 모순 속에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독서를 시작으로 사랑을 공부하고 있다. 게리 채프먼의 <다섯가지 사랑의 언어>를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종교, 특히 기독교로 관심의 범위가 넓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 공부에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실천을 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자기중심성이 강하고 이기적인 나지만, 사실은 그토록 중요한 나 자신 역시 결국 항상 관계 속에 있음을 잊지 않아야겠다.

둘째로, 나는 너무도 쉽게 불안에 지배당했고, 그럴 때면 집착하듯 불안이 없는 과거를 파고들었다. 이 역시 해결하기는 커녕 여전히 이로 인한 강박증적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다시금 자각할 뿐이다. 사실 내 과거는 후회로 가득차서 과거에 집착한다는 게 나 자신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한없이 부끄럽고 미안하기만한 과거를 왜 자꾸 소환할까. 물론 나도 내 자신이 싫어지는 안 좋은 과거만 불러내는 건 아니지만, 행복했던 과거 역시 그 때는 항상 심각했고 심지어는 불행하기도 했기 때문에 - 그리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 흔히 이야기하는 과거 영광에만 매달리며 환상 속에 사는 건 아니다.

내 나름의 분석을 하자면, 이건 아마도 과거는 이미 일어났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되려 안정을 느끼는 것 아닐까 싶다. 나는 매우 중요한 결정을 앞뒀을 때 종종 그냥 내 의사와 상관 없이 정해졌으면 하곤 했다. 흔히 말하는 '선택-결정 장애'와도 비슷하다. 흥미로운 건 막상 선택 후에 드는 후회에는 크게 민감하지 않으면서 미래에 있는 불안에는 크게 민감하다는 점이다. 이상하리만치 지나간 일에는 어렵지 않게 그러려니 할 수 있으면서 - 물론 이렇게 쓰는 동시에 도저히 그러려니 하지 못하는 일들이 떠올랐지만 - 앞둔 일들에는 'let it be'라고 말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했던 인정이 불안 요소 중 하나고, 돈과 건강 역시 빠뜨릴 수 없다. 가끔은 무엇이 불안한지도 모르는 채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떄가 있다. 하지만 과거에 파묻혀서는 불안을 해소할 수 없다. 어차피 지나갈 일이고, 후회하게 되더라도 하나 배웠다고 여기며 앞으로 나아갈 거라면 내가 무엇에 불안한지 알아채고 할 수 있는 한 대비하면 될 일이다. 또한 그 불안 요소들이 해결된다고 정말 내가 행복해지는가 역시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내가 집중해야 할 곳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여기 바로 지금이다. 불안에 연연해 하기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 지금에 충실할 때 불안에 지배당하지 않고 불안을 지배할 수 있다.

이 두가지 외로도 사소하게나마 나에 대해 느끼고 배우고 깨달은 점이 적지 않다. 전문연구요원 기간 3년의 반환점을 도는 시점인 지금의 나를 대학원을 나오면서 세운 계획과 비교하면 너무도 형편없고 오히려 퇴보한 듯 보이기도 한다. 무계획이 가장 완벽한 계획이라는 기생충에서의 기택의 대사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지만, 계획을 지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계획대로 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만은 아닐테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일이 여럿 있었던 2019년이고, 분명 계획 대비로는 이루지 못한 것 투성이인 2019년이지만, 나는 이렇게 결국 나 자신에게 꼭 필요했던 1년으로 기억하고자 한다. 무너져있던 시간들 안에서 나 자신을 발견했다는 내러티브를 간직하고 감사히 여기도록 하겠다. 그럼 2020년은 별다른 계획없이도 자연스럽게 그저 나 자신만의 내가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 나를 발견하고 다시 일어서기만 해도 성공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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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회사를 다니면서 글을 기고하는 일이 줄었다. 2020년에는 꼭 기고가 아니더라도 글을 더 많이 써야 할텐데...

대학원 졸업할 때즈음부터 계속 써야지 써야지 했던 소재와 주제를 2019년 하반기에 와서야 <철창 속 일차원적 연구자>라는 제목으로 과학뒤켠에 기고했다. 아래 과학뒤켠 공식 블로그에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내 마음에 가장 드는 문단 하나만 인용하자면..

"오늘날의 연구자 자아정체성은 [인정 대신] 성과 지표로 구성된다. 연구자의 이력서에는 연구 주제나 중요성 대신 끝없이 긴 논문 출판 목록이 나열되어 있다. 동시에 학계에선 제대로 된 동료평가 문화가 사라져간다. 굳이 바쁜 시간 내어 다른 연구자가 무엇을 연구했는지, 연구 과정과 결과는 타당한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따질 필요가 없다. 두 명 남짓한 익명의 평가자가 통과시켰으니 논문으로 출판되었겠지 싶다. SCI와 같은 인용색인에 등재된 학술지면 더더욱 믿을만하다. 연구자들은 평가를 아웃소싱 했고, 그 자리는 인용색인시스템과 성과지표가 채워왔다. 이것 없이 학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즉 학계는 더 높은 성과지표가 인정을 대체한 금융시스템이자 경쟁사회가 된 것이다."

더 읽기: https://behindsciences.kaist.ac.kr/2019/12/23/%EC%B2%A0%EC%B0%BD-%EC%86%8D-%EC%9D%BC%EC%B0%A8%EC%9B%90%EC%A0%81-%EC%97%B0%EA%B5%AC%EC%9E%90/

p.s. 이름을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것도 같아 SNS에는 따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만화 일부 사용을 허락해주신 신인철 교수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포닭 블루스 책도 구매해서 너무 재밌게 봤고 이후 연재 중이신 조교수 블루스 역시 너무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문득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끄럽게, 또 위험하게 달리는 라이더들을 보며 떠올린 잡생각.

라이더는 너무도 잘 보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노동자가 아닌가.
우리가 길을 다닐 때 그들은 바삐 움직이고, 또 어떨 땐 도저히 좋게 봐주기 힘들게 시끄럽게, 또 위험하게 달리고 있다. 하지만 막상 내가 집안에서 손가락을 놀리며 메뉴를 정하고 나선 보이지 않는다.

음식점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내 식사가 나왔나 싶으면 어디선가 말없이 나타나 포장된 음식물을 들고 사라져버린다. 아까만 해도 내가 줄에서 두번째 서있구나 싶었는데,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라이더들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답답하고 짜증난다. 요즘도 있는 지 모르겠지만 '배달의 민족 주문'이라고 끝없이 울려대던 알람은 마치 택시에서 듣는 '카카오 T' 알람과 다를 바 없이 신경 쓰인다.

음식점을 나서면 정말 10초에 한번씩은 오토바이가 부릉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를 지나친다. 모두 휴대폰이나 전용 단말기를 핸들 위에 달아놓고 끝없이 확인하며 달린다.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다. 주택가인만큼 저렇게 달리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소음에 신경질이 날테고, 또 사고가 날 확률도 높다. 많은 주택가엔 인도가 따로 없고, 있더라도 라이더는 인도와 차도를 가리지 않고 달린다.

하지만 이렇게 너무도 잘 들리고 보이던, 그래서 짜증나고 싫던 라이더들은 막상 내가 배달을 시킬 땐 보이지 않는다.

라이더가 길가에서 달리다가 앞을 보지 않고 주문을 받는 시점부터, 벌컥 음식점 문을 열고 기다리는 손님들의 눈초리를 애써 무시한 채 포장된 음식물을 들고 나오는 장면, 타이머로 설정된 시간을 지키기 위해 신호도 인도-차도 구분도 무시해가며 달려서 내 방문 앞에 오기까지. 그저 나는 방에서 잠옷 차림으로 기다리다가, 좀 늦어지면 짜증도 내다가, 신경질 나던 흔한 오토바이 소리에 기대하다가, 라이더가 도착하면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배달된 음식물을 받으면 된다.

그래서 라이더는 너무도 잘 보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노동자다. 이 메인테이너들은 혹자가 그토록 외치는 4차 산업혁명 아래 일어나(야 하)는 혁신을 유지하고 지탱한다. 항상 그래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제대로, 또 새롭게, 또 좀더 따뜻한 눈으로 발견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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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방산에서 즉석으로 잡은 숙소치고 잠자리가 나쁘지 않았다. 가족운영 게스트하우스인데 밤에 갑자기 셋이서 (아버지-어머니-아들) 야식으로 짜파게티를 끓여먹어서 냄새가 엄청 났던 것 빼고 다 좋았다. 2층 침대에서 자는데 1층에서 잔 아저씨가 코를 골아서 귀마개를 꼈다. 가져오길 잘했다. 덕분에 잘 잤다. 11시에 자서 7시에 일어났으니 딱 8시간 잤다. 

아침을 먹고 출발하자마자 만마니 않은 오르막길들이 나타났다. 조금 힘들다 싶으면 바로바로 내려서 끌고 걸었는데 그러길 잘했다. 점심 이후부터는 오른쪽 무릎이 살살 아파와서 힘을 주기가 어려웠다. 그러다보니 속도를 내기가 힘들어져 더 빨리 지치곤 했다. 오르막길만큼 내리막길도 있었지만 자전거도로 상태가 좋지 않고 차도 혹은 보도와도 구분이 불명확해 속도를 내기가 힘들었다. 자전거 '라이딩'이라고 할만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자전거족의 애환을 십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 제주환상자전거길이 잘 되어 있다고 한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상대적으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정말 별로였다. 만든 사람이 자전거를 타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도로가 꽤 잘 닦여있다고 해서 일부러 MTB가 아닌 하이브리드 자전거를 빌렸는데, MTB 고를 걸 하고 후회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이라 중간중간에 자갈이나 흙이 쏟아져있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냥 도로 자체가 울퉁불퉁해서 자전거가 많이 흔들리고 (특히 속도가 날수록) 덜컹거렸다. 그 때 마다 엉덩이엔 불이 났다. 

더불어 자전거도로나 자전거가 다닐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도 많이 부족했다. 자전거도로가 갓길 위치에 딱 차 한 대 너비로 나있다보니 차가 주차하기 딱 좋게 생겼고, 실제로 2~30분 마다 한번씩은 꼭 주차된 차 때문에 도로가 막혀 돌아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보다 문제였던 건 자전거도로가 계속 차도와 함께 있다가 보도와 합쳐지다가를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이었다. 차는 차대로, 걷는 사람은 걷는 사람대로, 자전거는 자전거대로 위험해지기 십상이었다. 심지어 일부 구간에서는 자전거도로 위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 사람이 버스에 타려면 자전거를 막아서야만 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어제 일기를 쓰면서 이제는 숙소 예약한 것도 없으니 여유를 가지겠다고 다짐했다. 중간에 멈춰서 풍경도 둘러보고 군것질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원시 부족의 옥수수밭에서 열리는 성인식[각주:1] 마냥 편의점이나 카페가 드문드문 있어 갈까말까하면서 지나친 이후엔 꽤나 오랫동안 또 달려야 다른 편의점이나 카페를 만날 수 있었다. 프랜차이즈 카페나 편의점 보다 동네 카페를 가고픈 마음이 있어서 거르면서 달렸더니 생각보다 휴식과 군것질을 많이 하지 못했다. 점심 포함해서 한 5번 정도 쉰 듯. 물론 중간에 사진 찍는다고 몇 번 더 내리기도 했지만.

자전거 대여 업체에서 준 지도에 추천이라고 표기된 곳들은 추천경로답게 경치가 정말 좋았다. 어제 해질녘에 망연자실한 상태로 본 산방산을 아침에 다시 보니 꽤나 아름다웠고, 나중에 언급할 성산일몰봉 다음으로 표선 해변이 매우 인상깊었다. 부속섬이 없는 지역에서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수평선을 보며 달리다보니 엉덩이 아픈 것만 빼면 붕 뜬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과장을 조금 하자면 태평양을 한 눈에 담은 듯 했다. 보말과 이름이 비슷했던 마을과 남원도 좋았다. 해변이 현무암으로 이뤄지지만 않았더라면 (물론 서핑을 해 본 적 없지만) 서핑하는 사람들이 그려질 정도로 파도도 멋있게 치고 있었다. 자전거만 아니었더라면 뛰어들어 파도를 탔을 수도... 

어제 네이버 지도가 자전거 경로를 안내할 때는 내비게이션 기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길을 헤매면서 어플 신뢰도가 떨어져 오픈라이더라는 어플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배터리가 빨리 닳아 계속 간당간당한 상태로 달려야만 했다. 일부 구간에서는 어차피 쭉 직진만 하면 되니 아예 다 끄고 달리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도 사진을 마음껏 찍지 못했다. 그래도 잘한 점을 꼽자면 막판에 숙소 예약하겠다고 배터리를 많이 아껴둬서 성산에서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적당히 여유부리고 부지런히 달리다보니 원래 계획대로 딱 해질녘에 성산에 도착했다. 처음엔 성산일출봉이 잘 보이는 공터에서 노을빛에 반사된 일출봉도 꽤나 멋있어 사진을 찍기 바빴다. 그러다 문득 노을은 어떨까 싶어 서쪽을 바라보았는데... 갑자기 감장이 벅차올랐다. 과장 하나도 없이 내가 이걸 보려고 이틀 내내 달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다가 정신차리고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었다. 여태 한번도 뒤로 돌아가서 사진을 찍은 적은 없었는데 노을이 너무 아름다워 마음에 드는 구도를 찾아 다시 뒤로 힘껏 달리기도 했다. 내가 꿈꿔왔던 일몰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을 '우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제 숙소를 잡아야했다. 성산이 파티의 도시인줄은 몰랐다. 파티가 없는 게스트하우스를 찾기가 힘들었다. 여수에서 이미 한 번 경험을 해봐서 왠만하면 파티가 없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어제처럼 평온하게 지내고 싶었다. 덧없고 재미없는 파티를 뭐하러...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파티 없는 게스트하우스에 들어가니 내일 일출을 보기 위해 방방곡곡에서 찾아온 아저씨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진보다 훨씬 후지고 세탁비도 별도로 5천원이나 받았지만... 뭐 그러려니 해야지. 다들 일출 보러 내일 일찍 일어나는 듯한데 나도 가야하나 싶다. 무릎이랑 허벅지 아파서 일출봉에 올라가고 싶진 않은데...  

어쨌든 so far so good! 무릎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는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리라 생각한다...

오늘의 관찰

해안가에 관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종종 보이던데 뭘까. 보통 옆에 큰 액화산소 통이 있고 수산회사 표지판과 같이 있는 것을 보아 수산물을 처리하는 공장 같긴 한데... 근데 왜 액화산소인걸까?

오늘의 식사

아침: 토스트와 달걀. 게스트하우스 주인 말마따나 보기보다 먹을만한 정도. 생각보다 많이 먹었는데 많이 먹길 잘했다. 안 그랬으면 빨리 배고파졌을 듯.

점심: 고기국수. 서귀포에서 노부부께서 운영하시는 한 노포에서 고기국수 먹었다. 맛있었다.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고.

저녁: 피쉬앤칩스. 성산에서 뭘 먹을까하다가 널린 해물뚝배기 대신 국내 유일하게 호주 피쉬앤칩스협회에서 인증을 받았다는 피쉬앤칩스 집을 갔다. 진짜 제대로 된 피쉬앤칩스였다. 글쎄, 물론 내 피쉬앤칩스 기억은 너무 오래되긴 했지만 한입에 딱 좋은 고기를 썼다는 사실과 잘 튀겼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집이었다. 만족 만족 대만족.

  1.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 인상깊어 잊지 않고 있다. 옥수수밭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뒤돌아가지 않고 달려나와야 하는데, 손에 가장 큰 옥수수를 갖고 나오는 게 목표라고 들었다. 물론 옥수수를 딸 수 있는 기회 역시 한 번 뿐.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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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가는 비행기에 올라탈 때도, 제주도에 도착할 때도, 심지어 빌린 자전거 페달 위에 첫 발을 딛을 때 조차도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한다는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시내에서 제주환상자전거길에 진입하기 위해 5km 가량을 달리면서 생각보다 몸이 무겁고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이후 하루종일 내내 이런저런 걱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해가 지기 전에 예약해 둔 숙소 위치인 중문관광단지까지 갈 수 있을지 가장 크게 우려했고, 마음이 급해져서 시간을 줄여보겠다고 이리저리 환상자전거길이 아닌 다른 도로에 들어갔다 빠져나왔다를 반복하다보니 오히려 길을 헤메곤 했다. 미끄러운 비포장도로와 상대적으로 교통이 복잡했던 시내거리를 지난 걸 생각하면 결국 그냥 자전거길 쭉 탄 게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여유가 너무 없었고, 가장 기대에 부풀 여행 첫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치에 감탄하기보다 시간과 내 위치를 확인하기 바빴다.

사실 불안감의 시작은 자전거 대여업체였다. 분명 후기에서는 자전거도 좋았다고 하고 설명도 친절하게 해주고 여러 서비스도 부족함없이 받았다고 해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고맙게도 공항에서 픽업해 주긴 했지만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이후 아무 말이 없었고 알바로 보이는 사람은 정말 대충만 설명해주고 빨리 나를 내보내려고만 했다. 워낙 자신이 없어서 일정에 대한 점검과 각종 팁을 듣고도 싶었는데, 그런 것 없이 바로 출발해야만 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달아준다고 기재되어 있었던 후미등조차 달아주지 않아 해가 지면 무조건 일주를 멈춰야만 했다. 자전거도 생각보다 낡았고 펑크가 났을 때는 아무리 업체에서 추천하는 보험을 들더라도 몇 시간은 멈춰서 기다려야만 하는 듯 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어 물통 거치대도 부러졌다. 부러져서 날카로워진 거치대를 보며 타이어 펑크 보험을 들었어야했나하고 생각했다. 아직도 걱정된다 남은 이틀 동안 잘 버텨주었으면...

급하게 달리고 달려서 산방산까지 첫 날 찍어야 하는 인증센터는 어떻게 다 찍긴 했다. 하지만 산방산 인증센터 도착하니 이미 해질녘이었다. 숙소 위치인 중문관광단지까지는 계속 오르막길이었기 때문에 한 2시간은 걸리는 상황. 지금 생각해보면 빨리 결정내렸어야 했는데 숙소 예약 금액이 아까워서 그랬는지 1) 자전거가 들어가는 대형택시를 불러서 숙소까지 이동할 지, 2) 숙소 버리고 그냥 산방산 근처에서 남는 방 있는 곳으로 들어갈 지, 3) 자전거도 중간 반납하고 택시타고 이동해서 아예 새롭게 남은 일정을 계획할 지 고민했다. 지칠 대로 지쳐서 3번도 꽤나 매력적이었다. (...)

하지만 길바닥에 앉아 찾아보니 1번도 불가능했다. 대형 택시가 있다는 콜택시 업체 몇 군데에 연락했지만 모두 산방산 근처엔 없어서 힘들다고 했다. 결국 근처 게스트하우스를 찾았고. 그 결과 여기 와 있다. 연 지 얼마 안 되어 시설도 나쁘지 않고 주인도 친절하다. 버린 숙소 비용이 아깝긴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만족.

다소 당황한 상태로 출발하고 또 당황스러운 기분을 안고 오늘을 마무리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역시 타인의 호의를 당연하게 기대하면 안되는 거였다. 아무리 내가 돈을 주고 산 서비스라고 하더라도. 자전거 대여업체도 그렇고, 중문 쪽 숙소 주인도 당황한 내 기준에서는 친절하지 않았다. (문제가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냥 조언 또는 도움을 요청하는 내 연락에 본인한테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묻고 본인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을 뿐...)



마음이 여유롭지 않다보니 바다 풍경에도 빨리 익숙해졌다. 아니, 감흥을 쉽게 잃었다고 해야하나. 급하게나마 찍은 사진들을 보면 참 아름다운데 말이다. 그래도 역시 남들 다 가는 지역만 다니는 게 아니라 해안도로 따라서 관광지가 아닌 곳도 지나다보니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다. 또 역시 몸이 고생하니 (지금 당장 피곤해서 일수도 있지만) 잡생각이나 원래 하던 고민들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물론 여전히 마무리 짓지 못한 일들에 대한 부채감은 남아있지만... 바로 여행을 와서 그런 지 어제 본 <조커> 여운도 길지 않다. 기생충과 다르게...

아래는 몇몇 관찰 결과.

1. 백년초 밭이 있다. 당연한 건가? 그나저나 옛날에 한창 백년초 열매 맛 무언가가 뜨던 시절이 있었는데, 요즘엔 찾기 힘든 듯 하다. 기억에 남는건 백년초 열매 맛 젤리가 들어있던 떠먹는 요구르트인데 못 본 지 꽤 됐다. 맛있었는데.

2. 제주도 학교 운동장은 천연잔디다. 관리도 대개 잘 되어 있는 듯 해서 정말 학생들이 쓰는 운동장 맞나 싶기도. 부럽다 부러워.

3. 제주도도 공기가 안 좋으면 별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 아쉬운 이유인데, 오랜만에 다시 보는 바다 풍경이 좋으면서도 시야가 뿌옇다보니 바다와 하늘이 청명하지 않았다. 태풍이 왔다 가서 공기만큼은 좋을 줄 알았는데 실망이다.

4. 풍력발전소 소음이 생각보다 엄청 크지는 않다. 그런데 바람이 세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3~4대에 1대 꼴로 작동을 안하던데 원래 그런걸까?

그리고 첫 자전거일주 경험에서 느낀 점 몇 가지. 

1. 엉덩이 진짜 엄청 아프다. 마찰 때문에 피부가 아픈 건지, 계속 눌려서 근육이 아픈 건지 분간이 안된다. (둘 다 아픈 거다) 아픔에 적응하다보면 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일어날 때 확 아프다. 그래도 계속 앉아 있으면 엉덩이를 계속 압박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자세를 바꾸거나 일어나서 타자.

(두꺼운 안장으로 교체했다는 자전거 대여업체 알바한테 최대한 엉덩이 안 아픈 걸로 해달라고 했는데 알바가 살짝 비웃으며(?) '엉덩이가 안 아플 수는 없어요'라고 했다.)

2. 해가 지평선에 걸리기 시작하면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6시반 즈음 되면 더 가기보다 근처에서 숙소를 물색하는 게 좋을 듯. 후미등도 없으니 더더욱.

3. 생각보다 라이딩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쉼터나 인증센터에서 가끔씩 만나긴 하는데, 무엇보다 나처럼 혼자 다니는 사람은 정말 없다. 

4. 쉬는 게 정말 중요하다. 여유가 없을수록 더더욱. 1시간에 5분 가량 휴식을 2회 정도 가지는 게 좋은 듯 하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다... 그래야 근육경련 오기 직전 상태까지 다다르고서도 다시 풀린다. (제발 내일 아침에 안 아프길)

아래는 오늘 먹은 것들.

아침: 엄마가 싸준 치아바타 샌드위치 + 달걀. 역시 든든했다. 덕분에 힘차게 출발할 수 있었다.

점심: 협재칼국수에서 해물칼국수를 먹었다. 칼국수를 좋아하진 않지만 근처에서 그래도 제주도니깐 먹을만한 음식이 해물이었고, 혼자 빨리 먹고 다시 달려야했기에 먹었다. 해물이 많이 들어있었다는 것 말고는 그저 그랬다. (13000원)

저녁: 올레식당(맞나?)에서 1인 생선구이 정식을 먹었다. 생선 종류가 불명확한데 조금 기름졌던 것을 제외하면 만족했다. 살이 많았고 바싹 구워 가시도 잘 씹혀서 먹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밑반찬도 나쁘지 않게 나왔다. (9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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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한 달 전부터 계획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다녀왔다. 제주도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건 대학원 선배 2명의 해외 임용 및 유학 송별회 겸 만난 한 교수님께서 부전공 수업 초청강연(?)을 부탁하셨을 때였다. 10월 1일을 말씀하시기에 연차가 많이 남은 김에 3일(개천절), 9일(한글날)을 포함해서 쭉 휴가를 내고서 강의 후에 어딘가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강의일정이 확정되고 바로 2일에 청주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강의 준비와 더불어 여행 계획을 세웠다. 

대학원에 진학하고서부터는 어디론가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항상 휴양을 떠올렸다. 물론 지역에 따라 해야만 하는 구경은 했지만 주로 먹고 자고 쉬는데 초점을 맞췄다. 예전부터 꿈꿨던 휴양은 숲속에서 별빛보며 잠들고 새소리에 잠을 깨고 햇빛 아래 책을 읽는 (...) 그러면서 동시에 있을 것 다 있고 쾌적한 숙소에서의 하루였다. 하지만 몇 번의 경험 끝에 그런 휴양은 돈도 돈이지만 차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상이 되려 무기력해지자 휴양보다 20대 초반에 했던 여행 경험이 자꾸 떠올랐다. 내가 어떻게 그랬지 할 정도로 미친듯이 돌아다녔던 기억. 기차로 일주일 안에 우리나라 한바퀴를 돌았던 내일로 여행 (뒤에 들어보니 그 때 같이 갔던 친구는 정말 힘들고 피곤했다고 한다...). 돈 아끼겠다고 러시아 항공에 점심은 항상 샌드위치나 햄버거 같은 패스트푸드로 때우면서 한달에 15개 도시를 찍고 왔던 유럽 여행. 운전해준 서원 동기 누나와 형의 도움이 컸지만 DC에서 플로리다까지 찍고 올라온 로드 여행 등. 나중에 책 후기를 쓰면 당연히 언급하겠지만 김영하가 <여행의 이유>에서 밝힌 여행의 현재성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참고로 휴양은 현재성보다는 과거와 미래로부터의 도피에 가까웠다.

차도 없겠다. 그래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빡세게 매일 달리기만 할 자신은 없고, 지역마다 바다나 명소 구경도 천천히 하고 싶어 4박5일 일정으로 잡았다. 제주도환상자전거길을 대충 5등분하면 50km가 안되니 오전이나 오후를 골라 이동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지역 관광을 하면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9월말이 되자 태풍 소식이 들려왔다. 정확히 제주도 가는 비행기를 예약한 2일에 제주도 상륙. 3일은 휴일이라 비행기 표가 없었다. 그렇게 4박5일 일정은 2박3일로 줄어들었다. 국토대장정을 하시던 분들이야 크게 어렵지 않은 코스라고 하지만, 중학교 때 자전거로 지하철 1개역 정도 거리로 통학하거나 대학교 때 가끔 타슈나 친구 자전거 빌려서 어은동이나 궁동 다니던 내게는 좀 과해보였다. 4박5일이면 중간에 다치거나 일이 생겨도 충분히 다른 날에 더 달리면 되는 정도지만, 2박3일이면 해가 떠있는 이상 계속 달리지 않으면 (특히 1, 2일차) 목적지 도착은 요원해보이기 때문이었다. 

고민을 조금 하긴 했지만, 그런데 뭐... 이렇게 된 김에 20대 초반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미친듯이 달려보자. 비행기를 4일 김포 출발 편으로 바꾸고 자전거 대여도 다시 신청했다. 그렇게 아래와 같이 계획을 세우고 혹시 모르니 1일차 숙소만 예약을 해두었다. (취소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1일차: 제주공항 - 중문관광단지

2일차: 중문관광단지 - 성산

3일차: 성산 - 제주공항

찾아 읽은 자전거일주 후기들에서 항상 짐을 어떻게든 적게 들고 가라고 강조했기 때문에 노트북은 사치였다. 옷도 자전거 탈 때 입을 운동복(매일 게스트하우스에서 세탁)과 숙소에서 입을 잠옷만 쌌고, 세면도구와 구급약(수많은 파스)을 챙겼다. 노트북에서 백번 양보해서 전자책 기기를 챙기긴 했지만, 숙소에 도착하면 저녁 먹고 씻고 기록하고 자기 바빴기 때문에 책은 거의 못 읽었다. 대신 매일 기록을 열심히 하긴 했다. 

인터넷에 워낙 도움이 되는 글이 많아서 제주도 자전거일주를 갈 생각으로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혹시나 계획중인 사람이 있다면 2박3일은 피하라고 딱 한마디만 하겠다. (나머지는 구글링 하면 다른 좋은 글 많으니 그 글들 읽길 바란다.) 2박3일이 불가능한건 아니고 또 본인 라이딩용 자전거가 따로 있을 정도로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여유가 아예 없지도 않겠지만 나와 같은 초보라면 좀 많이 빡세다. 

눈 앞에 펼치는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 '아 잠깐 내려서 사진을 찍을까'와 동시에 '지금 내렸다가 제 시간에 도착 못하면 어쩌지'라는 갈등을 경험하기 싫다면 최소 3박4일은 필요하다. 

내 죽음은 갑작스런 죽음뿐이었다. 

갑작스레 심장마비가 오거나, 갑작스레 사고를 당하거나, 갑작스레 살해를 당하거나. 그런 죽음만을 상상해왔다. 늙어 죽는 건 차마 두려워서 생각하지도 않았다. 추할까봐서가 아니다. 두 죽음을 상상한 맥락이 달랐다. 

무서워서 떠오르기도 전에 애써 다른 생각하느라 바빴던 건 철없던 시절 죽음이란 무엇일까, 즐겨보던 만화 데스노트에서 말하듯 무(無)일까. 그렇다면 무(無)가 된다는 건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졌을 때다. 지금 이 순간 너무도 확실히 존재하는 나로서는 없어진다는 게 너무도 까마득해서 두려웠다.

반면 갑작스런 죽음은 내가 숨고 싶을 때, 사라지고 싶을 때, 내일이 오는 게 두려울 때 문득 떠올랐다. 물론 적극적으로 죽고 싶었던 적은 없다. 단지 잠에 들면서 내일 눈이 떠지지 않았으면, 달려오는 저 차가 나를 들이받았으면, 저 수상해 보이는 사람이 숨기고 있던 무언가로 나를 찌르거나, 내리치거나, 목졸랐으면. 그게 다였다. 그런 갑작스런 죽음이 오히려 편안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때, 나 역시 아무런 대비도 못했을 때, 그 때 죽음이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적잖이 했다.

물론 돌이켜보면 주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을 때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이제는 나도 잘 안다. 어떻게든 잘 자려고 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내 위로 역시 거진 '일단 잠이라도 잘 자라'는 말이다.

한편 내가 비교적 가까이서 경험한 다른 사람의 죽음은 너무도 느린 죽음이었다. 할머니는 내가 중학생 때 시작한 암 투병을, 그로부터 무려 10년이 지난 후에야 끝내셨다. 모두가 예상한, 심지어 당신 역시 충분히 대비한 죽음이었다. 병원에서의 연명치료가 모두에게 고통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참으로 오래 걸렸다. 할머니는 요양원으로 자리를 옮기신 지 며칠만에 돌아가셨다. 

명절 때마다 내려가서 봬었던 할머니는 오랜만에 보는 그렇게도 아끼던 손주들 보고서 반가워 하지도 않으면서 '내가 얼릉 뒤져야 하는디'라고 했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으셨던 건지, 아니면 밤이 되어 어두워질 때마다 죽음이 두려워 생각을 바꾸신 건지, 그 힘겨운 항암 치료와 연명 치료를 그토록 길게도 견뎌내셨다. 그렇게 끝까지 버티다 고통에 못이겨 뻔한 죽음의 길을 선택하셨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책이 넌지시 어리석다고 말하는 그 죽음이었다.

우리 엄마가 맏며느리라는 이유로 병수발을 들었다. 물론 내 일은 아니었기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나중에 듣자하니 최소한 할아버지나 고모들만큼, 아니 그 이상을 고생했던 것 같다. 그동안 엄마가 참 많이 힘들어했다. 할머니는 옛날부터 엄마를 참 싫어했다. 그토록 당신이 원하던 고추를 둘이나 낳았는데도 명절 때마다 엄마를 울렸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가끔씩 '그렇구나'하고 마는 관찰자였다.

할머니 장례식 때, 특히 염습과 입관을 지켜볼 때 엄마는 거의 쓰러지다시피하며 울었다. 나는 도대체 이 과정을 왜 모든 가족과 친척이 보는 앞에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만큼 엄마가 왜 그렇게 우는 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나는 둘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되도록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서로에 대한 미움을 거뒀길 바랐다.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지만 꿈에서라도 할머니가 엄마한테 고맙다고 하거나 용서를 구한 건 아닐까. 끝내 그 마지막 순간에 엄마도 할머니를 용서함과 동시에 미워했다는 사실에 용서를 구한 것 아닐까. 두 불완전한 여성의 이별을 불완전 이하의 무책임한 남성은 눈물 없이 관찰하고만 있었다.

모두를 힘들게 한 그 어리석은 죽음을 긴 시간동안 내내 목격하고서도 '저렇게 죽지는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안했다면 당연히 거짓말일테다. 그렇게 책을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말 나는 때가 되었을 때 다른 무언가를 위해 조금 더 이른 죽음을 택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겐 정말 그럴 용기가 있나?

당연히도, 지금 내 대답은 '아니오'다. 물론 며칠 혹은 몇 개월, 기적이 일어난다면 몇 년이라는 내 수명 - 물론 그게 고통 속일지라도 - 과 바꿀만한 게 지금으로선 마땅치 않다. 그래서 거꾸로 생각해보았다. 내 수명과 바꿀만한 가치를 찾는 것, 그리고 그 가치를 위해 하루하루 사는 것, 그게 죽기 전까지 해야 할 일 아닐까. 그래야 그 순간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을 읽게 된 건 다름 아닌 회사 세미나 때문이었다. 올해 초에 이미 회사 대표님이 승진자들한테 선물로 이 책을 나눠준 바 있는데, 대표님이 책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인지 그 이후로 계속해서 이 책 이야기를 하시고 사업에서도 책이 지적하는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는게 눈에 보였다. 우리 부서에서도 매달 진행하는 책 세미나 때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책을 받고 나서 점심시간마다 틈틈이 읽었더니 한달 정도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제목을 갖고 있어 나 역시 처음에는 약간의 오해를 했는데, 이 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을 다루지는 않는다. 조금 더 명확히 하자면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가깝다. 물론 여전히 큰 차이가 없어보이지만,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아니면 충분히 오래 살았기 때문에 죽음이 가시권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 즉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과 그 가족이 하는 고민이라 한다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의학 기술의 발전 덕에 돈과 의지만 있으면 병원에서 치료 혹은 연명수단을 통해 충분히 죽음을 미룰 수 있는 시대에,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우선 책을 읽으면서 책 원제가 참으로 탁월하다 느꼈다. Being Mortal. 마치 언젠가는 죽음을 정복할 것처럼 현대의학기술은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그로부터 삶의 의미를 찾고, 삶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보낼 지 결정해야만 한다. 반면 제목 번역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니, 너무 진부하잖아.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덮고나니 저 질문이 새롭게 다가왔다. 아툴 가완디라면 (그가 쓴 다른 책들 제목을 살펴보면 모두 한두 단어다) 절대로 부제를 붙이지 않았을테지만, 붙였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말이지 않았을까. 물론 'How to die'는 아니었겠지만. ('How to give a death'가 괜찮으려나? 모르겠다.)  

아툴 가완디는 책의 앞부분에서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 전에 오늘날 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이루고 있는 일종의 패러다임을 설명한다. 

첫째로, 현대 사회에서 삶에서 독립(혹은 자율)은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가족의 범위는 줄어들었고, 부모와 자녀마저도 특정 시기가 되면 당연하게 서로 독립한다.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삶은 도와주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미안한 일이 되었다. 

둘째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 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p.15) 실제로 인간의 수명은 계속해서 연장되고 있다. 맞닥뜨리면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려야했던 수많은 질병 역시 정복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아툴 가완디는 이 삶과 죽음의 패러다임 속에서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분명히 있음을 강조한다. 사람은 언젠가 분명히 독립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죽음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생명이 자연스럽게 꺼지는 과정이다. 이 두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갑작스레 눈앞에 죽음을 목도한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들이 보다 행복하게 인생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텐데, 저자가 몸담고 있는 현대의학계를 포함해서 현대 사회 전체는 아직도 이 문제를 직면하고 있지 않다. 단적으로 의학계에서는 질병 정복이 노인 돌봄보다 훨씬 가치있는 일로 여겨진다.

책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아툴 가완디는 본격적으로 본인이 생각하는 해법을 제시하기 시작한다. "노령에 접어들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병실을 비우기 위해 시작된"(p.116) 어빙 고프먼이 말했던 '총체적 기관(total institution)' 사례로서의 요양원 대신 정말 사람이 중요한 '어시스티드 리빙(assisted living)' 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말뿐인 어시스티드 리빙은 그저 노인의 자녀들에게 안심만을 심어주고 노인을 생각하지는 않는 곳과 다를 바 없다. 

저자 역시 어떻게 하면 어시스티드 리빙이 정말 성공할 수 있는지 - 사업 차원으로나, 그 안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의 만족 차원으로나 - 뚜렷한 정답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삶에서 추구하는 가치와 관심사가 일상적인 기쁨과 가까운 가족과 친구로 바뀐다는 '사회정서적 선택 이론'이나 시설에 동물을 들여놓으며 노인들이 조그마한 충성심(loyalty)을 가질 수 있도록 함으로서 활력을 불어넣은 '에덴 얼터너티브 프로그램' 등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할 뿐이다. 그는 물론 제대로 된 '어시스티드 리빙'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한다.  

아툴 가완디가 책 중반부에서 제도 차원의 해법을 찾고자 했다면 말미에서는 보다 미시적 혹은 개인적 차원에서 노인 혹은 환자와 그 가족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야기 한다. 물론 우리는 죽음이라는 너무나도 무거운 주제 앞에서 그래도 희망을 노래할 수 밖에 없고 아무리 현실적이더라도 부정적인 말은 피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생기는 단순히 경제적만은 아닌 낭비와 피해가 심하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싸우는 방식에서 사람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것들, 이를테면 가족, 여행,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것들을 위해 싸우는 방식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을 때 나누는 일련의 대화"인(p.283) Breakpoint discussion이 중요한 이유다. 

저자는 경험많은 의사답게 의료진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가 학생 시절 읽었던 의료윤리학 논문 주장을 빌려 의사와 환자가 가부장적(paternalistic, 의학적 권위를 가진 의사가 본인이 생각하는 최선의 처방을 제공하는 것)도, 단순히 정보만을 주는(informative, 환자가 알아서 선택할 수 있도록 의사가 여러 선택지와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아닌 해석적(interpretive) 관계로 재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해석적 관계에서 "의사의 역할은 환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다."(p.308) 물론 이 해석 과정은 지난하기 마련이고 환자의 욕구 역시 분명하지 않거나 변하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해서는 안되는 관점이기도 하다.

책이 그리는 죽음은 '한편의 이야기를 완결짓는 과정'이다. 그리고 완결에 다다른 사람들에겐 선택지도, 그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할 시간도 많지 않다. 그 과정을 본인의 일로 직접 고민한 사람들은 모두 얼마 안가 스러졌기에 여전히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죽음을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부족하다. 독자들로 하여금 어떻게 그 어렵고, 무섭고, 두려운 고민을 하게 만들 것인가? 단순히 아툴 가완디 본인이 의사라서 책의 상당 부분을 환자 사례로 채운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저자의 아버지가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저자도 어쩔 수 없이 경험하는 갈등은 여러 사례 중 하나일 뿐이지만 읽는 사람에게 가장 와닿을 뿐만 아니라 책이 한 권으로 마무리되는데 큰 기여를 한다. 

죽음에 대한 수많은 글은 다소 뻔하게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 심지어 당장 죽을 수도 있다'며 공포를 불러일으킨 후 다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곤 한다. 아툴 가완디의 책은 달랐다.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글이었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야만 한다. 언젠가는 나 역시 떠나야만 한다.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 어떻게 떠날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바라건대 나중에 나를 지도학생으로 거두어주었으면 하는 Sarah de Rijcke가 2019년부로 Leiden 대학 과학기술학연구센터(Center for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이하 CWTS) 연구단장 자리를 맡는다. 지난 5월 취임 기념 공개 강의(inaugural lecture)를 했고, 영문으로 번역한 강의록이 7월에 공개되었다. Sarah De Rijcke는 연구평가에 계량서지학적 지표를 활용할 때 주의하거나 지켜야 할 10가지 원칙을 적은 Leiden Manifesto 작성 및 발표에 참여한 바 있는데, 나는 그 이후로 그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가 새로운 논문을 낼 때 마다 훑어보곤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의 연구가 내게 준 영향이 적지 않았고, 이제는 단순한 영향을 넘어 내 관심 분야가 그의 연구 분야를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있다. 앞서 밝혔듯 유학을 가게 된다면 꼭 이 분께 지도를 받고 싶은 이유다.

존경심을 표현하고자, 또 당분간 멈춰있던 내 연구 열정(?)을 다시 불사르고자 아래 그의 CWTS 연구단장 취임 기념 공개 강의록을 한글로 번역해 둔다. 사실상 전문 번역이긴 하나, 마지막 5문단은 순전히 감사의 말로만 구성되어 있어 따로 옮겨오지 않았다. 이 글이 내가 번역해본 글 중 가장 긴 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번역 경험이 많지 않아 오역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일러둔다. 강의록임을 고려하여 의역한 부분 역시 적지 않다.

번역이 어렵다는 것을 새삼스레 다시 느낀 작업이었다. 본문은 꽤나 길기 때문에 아래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강의록 원문 링크: https://www.cwts.nl/news?article=n-r2x264&title=inaugural-lectures-by-sarah-de-rijcke-and-ludo-waltman

관련 기사 링크: https://www.universiteitleiden.nl/en/news/2019/05/knowledge-production-must-fundamentally-change

* 강의는 네덜란드어로 진행했기 때문에 내가 읽은 영어 강의록 역시 네덜란드어 원본의 번역본이다. 내가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모르기 때문에 번역본을 번역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원문 확인이 필요할 때는 네덜란드어 원본을 구글 번역기를 통해 확인했다.
** 원문 파일에서는 강의록인만큼 참고문헌을 단순히 문장 끝에 [학자 이름]으로 달고 글 말미에 목록을 제공했다. 나는 통상 인용하는 방식을 사용했고, 필요 시 역주를 달았다.

연구평가와 연구수행환경 점검하기

So try it one more time (그러니 한 번 더해보자고)
With feeling darlin', take it from the top (그 느낌과 함께, 처음부터 다시 말야)
--- Kris Kristofferson, Once More with Feeling

저명하신 총장님, 존경하는 동료들, 친애하는 친구들과 가족들, 소중한 청중 여러분.

저는 지난 2017년 10월 30일에 한 이탈리아 해양생물학자로부터 다소 충격적인 이메일을 한 통 받은 바 있습니다. Ferdinando Boero는 '꽃'이라고도 불리는 해파리 떼 출현을 연구하는 학자로, 자세하게는 최근 몇 해동안 부쩍 늘어난 해파리 떼 출현 시기의 원인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연구결과를 해당 연구분야 핵심 학술지에 게재할 수 없었는데, 때문에 몇 가지 문제를 우려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첫째로, 그가 관찰한 비정상적인 해파리 떼 출현 시기는 해양생태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조짐인만큼 절대 사소한 연구결과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둘째로, 해파리 떼가 출현하면 쏘임사고가 느는 만큼 해당 현상은 관광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어업 종사자 역시 해파리 떼가 생선 알과 어린 생선을 잡아먹어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해파리는 해초 성장을 방해합니다. 즉, 해파리는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Boero는 생명과학 분야에서 연구성과지표의 역할을 연구한 제 논문을 읽고 제게 연락을 해온 것이었습니다. 제 논문은 오늘날 학문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그의 생각을 확인해줬습니다. 그는 그의 분야에 자리잡은 다소 엄격한 규범이 이탈리아 학문연구시스템에도 반영되어 그가 보기엔 중요한 기여조차 연구성과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연구자로서 상당한 사회적 관련성을 가지는 정책보고서 작성에도 자주 참여하곤 하는데, 그가 그 보고서를 평가를 위한 실적으로 제출하면 그가 있는 대학에 피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정책보고서는 동료심사를 하는 국제 학술지에 출판되지도, 영향력 지수(Journal Impact Factor; 학술지가 얼마나 자주 인용되는지 나타내는 지표)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여태껏 게재한 논문보다 그 보고서가 훨씬 가치있는 업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연구평가구조는 업적의 실제 가치를 평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학생들을 위해 설명서를 작성하고, 정책입안자를 위해 과학 자문을 해왔지만 학계에서는 아무 것도 인정해주지 않아요. 또 저는 필요 이상으로 동료들이 쓴 논문에 제 이름을 추가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제 논문 게재 횟수는 줄고 있어요. 현재 연구평가기준에 따르면 저는 과거보다 게으른 셈이죠!

저는 평가와 지식생산 간 상호작용을 연구하는데 관심이 큽니다. 따라서 저는 Boero가 보낸 이메일을 연구자료이자 근거 삼아 추후 연구를 계속하고자 합니다.

평가는 오늘날 대학이 돌아가는 데에 있어 영속적인 요소로 자리잡았습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매우 단순한데, 대학이나 연구소 등 지식기관 역시 각종 순위와 등급 매기기 홍수로 이루어진 '평가 사회'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Dahler-Larsen, 2012) 인터넷이 개발된 후 홍수는 더 커지기만 했습니다. 식당부터 호텔, 교육기관까지도 우리는 모두 그 숫자가 떨어지기를 바라듯이 계속해서 점수를 매기고, 계산하고, 순위를 냅니다. 이련 현상은 공적 영역에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공공화장실에 가게 된다면 한번 눈여겨 보십시오. 이제는 '저희 서비스에 얼마나 만족하셨습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화장실 관리자를 초록색, 주황색, 빨간색 얼굴 표시로 된 설문조사를 하는 것도 일반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입력 정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궁금한데요. 결과와 상관없이 설문조사가 있다는 것만으로 청소부가 규율을 경험할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저는 이런 모든 평가와 순위 매기는 행위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특히 학문 연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제 연구는 좁은 의미에서 평가와 계산, 측정만을 다루는 건 아닙니다. 저와 제 연구그룹은 한편으로는 지식 생산을 다루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 학문 관리 및 조직 방식을 다루며 둘을 연결짓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연구비 지원 구조가 크게 변하고 있다는 점과 (Whitley, 2007) 연구업무가 점점 형식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런 폭넓은 관점을 유지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연구는 갈수록 외부 자금을 조달해오는 형태로 수행되며, 과제 기간은 점점 짧아지고 있고, 때문에 연구자들은 경쟁에 내몰리게 됩니다. 특히 이런 연구과제는 대부분 엄격한 과제관리 및 통제 하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Fowler et al., 2015) 이렇게 변화하는 자금 지원 구조, 조직 형태, 정치적-사회적 체계와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평가는 사회에서 핵심적인 절차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 임기동안 저는 현재 학계가 처한 상황을 둘러싼 국제적인 우려와 논의를 다루고자 합니다. 저는 연구 환경에 따라 연구 내용이 어떻게 변하는지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자 합니다. 사회적 절차만을 다루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Boero가 연구하는 해파리 역시 학문적 또는 대중적 토론 주제가 될 수 있는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과학자와 그 제도의 사회학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연구 내용의 사회학 역시 연구할 것입니다. (Latour, 1988) 우리는 과학자가 놓인 상황 뿐만 아니라 그의 연구주제가 처한 상황 역시 이해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가지 중심 질문을 던져야만 합니다. 

1) 우리는 과학과 학문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사람들은 형식적 혹은 비형식적 평가 체계에서 연구의 질(quality), 사회관련성(societal relevance), 좋은 거버넌스, 특정 협업 방식의 중요성, 경력을 무엇이라 생각하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이해관계자는 수월성(excellence)이나 관련성(relevance)이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정책에서는 어떻게 표현될까요?

2) 평가는 학문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

평가는 학문 연구나 그 평가를 활용하는 다양한 정책 및 연구비 지원 기구와 어떻게 상호작용할까요? 우리는 이 상호작용을 어떻게 실천하는지를 연구합니다. 특히 연구자나 이해관계자가 연구 내용이나 작업 방식을 정하는 지점을 들여다봅니다. 실험실이나 바다 위 배에서, 또 기록보관소 속 인문학자들과 함께 말이죠.

3) 작금의 평가방식은 우리가 학문을 평가하고자 하는 방향과 일치하는가? 

바로 스포일러를 발설하자면, 이 질문에 제가 지금 갖고 있는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분명히 연구평가 체계는 몇몇 결함을 갖고 있고, 다행히도 이미 몇몇이 시작했듯 우리는 이를 고치기 위해 나서야 합니다. (Benedictus & Miedema, 2016) 당연히 학계를 포함한 세상은 계속 변하기 마련이니 지속적인 조절도 필요할테지요. 학계는 갈수록 국제화되고 있습니다. 연구자들은 갈수록 거대한 기반 시설(infrastructure) 아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다양한 사람들이 대학 안팎에서 무엇을 연구해야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국가연구의제(National Research Agenda)[각주:1]나 의생명연구에서 환자단체가 가지는 역할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요 사회 문제(노후 건강, 인공지능과 윤리, 부정적인 기후변화 등)에서 해답을 찾는데 있어 사람들의 기대는 실제 학문이 가진 문제해결능력 범위를 넘어서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평가가 어떻게 연구자와 대학의 행동과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또 미치는지 알아야만합니다. 평가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과거에는 무엇을 했는지를 말이죠. 궁극적으로 우리가 평가를 통해 원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평가지표를 염두에 둔 학술활동

Recent events do not give me hope, but they do give me purpose 
(근래 벌어진 현상들은 내게 희망을 주진 않지만, 목적을 일깨운다)
---Kathleen Fitzpatrick, The Generous University

정량적 성과 측정은 연구의 질을 평가하는데 적합한 방식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저는 2012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제 자신에게 이런 계산과 측정, 평가가 정말 학계의 요구를 충족하는지 질문해왔습니다. 지금이야 우리 모두 답을 알고 있지만 그 때만 해도 같은 주제에서 경험적 연구가 드물었죠. 심지어 네덜란드에서 같은 주제로 논의가 일어나기도 전이었습니다. 저는 학계에 만연한 - 주로 정량적인 - 지표들이 좋은 연구를 장려하고 지식 생산의 질을 보장하며, 제대로 된 연구자들을 자리에 앉히고 승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쓰기에 믿을 만한지 알고 싶었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보장하기 어렵고, 오히려 그로부터 거리가 멉니다. 지난 몇년동안 제 연구단에서 진행한 연구과제를 통해 내릴 수 있는 중요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시장경제체제 아래 평가에 대한 지배적인 이해방식이 지식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얼마나 효율적이고 생산적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축소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역자 강조)[각주:2] 연구자가 특정 시기에 논문을 얼마나 많이 출판했는지, 논문이 실린 학술지의 영향력지수는 몇인지, 그 논문은 얼마나 인용되었고, 연구자가 최근 수주한 연구비는 얼마인지와 같은 질문들로 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최소 두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번째는 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연구자들의 안녕(well-being)과 관련이 있는데(Weijden et al., 2017), 더 나아가 이는 사회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요소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치열해지는 경쟁, 줄어드는 동료의식과 공동체적 헌신이 가져올 결과를 상상해보십시오. 2012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수백명을 인터뷰하고 수개월동안 관찰하며 산더미같은 서류를 분석하며 다양한 학제에서 현장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의생명과학만 놓고 보더라도 수많은 야심 있는 젊은 연구자들이 다른 나라 연구자들로부터 연구결과를 '스쿱'[각주:3]당할까봐 휴일에도 쉬어서는 안된다는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쉬지 않고 힘들게 일해서 높은 영향력지수를 기록한 학술지에 논문을 실어온 연구단장이나 학과장이 서로 건강을 챙기라고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건강 챙기시라고 제가 여러번 말했죠. 저는 혈관우회수술을 세번 받고서야 깨달았어요. 네이처(Nature) 지에 논문을 싣는 것보다 삶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요. 

시장경제 원리에 기반한 연구평가체계가 가져오는 두번째 결과는 연구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지점이지요. 우리는 연구주제의 다양성이 줄어들 위험성 역시 발견했습니다. 연구가 갈수록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계획되고 수정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연구자들은 그들의 관심사나 중요성 뿐만 아니라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높은 방향으로 연구질문을 고르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지표와 함께 고민하기(thinking with indicators)'라고 부르는 현상입니다. (Müller & De Rijcke, 2017) 이는 학문이 가지는 다른 질적 요소들(독창성, 긴 기간 동안의 학문적 진척도, 사회관련성 등)을 주변부로 밀어내거나 아예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으로 바꾼다는 점에서 학문 전체적으로 문제가 많은 현상입니다.

우리 모두 두 결과가 사회의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학문에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대학이 세상에 기여하고픈 사람들에게 더 이상 매력적인 일자리가 아니게 될 수도 있겠지요.

제가 '지표와 함께 고민하기'라는 주제로 연구한 내용으로부터 내릴 수 있는 또다른 중요한 결론은 형식적 평가 과정에서 단순히 정량지표를 제외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올해 4월 18일, ZonMw(Netherlands Organisation for Health Research and Development, 네덜란드에서 미국 NIH의 역할을 하는 기관) NWO(Netherlands Organisation for Scientific Research, 네덜란드의 연구재단), KNAW(Royal Netherlands Academy of Arts and Sciences, 네덜란드 왕립 아카데미[각주:4])은 '연구평가에 대한 샌프란시스코 선언(San Francisco Declaration on Research Assessment, 이하 DORA)'에 서명했습니다. DORA는 출판 논문 수나 피인용수와 같은 지표에 덜 의존하고 다른 평가 기준을 도입하기 위한 연구와 연구자 평가에 대한 전세계적 계획입니다. 이들 기관은 DORA에 서명함으로서 연구평가 방식을 개선해야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이들 기관이 자체적으로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소식입니다. 하지만 평가지표의 사용이 이미 주된 지식 생산과정과 밀접하게 뒤섞여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 연구 현장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나아가야만 합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지표인 영향력지수를 생각해보세요. 20년이 넘도록 영향력지수는 서서히 기관 내 제도나 동료평가과정, 특정 학제가 가지는 연구 질에 대한 규범과 가치, 실제 연구자의 행태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역에 침투해왔습니다. 이 평가지표는 누가 대학에 남아 연구를 할지, 어떤 학술지가 중요한지, 또 누가 연구비를 지원받아야 마땅한지 결정하는 데 쓰여왔습니다.

영향력지수와 같은 지표들은 이런 다양한 실천에서 항상 일정 부분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이제 [DORA 서명을 통해] 달라지는 점이 있다면 공식 절차에서 이런 지표들이 쓰이느냐 마느냐겠지요. 하지만 이미 수많은 연구실에서 다음 연구질문을 도출할 때 지표를 염두에 두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영향력지수를 거부하라는 요청은 이런 현실에 대한 지적과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DORA에 서명한 기관들이 꽤나 근본적인 과학지식 생산방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복잡한 작업을 위해 충분히 고민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평가를 통해 정확히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여전히 분명치 않습니다. 역시 대학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도 분명치 않지요. 실질적이고 명확한 비전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를 위해선 앞서 언급한 구조와 문화를 더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DORA 서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더 깊은 곳으로 뛰어들기

So, what have we provoked?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도발했나?)
---Donna Haraway, Tentacular Thinking

잠시 한 걸음 물러나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요?

새로운 연구정책은 학계가 공동연구와 학제간 및 초학제적 연구를 통해 사회적 관련성이 있는 주제에 전념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연구정책은 앞서 제가 주장했듯 전세계 차원에서, 생산 위주의 연구문화와 매우 관료주의적인 평가 관행 속에서 시행될 것입니다. 유럽연합의 연구정책 방향성은 지난 10년 사이 크게 변했는데(Wilsdon & De Rijcke, 2019), 새로운 정책은 유럽 연구계 전반에 오픈 사이언스(open science)와 개방형 데이터부터 연구개발을 사회적 우선사항에 맞춰 조정하는 것까지 다양한 원칙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은 '전지구적 과제(global challenge)' 해결에 앞장서는 연구과제에 연구비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우선사항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앞서 예를 들었듯이 이는 부정적인 기후 악화나 스마트 기술을 포함하고 있죠.

임무 중심의 연구(mission-oriented research)로의 움직임이 모두에게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움직임이 차후에 기초연구에 대한 금전적 및 구조적 지원의 감소로 이어질까 두려워하는 목소리 역시 들립니다. 따라서 유럽연합이 학제간 및 초학제적 연구, 오픈 사이언스와 사회연관성을 촉진하는데 전력을 다할 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다른 '평가 원칙(evaluative principles)'이나(Star, 1995) 수월성 또는 국제 경쟁력 등과 같은 학문적 질 평가 기준과의 마찰을 일으키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마찰에 관심이 많으며, 앞으로 이를 조심스럽게 분석하고자 합니다. 좋은 연구란 무엇인지 판단하기 위한 규범과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이해하고 싶습니다. 모든 연구자는 이제 높은 수월성과 동시에 곧바로 적용가능한 지식을 추구해야 하는 걸까요? 그게 가능하긴 할까요? 의미있는 기여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언제 개별 연구자 혹은 학문 분야가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나요? 그것을 누가 혹은 무엇이 판단할까요? 이를 통해 누가 이득을 취할까요? (Cui bono?) (Star)

제가 이 강연을 시작할 때 연급한 이탈리아 해양생물학자 Ferdinando Boero의 이메일은 결국 해양과학의 평가에 관한 새로운 연구과제로 귀결되었습니다. 이 과제는 방법론적 혁신을 위한 영감을 주기 때문에 우리 CWTS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후에 이 지점을 다루기로 하죠. 이에 더해 연구과제의 주요 연구질문은 제가 재임기간 동안 다뤄야 할 중대한 질문과도 궤를 같이 합니다: 평가와 학문적 통찰은 어떻게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을까요?

왜 해양과학인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Vermeulen, 2013), 제 연구분야에서는 해당 분과학문을 다룬 연구가 매우 적습니다. 또다른 이유는 해양과학이 다른 여러 분과학문과 마찬가지로 그저 학문적으로 우수해야하고, 산업연관성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지구의 생존방안에도 제언을 도출하도록 엄청난 압박 아래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해양학자들은 기초연구를 수행하는 동시에 오염과 남획, 해수온도 상승이 가져오는 효과를 분석해야 하며, 해양환경 인식 제고 활동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기술혁신의 산업 적용에도 힘써야 합니다. 과연 그들은 연구와 효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에서 이 일들을 모두 해낼 수 있을까요? 리스크가 높아 국제적 수준으로 연구비 지원을 받거나 더 복잡한 연구질문을 다루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속에서 그들이 해당 업무를 모두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게 맞는 걸까요? (Laudel & Gläser, 2014)

저는 다음 5년동안 해당 학문분과를 대상으로 연구하는데 전념하여 평가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조사할 것입니다. 저는 제 동료들과, 또 감사하게도 연구과제에 도움을 주기로 한 Ferdinando Boero를 비롯한 5개 주요 유럽해양기관 리더들과 함께 연구를 수행할 것입니다.  

연구방법을 간결하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우선 우리는 해양과학 평가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해양과학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정량적 분석을 시도할 것입니다. 어떤 주제가 다른 것보다 더 가치있게 여겨졌는지, 어떤 연구노선이 '뜨는 주제'가 되고 어떤 건 그러지 못했는지, 누가 세계적인 연구자가 되고 누가 주변부로 사라져갔는지를 연구할 것입니다. 박사과정생 몇 명은 현장연구를 통해 관찰에 집중할 것입니다. 현재 해양과학에서 중요한 건 무엇일까요? 서로 다른 유럽해양기관, 연구실, 선상, 해수면 아래, 팀미팅에서 업무는 어떻게 수행될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유럽과 국가 단위에서의 연구정책 우선순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무엇이 가까운 미래에 해양과학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으로 자리잡을까요?

저는 이 연구과제가 CWTS, 그리고 아마 과학학(Science Studies) 전반적으로도 매우 훌륭한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과제에서 민족지적 방법론과 과학정보계량학적(scientometric) 방법론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접근은 최근 컴퓨터를 사용하거나 과학정보계량학을 통해 만든 모델이 과학기술학과 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요청에 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학정보계량학은 다양한 과학기술학에서 탄생시킨 개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Cambrosio et al., 2014) 물론 그 어떤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쉬운 건 재미없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이지요. 과학정보계량학과 과학기술학은 비록 같은 기원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지난 수십년간 각기 다른 학술지, 학술대회, 문제해결방식, 기준과 규범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에 적잖이 어려울 것입니다. (Wyatt et al., 2017) 레이든에서 우리는 이 둘의 융합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단순히 개별 단계에서 컴퓨터 모델과 과학기술학 모델을 각각 사용하는게 아니라 둘을 오고가며 동시에 반복적으로 진행할 것입니다. (Varga, n.d.) 우리는 컴퓨터를 사용한 분석 결과를 민속지적 작업에 포함 시킬 것입니다. 역으로 우리는 과학기술학 개념들을 반영한 컴퓨터 모델을 개발할 것입니다. 비록 저 자신은 편향되어 있을지라도,[각주:5] 저는 CWTS가 현재 유지하고 있는 훌륭한 여건 상 이 실험을 하기에 이상적인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선택지와 선택권

It matters what stories make world, what world make stories.
(어떤 이야기가 세상을 만드는지도, 어떤 세상이 이야기를 만드는지도 모두 중요하다.)
---Donna Haraway, Staying with the Trouble

마지막으로 저는 제 연구의 적절성(relevance)과 활용성(applicability)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학문과 평가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연구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연구 계획과 연구 정책이 어떻게 실제 실천과 행위로 드러나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평가가 연구자와 다른 이해당사자들의 일상 업무에 주는 영향에 대한 지식을 구할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가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연구자들이 수월성이나 적절성과 같은 정책 용어를 사용할 때 그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다 책임성 있게 쓰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더불어 그들의 작업을 우리 연구에 비추어 보며 지역적 맥락이 사회에 책임지는 연구(responsible research)를 정의내리는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들이 속한 연구공동체 내에서 어떤 가치가 연구의 질을 결정하는지, 또 그들이 가진 기량과 관심사 아래 정말 적절하고 필요한 연구질문과 사회적 문제는 무엇인지를 되물을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작업을 할 때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적 및 방법론적 도구가 매우 중요하게 사용됩니다. 제가 보기에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보다 진지하게 다뤄지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더 '경성' (hard) 과학이 되도록 노력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대신 둘은 더 많은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 여러 문제에 적극 관여해야 합니다. 문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조차 평가문화가 이를 허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규제과학 역시 과학기술학, 평가학과 과학정보계량학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Jasanoff, 1990) 예를 들어 과학정보계량학은 정책수단으로 쓰일 지표를 만드는 데 깊이 관여하고 있어 그 출발점부터 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Wouters, 1999) 이는 해당 분과학문이 미래 지향점에 대한 선택지를 제공하는 추가적인 책임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선택지 역시 사변적일 수밖에 없긴 하나, 이는 보다 덜 폭력적인 방법으로 세계가 가진 복잡성을 추상적 개념으로 환원할 방법을 찾아낼 거라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연구를 하는 이유기도 합니다. (Schinkel, 2014)

그냥 이 모든 평가를 멈추면 되지 않나? 아마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가끔 들으셨을 겁니다. 저는 그 입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과학과 연관된 상당한 규모의 정치적, 금전적, 환경적 이해를 고려하면 해당 입장은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학문과 관련된 내용, 돈, 권력, 명성을 둘러싼 올바른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구조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평가는 같은 목적에 어울리는 수단입니다. 다만 그 의사결정의 대부분을 관료주의적 과정과 몰이해적 지표에 맡기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입니다. 우리는 숙의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여러 선택지와 대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CWTS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연구평가 방법을 개발할 것입니다. (Holtrop, 2018; De Rijcke et al., 2018) 우리는 평가를 집단적 미래 창출 행위로 봐야지, 우리 업무와 관련성이 크고 작은 지표들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한 시도에만 갇혀서는 안됩니다. (Wouters 2017) 또 우리는 평가에서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할 때 기후운동가부터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학자까지 보다 다양한 사람을 참여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세계는 불타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을 할 여유따윈 없습니다.

감사의 말

So try it one more time (그러니 한 번 더해보자고)
With feeling darlin', take it from the top (그 느낌과 함께, 처음부터 다시 말야)
--- Kris Kristofferson, Once More with Feeling

마지막으로 저는 제가 - 틀리지 않았다면 - 레이든 대학에 임용된 208번째 여자 정교수라는 사실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레이든에 첫 여자 정교수가 임용된지 90년 만이지요. 하지만 여전히 불행히도 여자 정교수는 전체 5분의 1이라는 매우 낮은 비율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몇 주 전 제 이모 Nel이 매우 다정하게 써준 편지를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여기 오지는 못하셨는데요. 그는 제 취임 기념 강연을 "첫 박사, 첫 교수, 심지어 여자로서 둘을 이룩한 De Rijcke 가문의 역사에 남을 특별한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저는 편지를 읽으며 자부심으로 가득찼지만, 동시에 그가 과거에 제가 받은 기회를 동일하게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슬프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진짜 문제를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학계에서의 높은 직책에 오른 여자가 드물다는 사실이지요. 가끔 누군가는 이를 그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로 보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고백하자면 저는 항상 젠더격차 문제를 떠올릴 때마다 불편함을 느끼곤 합니다. 젠더 사이에 생기는 후천적 경향성이 하루 빨리 사라졌으면 합니다. 제 경험상 대학에서는 아직도 여성과 남성 모두 암묵적인 기대와 규범속에서 난감해하고 있으며, 젠더격차를 아직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Thornton, 2013)

가끔 그런 기대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도 합니다. 몇 년 전 제가 발표를 한후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조언이 생각나는군요. 그 분은 제게 발표 중에 덜 웃었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학계에 자리잡고자 한다면 웃음을 참아야 한다고요. 정말인가요? 수백년 전 네덜랕드의 첫 여성 정교수였던 Johanna Westerdijk는 지적능력과 유머감각이 매우 잘 어울린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Patricia Faasse가 그에 대해 쓴 전기를 보면 그는 학계에 자리잡은 여성이면서, 굉장히 열심히 일하고, 동시에 "우렁차게 웃으며 파티와 술, 춤을 즐기는, 그러면서 꾸미기나 무의미한 관습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Faasse, 2012) 잘 되었군요! 저도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으니까요!

(후략)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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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yatt, S., Milojević, S., Park, H. W., & Leydesdorff, L. (2017). Intellectual and Practical Contributions of Scientometrics to STS. In U. Felt, R. Fouché, C. A. Miller, & L. Smith-Doerr (Eds.), The Handbook of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Fourth Edition, pp. 87–112). Cambridge, MA: MIT Press.

  1. (역주) 네덜란드의 연구재단이라할 수 있는 NWO( De Nederlandse Organisatie voor Wetenschappelijk Onderzoek, 영문으로는 Dutch Research Council)는 네덜란드에서 수행하는 연구의 사회관련성을 높이고 연구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2015년에 Dutch National Research Agenda(de Nationale Wetenschapsagenda)를 출범했다.이는 연구기관 뿐만 아니라 시민단체, 일반 대중으로부터 의견을 모아 25개의 연구테마 및 140개의 연구질문으로 구성한 말그대로 국가연구의제라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해당 프로그램에서는 연구테마를 '경로(route)'라고 표현하고 있다. [본문으로]
  2. "(...) the dominant hinking in terms of market economics in evaluations reduces the question about the value of knowledge to how efficient and productive it is." [본문으로]
  3. (역주) 영어로 'scooped'. 선점 기회를 빼앗긴다는 뜻이다.이공계에서는 특정 연구결과를 가장 먼저 내놓은 연구자나 연구단만이 인정을 받기 때문에 연구결과를 '선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본문으로]
  4. (역주) 기존에 한림원과 같다고 설명한 것에 대해 지인이 서양의 아카데미(academy)와 동북아시아의 한림원은 서로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온 용어임을 지적했다.찾아보니 한림원은 중국에서는 당나라 이후 황실 학술활동을 총괄하는 기관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때부터 예문관이라는 이름과 오고가며 사명을 짓고 실록편찬 자료를 만들었다 한다. 다만 현재 국내에 있는 과학기술한림원, 공학한림원, 의학한림원 등은 모두 90년대 이후 서구의 아카데미를 본따 만든 조직으로, 연구자들이 자율적으로 만든 결사체로 출발한 후 (아마도 로비를 통해) 법정기구로 자리잡은 것으로 보인다. 아카데미라는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 지 고민하다 결국 한림원이라는 단어가 굳어진 듯 하다. [본문으로]
  5. (역주) Sarah de Ricjke는 STS 학자로 본인이 직접 scientometric 분석을 수행해오지는 않았다. 다만 CWTS는 그와 함께 취임한 Ludo Waltman처럼 훌륭한 scientometrician이 굉장히 많고, VOSviewer와 같은 scientometric tool을 개발하는 등 오히려 이쪽으로 더 이름이 알려진 연구센터이다. [본문으로]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낸 친구 녀석이 결혼했다. 워낙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착하기까지 해서 고등학교 때도 인기가 많았던 친구다. 그래도 같은 반 친구들한테는 연락 돌리라고 한소리 했는데 결국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만 초대한 듯 했다. 때문에 대전에서 있었던 친구 결혼식에 비해 동창회 느낌은 덜했다. 물론 워낙 인기가 많아 굳이 여기저기 알리지 않아도 찾아온 친구들이 많아 보였다. 친구 단체 사진만 세 번으로 나누어 찍었다. 

친구를 떠올리면 나는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대학에 진학한 지 얼마 안되어 친구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다. 장례식에 간 건 처음이라서, 또 친구 마음이 어떨지 가늠하기도 어려워서 한 번 따뜻하게 안아주지도, 심지어는 눈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한 채 맞절만 하고 돌아섰다. 분향을 위해 줄서서 기다리며 머릿속으로는 고민은 많이 했지만, 막상 너무 수척하고 많이 운 듯한 친구 얼굴을 보니 말문이 막히고 몸이 굳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밤새 자리를 함께 하지 못한 것도 참으로 미안했다. 친한 친구라면 통상 그렇게 한다는 사실도 모를 때였다. 식사만 하고 자리를 떴던 그 때를 후회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입구에서 하객들 맞이하는 친구를 말없이 안아주고는 형언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에 한숨과 함께 '가는구나'하고 말았다. 기쁜 날인데 나는 왜 그랬나. 뒤돌아서 뒤늦게 후회했다. 나중에 인사 차 친구와 신부, 양가 부모님께서 자리를 돌아다닐 때 행복하라고 여러 번 말해주었다. 행복해라. 잘 살아라. 물론 워낙 정신 없었을테니 제대로 들었을지, 기억은 할 지 모르겠다. 아무렴 어떤가. 행복해라. 잘 살아라.

요즘 나는 명상을 한다. 어쩌다 SNS를 통해 접한 기회로 '마보'라는 명상 어플 1개월 이용권을 받아서 쓰고 있다. 올해 초만 했어도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내가 명상을 한다니. 무엇보다 최근에 잠을 잘 못 자서, 그렇다고 매일 술을 마시거나 멜라토닌을 먹는 건 꺼려져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어플을 다운 받았다. 명상 어플이라고 해서 별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주제별로 강사가 녹음한 명상 가이드를 틀 수 있는 어플이었다. 명상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별 거 아니었다. 그냥 호흡과 몸 감각에 집중하며 잡념을 떨치는 연습이었다. 신기하게도 어플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을 잘 자고 있다. 잠자기 전 하는 명상은 10~15분 남짓인데, 끝날 때 쯤 되면 '아, 잠들 수 있겠다' 싶고, 몇 분 후에는 잠에 든다.  

그렇게 매일 잘 때만 활용하던 어플을 결혼식 가는 길에 켜보았다. '나와 모든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는 제목의 명상이 눈에 띄었다. 지하철에서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강사를 따라했다.

숨을 들이쉬며,
'내가'.

숨을 내쉬며,
'행복하기를'.

숨을 들이쉬며,
'친구가',

숨을 내쉬며,
'행복하기를'.

숨을 들이쉬며,
'우리가',

숨을 내쉬며,
'행복하기를'.

다섯 번 쯤 반복하고 나니 역에 도착했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엿본다. 예전 미국에 있을 때 같이 있던 사람들이 다들 하길래 잠깐 했었지만, 사진을 올려야만 하는 SNS라서 그런지 경쟁하듯 넘쳐나는 자랑 포스트를 보고 있기가 힘들어 안하고 있었다. 여전히 아예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지만, 좀더 자주 엿보다보니 관점이 바뀌었다. '그래 너라도 행복해(보여)서 참 다행이다.' '너는 잘 살고 있구나, 잘 됐다.'

반면 페북은 인스타그램에 비해 어두운 감정이 더 많다. 위로를 구하는 글도 많다. 페북은 이제 내게 뉴스 채널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내보이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역시 처음에는 왜 저럴까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용기라 생각한다. 내겐 그 용기가 없다. 이 블로그 '끄적끄적' 카테고리 글이 늘어만 가는 이유다. 

어쩌다보니 내게 행복은 너무도 아득해져버렸다. 명상을 하면서도 '내가', '행복하기를'을 되뇌일 때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졌다. 왜 친구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건 이렇게나 쉬운데, 왜 나 자신한테는 이토록 어려울까.

하지만 명상의 핵심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 데에 있다.

'친구가,'

'행복하기를.'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너도,'

'행복하기를.'

'내가,'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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